소설리스트

대탈출-258화 (258/373)

00258  Episode 2-11 돈의 왕좌.  =========================================================================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낮고 탁한 신음소리와 딱딱한 돌바닥의 감촉에 고아라가 가늘게 눈을 떴다. 바닥의 차가움이 볼을 타고 올라왔다.

“으...”

기억이 흐릿했다.

핸드폰을 열었던 장면.

(이거 놓고 가셨습니다.)

빗속에서 목을 잡히던 장면.

“악!”

전기에 감전된 듯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두꺼워 보이는 쇠창살들 사이로 수많은 감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일으켰던 신음소리는 바로 정면의 감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 팔이 벽에 있는 쇠사슬에 묶인 괴인이 끊임없이 앓는 소리를 했다. 그 모습을 보자 고아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꼬리뼈를 바닥에 부딪쳤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다..당신은.”

자신과 세라를 죽이러 왔던 암살자의 모습. 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온대간대 없고 온몸을 포박 당한 채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의식을 완벽하게 차리지는 못했는지 앓는 소리 가운데 알 수 없는 말소리가 섞여 나왔다.

“사부님, 사매 대신 제가 수술을 받겠습니다... 제가 대신..”

고아라가 양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록 쇠사슬에 묶여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눈을 뜰 것이 두려웠다. 그의 말소리는 계속 되었다.

“제가... 살인병기가 될 테니, 그녀는 부디 평범하게.. 감정을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사부님...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그의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고아라의 눈이 그의 몸에서 흐르는 땀방울들을 따라 몸을 훑었다. 가슴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팔과 다리, 머리 부분은 치료가 되어있지 않았다. 쇠사슬에서 풀려난다고 해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침을 삼킨 고아라가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짧은 순간 그녀는 상황판단을 마쳤다.

‘칸나가 우리를 속였어. 아니면 칸나의 부하들이.’

문자를 보내려는 그녀를 습격한 이유는 이곳에 일들이 밖에 알려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목숨을 건, 멋지고 추악한 게임들을 하고 있다고 귀띔해 드리죠)

‘그 게임이라는 것.. 때문에?’

헬라의 말이 떠오르며 고아라는 자신이 큰일에 연루되고 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려움이 감싸 안았지만 그녀는 태연하려고 노력했다.

‘침착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감옥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감옥과 괴인의 감옥 사이에 있는 책상의 위에 괴인의 물건들로 추정되는 무기들이 너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긴 봉과 투척용 단검, 그리고 탄창이 빠져있는 총들이었다.

‘뭔가 없는 거 같은데.’

그를 처음 만나던 때에 불길함으로 가득했던 단검.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 갈 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꺅. 하며 그녀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

쿵!

폭음이 들리는 순간 폭우 속에서 헬라가 뒷걸음을 쳤다.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도플갱어를 바라봤다.

“이년아. 그거, 반칙이잖아.”

“흥. 같은 보조 능력자라면 당신이 유리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검은 드레스 자락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헬라는 상대편의 손에 들린 기분 나쁜 단검을 바라봤다. 낯이 익었다. 자신과 한번 부딪혔던 인섭의 단검이었다. 단 한번이라도 피부에 스치게 되면 즉사해버리는 사기적인 물건인 것이다.

“그게 니 손에 있으면 안 되지.”

쿵.

또 한 번 울리는 폭음 소리에 헬라가 주변을 살폈다. 주위를 돌리고 도망쳐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빌렸죠.”

‘개 뻔뻔해...’

후.

헬라가 숨을 내뱉었다. 저격. 저격이 문제였다. 분명 옥상에 수많은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다행히 아직은 사격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이 년 부하들은, 아직 이곳 상황을 모르는 건가?’

분명히 사격이 가능한 지역.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머리에 총구멍이 뚫리지 않는다는 것은.

헬라의 시선이 슬쩍 지붕을 바라봤다. 먼 거리이지만 저격수들의 총구는 자신과 도플갱어 쪽이 아닌 남호의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르는 거야. 아직.’

“저세상에 갈 준비는 아직 입니까?”

후.

고뇌가 빗물과 함께 드레스 자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플갱어가 단검을 들어올렸다.

“뭐, 유언이 없다면야...”

“저기요.”

갑자기 존댓말로 급전환하는 헬라. 하아. 한숨을 쉰 그녀가 장검을 땅 바닥에 던졌다. 첨벙. 하며 웅덩이에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항복입니다.”

“......”

쿵.

또 한 번의 폭음이 울릴 때까지. 헬라와 도플갱어는 서로를 쳐다봤다. 헬라가 양손을 머리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뒤에서 2등까지만 안되면 되는 거잖아요. 우리끼리 이럴 필요가 없죠.”

“...무슨 개수작이십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돈을 무한대로 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투력이 극강이지는 않아요. 만약 당신과 함께 하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좋은 결과가...”

빗줄기의 사이로 도플갱어가 비웃음을 띄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아무 말도 없던 그녀가 대거를 내렸다.

“좋습니다. 대신.”

‘역시 쉽게는 안 되나.’

도플갱어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호를 죽이고 오세요. 그러면 제 편으로 껴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용가치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 곳에서 죽이기에는...”

“남호를 죽이고 오세요. 한 번 더 사족을 얹으면 우리의 거래는 끝입니다.”

“.....”

‘시발년...’

헬라가 도플갱어를 노려봤다.

“하실 건가요?”

“흥.”

헬라가 웅덩이에 빠져있는 너부러진 자신의 장검을 집어 들었다.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입니다.”

“그쪽이야 말로요.”

장검을 허리에 맨 채. 헬라는 저택을 등지고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저택에서 도플갱어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지 마세요. 헬라 씨. 회색 방은 원래 이런 곳이라는 것을.”

으드득. 하며 이빨을 무는 소리가 빗속에 파묻혔다.

쿵.

또 한 번의 폭음이 산을 흔들었다.

***

점점 가까워지는 폭음을 들으며 남호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작은 쪽지. 저택을 나서는 순간 헬라는 악수를 강요했다. 이상하리만큼 집요한 그녀와 손을 맞잡은 순간 남호는 자신의 손에 쪽지 하나가 쥐어져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뒤로 돌아섰던 것이다.

급한 메모였던지 날린 글씨에는 알 수 없는 글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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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세상에 달은 몇 개일까?

A : 헬라가 가장 예뻐.

*이 쪽지는 바로 버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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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괴상한 표정을 지은 남호가 쪽지를 구깃구깃 해서 웅덩이 속에 던졌다. 후 하고 한숨을 쉬니 입속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아직 회복이 다 안 되었나.’

쿵!

바로 앞쪽에서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다. 빗속을 뚫고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남호의 온몸을 감쌌다.

‘좀 들 아팠으면 좋겠는데....’

폭우를 뚫고 나타난 인물은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음?”

글러브를 낀 운동복 차림의 흰색머리 여자.

“...칸나 씨?”

그녀는 다짜고짜 빗속을 걸어오며 이렇게 물었다.

“내 부하 내놔.”

“......”

무언가 분위가기 달랐다. 그가 아는 칸나는 이렇게 막무가내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음.. 그러니까.. 에...”

남호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아...”

그가 혼란에 휩싸였을 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죽여야 돼요. 남호.”

“헬라?”

짜증이 가득한 표정의 헬라가 어느새 남호의 뒤쪽을 걸어오고 있었다.

“칸나가 적이라고요?”

“아, 진짜 칸나라고 해야겠죠. 우리가 속았어요.”

“무슨..?”

“당신은 못 봤겠지만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자가 있어요.”

잠시 얼굴을 구긴 남호가 힐끗 헬라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달은 몇 개일까?”

“당연히 제가 가장 예쁘죠.”

“진짜군.”

머리를 긁적인 남호가 물었다.

“그럼 우리끼리 안 싸워도 되잖아?”

남호가 주먹을 내리며 되물었다. 헬라가 그것을 보며 전투 자세를 취하라는 시늉을 했다.

“우리 발밑에 폭약의 산이 묻혀있지 않다면 해당되는 말이겠죠.”

“아하?”

“우리가 그녀를 처리하지 못하면, 터뜨린답니다.”

“...거 안 좋은 소식이군.”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칸나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내며 물었다.

“그니까...음.. 당신들 나쁜 사람들 이라는 소리지?”

“......”

남호가 힐끗 헬라를 쳐다봤다. 그 스스로는 폭약이 터져도 두 번은 괜찮겠지만, 헬라는 바로 저세상 행일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그가 곤봉을 들어올렸다.

“전력을 다해 막아주지.”

헬라도 장검을 들어올렸다.

“남호 씨. 몇 번 죽어도 되니까 저만 지키세요.”

“어련하시겠습니까.”

남호와 헬라가 나란히 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자 질퍽한 진흙이 파이기 시작했다. 헬라가 문득 남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미안합니다. 남호. 외통수에 걸려버려서, 당신은 여기서 죽어 줘야 겠습니다. 제가 사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장검을 진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회색방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칸나가 주먹을 쥐어 우득우득 소리를 내고는 검지를 내밀어 까닥까닥 거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덤벼.”

남호의 발과 헬라의 발이 동시에 물웅덩이를 박차고 나아갔다.

***

금세 칸나의 모습으로 변한 도플갱어가 저택 안에 있는 낡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검지로 탁자를 몇 번 두들기며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세 명이서 싸워서 누군가가 쓰러지는 순간.”

(그때를 노리면 되겠습니까?)

도플갱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폭파시켜서 세 명 전부 매장시켜버려.”

(네, 알겠습니다.)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가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연기가 그녀의 입술을 지나쳐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회색 방이 이런 곳 아니겠습니까. 헬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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