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中華)를 박살내야만 한다 - 6
[국방과학연구소 부력실험실]
북방민족과 협상을 끝마치고 최무선을 찾아온 왕기가 부력실험실에서 일전에 본 적이 있는 거대한 수조 위에 떠있는 부유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꾹. 꾹.
부유물 옆에 잔뜩 달라붙어있는 공기가 가득 들어차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새까만 고무로 된 튜브를 눌러본 왕기가 최무선을 향해 물었다.
"고무의 물량이 충분해졌으니 이제 준비가 다 끝난 것이겠지?"
"네. 폐하. 폐하께서 보급선에 싣고 오신 고무로 튜브라는 것을 만들어 황하와 양자강을 도강하기 위한 장비를 대량 생산 중에 있습니다. 무게가 엄청난 땅크가 올라타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보급선 몇 대를 긴급히 개조 중에 있습니다. 주교(舟橋 : 배로 만든 다리)용 선박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럼 땅크 군단이 원나라로 진격해서 황하와 양자강을 단숨에 건너 강남까지 막힘없이 일직선으로 돌파할 수 있겠군. 잘 해주었다. 처음 보는 고무란 재료로 튜브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별거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한 최무선이 답했다.
"이게 다 폐하 덕분이지요. 생고무가 날이 더운 여름에는 끈적끈적 해져서 손이나 물건 등에 달라붙기 십상이고, 날이 추운 겨울에는 반대로 너무 단단해지나 고무에 유황을 첨가하여 가열한 후에 사용하라고 알려주셨잖습니까? 그러면 탄력성이 증가하고, 온도 변화에도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소인과 연구원들은 폐하께서 알려주신 방법을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가황(加黃) 고무를 알려준 당사자가 짐이니 뭐 그렇긴 하지. 병사들의 훈련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도강 작업만을 위한 공병대원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예성강의 급류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으며, 땅크의 힘 보따리를 교체하기 위한 정비대원들 역시 충분한 훈련을 받은 상태입니다. 지금은 다들 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지요."
"화약 문제는?"
"보급선으로 싣고 온 갠지스 강의 진흙을 이용해 대량의 포탄과 땅크 포탄을 쉴 새 없이 제작 중에 있습니다. 화약이 모자라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좋아. 남은 건 원나라와의 전면전뿐이로군. 다들 고생했어. 짐이 포상을 두둑이 하도록 하지."
"감사하옵니다. 폐하. 근데... 소인이 폐하께 보여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말을 하며 최무선이 품에서 사이즈가 제법 큰 종이 묶음을 꺼내어 펼치며 보여주었다.
"이건 신라면이 일본에서 보내온 펄프를 이용하여 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만드니 들고 다니며 기록하기가 용이해서 연구원들이 다들 한 권씩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 그려져 있는 설계도면을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왕기가 설계도면 보다 최무선이 꺼낸 종이 묶음에 더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이건... 공책(空冊)이라고 불러야 하겠군. 펄프를 이용해 종이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조만간 연필(鉛筆)도 만들어야 하겠군."
"연필이 무엇이옵니까?"
왕기 역시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어 최무선에게 보여주었다.
"짐이 시간이 날 때 설계도와 제작 방법을 정리해 놓았다. 고무가 짐의 수중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그 활용법도 생각해 보았지. 가장 쉬운 것이 연필이니 연필부터 만들어야 할 것이야."
잠시 설계도면을 살펴보던 최무선이 물었다.
"묵석(흑연 : 黑鉛) 가루를 곱게 갈아서 점토와 섞고 형틀로 누른 다음 가마에서 구워내어 연필심이라는 것을 만든 후 나무 사이에 끼우는 것이로군요? 제작 공정이 아주 단순해 보이는데요."
- 피식.
그 순간 왕기가 실소를 터뜨렸다.
'정답지를 보면 다 쉬워 보이는 것이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러한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다는 것을 최무선은 모를 것이야. 조만간 연필은 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릴 물건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냥 흑연만으로 제작하면 그 수요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보다 적은 흑연으로 보다 많은 양의 연필을 제작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이 시도되었지. 흑연 가루에 아교와 고래기름까지 섞었었다고 하지? 하지만 흑연 가루를 점토에 섞어서 구워내면 한 자루를 만들 양으로 10자루 20자루를 너끈히 만들 수가 있다고. 그리고 연필 끝에 지우개를 부착한다는 아이디어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모를 테지.'
왕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연필과 관련된 내용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최무선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연구원들에게 말하면 하루 만에 충분히 제작이 가능할 것입니다. 근데... 이렇게 단순한 발명품을 왜 이제야 알려주시는 것입니까?"
"그동안은 지우개를 만들 방법이 없었으니까. 연필과 지우개는 바늘과 실 같은 거라고. 하지만 고무가 있으면 지우개를 제작할 수가 있게 돼지. 반쪽짜리가 아닌 진정한 연필 제작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니라. 공책과 지우개가 달린 연필은 고려가 전 세계에 팔아먹을 신상품이 될 것이야. 도자기처럼 떼돈을 벌 수 있는 효자 상품이 될 거라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웃고 있던 왕기의 표정이 최무선이 보여준 설계도를 들여다보는 순간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건... 총의 설계도로군."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 보시는 설계도는 서역에 있는 신성 프랑스 제국이 주력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카빈총의 설계도입니다. 이러한 신무기로 신성 프랑스 제국이 서역 대부분을 정복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사실 이 설계도는 대단한 비밀이 아닙니다. 신성 프랑스 제국이 여러 국가와 전쟁을 하면서 주변 국가에서도 총기를 몇 정씩 입수하여 연구하였으니까요. 하지만 총신 제작의 어려움과 그리스의 불이라는 것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개발이 불가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포와 땅크까지 제작할 수 있는 기술 강국인 대고려 제국은 입장이 다르지요. 연구소 직원들이 달라붙으면 늦어도 사흘 이내에 시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 턱.
카빈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는 공책을 덮은 왕기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고려 제국에서 총은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잊어버려."
"하지만 폐하. 카빈총은 효율성이 엄청난 무기이옵니다. 그러한 총을 고려에서 만들어 군사들에게 보급한다면..."
왕기가 최무선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짐이 총기의 효율성과 그 위력을 모를 것 같으냐? 활을 쏘아서 100보 밖의 목표물을 제대로 맞추는 궁수가 되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3년은 걸린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말을 달리면서도 적을 향해 활을 쏘는 기사(騎射)를 능숙하게 하려면 최소한 10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만 하지. 하지만 총이란 것은... 3일만 훈련을 받아도, 아니지 단 하루 만에도 사용이 가능한 것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나? 전쟁이 대량 학살전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야. 말을 달리면서도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를 줄 아는 직업 군인들끼리의 전쟁에서 아무런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백성들이 동원되는 집단 살육전으로 변질된다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전쟁에 동원되는 병사들의 나이 또한 지금보다 훨씬 어려지게 된다. 태어나서 칼자루 한번 못 잡아보고 활시위 한번 못 당겨본 소년들조차도 총만 쥐여주면 훌륭한 살인 병기가 되니까. 짐은 절대 그런 꼴을 못 본다."
왕기의 얼음처럼 냉정한 목소리에 살짝 움츠러진 최무선이 포기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대량 살상이 가능한 대포와 땅크를 이미 만드셨잖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그건 일반 백성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야. 농민들이 황실에 불만이 있어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대포와 땅크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관련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총은 다르다.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으니까. 짐이 생각하는 전쟁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직업 군인들 간의 격돌인 것이야. 그들은 그걸 위해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았고 녹봉을 받아 가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심적으로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란 뜻이야. 하지만 총이 등장하게 되면 아무런 훈련도 마음의 준비도 안 된 백성들이 숱하게 죽어나가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해. 짐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 획.
말을 끝내며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싫다는 듯 몸을 돌리며 실험실을 나가기 위해 걸음을 떼는 왕기를 향해 최무선이 끈질기게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그러시다면 그런 총을 만드시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대포나 땅크처럼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직업 군인이 아니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는 총을 말입니다."
- 우뚝.
걸음을 멈춘 왕기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그건 짐이 좀 고민해 보도록 하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총과 관련된 것은 잊어라. 당장은 원나라 정벌에만 신경 쓰도록 해. 총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도록. 이건 짐의 명령이다."
"존명!"
1346년 2월 23일
왕기의 명에 의해 개통에 박차를 가한 평양과 신의주를 잇는 신평선이 마침내 개통되었다. 이로써 개경과 신의주까지 전차를 이용해 사람과 보급품들을 대량으로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졌다.
1346 2월 28일
[대고려 제국의 작전 본부]
쉴 새 없이 무전이 날아오고 있는 두만강 인근에 지어진 작전 본부에서 왕기가 원나라 정벌을 위한 마지막 작전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상령. 군사 이동에 대해서 간단히 보고하도록."
"네. 폐하. 평신선이 개통된 이후 지난 5일간 전차를 이용해 150대의 전차가 두만강 강변 쪽으로 이송되었고, 거기에 따른 보급 부대와 정비 부대가 이미 도착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두만강 강변에는 혹시 모를 방해 공작을 막기 위해 박격포대가 이미 진형을 갖춘 채 배치되어 있사옵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구나. 하지만... 상령. 짐이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겠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여진과 거란의 연합군이 혹시라도 뒤통수를 칠까 봐 걱정하고 계시는 것이잖습니까?"
"그렇다. 짐은 원나라 정벌보다 그들의 변심이 더 걱정된다. 물경 40만에 달하는 병력이야. 만약 그들이 원나라보다 고려를 더 욕심 내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것이니라."
"폐하. 거기에 따른 조치를 이미 취해놓았습니다. 40만에 달하는 병력들 주변에는 대고려 제국의 무선 통신병들이 거미줄처럼 깔려있고, 상공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비행선이 12시진 내내 띄워져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그들이 기수를 고려 쪽으로 돌리게 되면 곧바로 무선이 날아올 것입니다. 또한 신의주와 만포시 사이에 고려의 중앙군을 이미 촘촘히 배치해 놓은 상태입니다. 대포를 운용하고 있는 중앙군이오니 여진과 거란의 연합군의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단숨에 뚫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배신을 하더라도 중앙군이 고려 본토로 진입하려는 하는 여진과 거란의 연합군을 막아내는 동안 폐하께서 이끄시는 본진이 이동해 그들의 뒤를 치면 생각보다 손쉽게 수습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잘 해주었다. 여진과 거란의 본성은 도적 떼와 다름이 없어. 조금이라도 경계를 늦춰서는 아니 된다. 그들을 믿기에는 고려의 백성이 된 시간이 너무 짧아."
"소관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겠사옵니다."
"여진과 거란 연합군의 현재 위치는?"
"방금 전 들어온 통신에 따르면 1차 집결지였던 심양에서 출발하여 일주일 전 반진(盘锦)을 거친 후 호로도시(葫芦岛市) 인근을 진격 중이며 고려군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호로도시에서 산해관까지는 한양과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짧아 일주일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좋아. 모든 준비는 끝난 것 같군. 땅크 군단에게 명령을 전달해라. 두만강을 도하해 산해관까지 쉬지 말고 밤을 새워 내달리라고 말이야. 휴식은 산해관 앞에서 한다. 보급부대와 정비부대도 같이 잘 따라가라고 하고. 지금부터 대고려 제국의 원나라 정벌을 시작한다."
"존명!"
[두만강]
겨울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라 두만강의 강물은 녹아 있었고, 그런 강물 속으로 양옆으로 고무 튜브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부유물들이 짐차에서 내려져 강 쪽으로 계속 투하되고 있었다. 그리고 두만강 강물 위에서는 노 젓는 뱃사공 대신 전기 모터로 작동되는 수십 대의 고무보트를 탄 공병대원들이 부유물들을 붙잡아 차례차례로 연결하고 있었고, 그들 주변에서는 지휘관들의 고함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 그동안 죽어라 훈련한 성과를 보여줄 때이다. 최대한 빨리 땅크가 지나갈 부교(浮橋)를 설치해라.
- 빠른 것도 좋지만 연결을 확실히 해야만 한다. 도강을 하다가 땅크가 만약 물에 가라앉기라도 하면 네놈들의 목이 다 날아갈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집중 또 집중하고 확인 또 확인해라. 네놈들 손에 동료 병사들의 목숨이 달려있단 말이다. 적들의 방해도 없는 고려 땅인 두만강에서도 부교를 제대로 놓지 못하면 적들이 득실거리는 중국 땅인 황하와 양자강에서 부교를 어떻게 놓겠는가?
- 크르르르릉...
잠시 후 부교 설치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오며 왕기가 탄 새빨간 땅크를 선두로 하여 150대의 땅크 군단이 두만강을 건너 만리장성의 산해관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보급품과 병사들을 실은 짐차들이 꼬리를 물며 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대고려 제국이 본격적인 원나라 정벌을 시작한 순간이기도 하면서 인류의 전쟁사에서 오랜 기간 전장을 지배해오던 기마 군단이 역사의 뒤안길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