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13화 (113/171)
  • 대불 제국의 태동(胎動)이 시작되다 - 1

    서기 1346년 2월 6일

    [프랑스의 됭케르크(Dunkerque)]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 이름은 거창하지만 백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두 나라가 전면전을 치른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영국은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자국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서 100년 가까이 영토 분쟁이 계속되었고, 가끔씩 무력 충돌이 일어난 것을 백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툼의 목적은 여타 전쟁과 다를 바 없이 인간의 탐욕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평생 동안 중세사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하루에 1.6~2kg의 빵을 섭취하고, 와인을 물처럼 마셔 매일 1~2리터의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이는 와인의 제조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하여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7도 정도로 약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 시대의 생필품인 와인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프랑스는 영국보다 뛰어난 경제력을 가지게 되는데, 와인의 최대 산지인 프랑스의 '가스코뉴(Gascogne)' 지방에서 한해 동안 거둬들이는 세금이 영국 전체에서 거둬들이는 세금보다 많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의 주력 산업은 양털을 깎아서 천으로 만드는 모직 산업으로 영국의 양털이 영국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으로 대량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은 영국의 양모를 수입해 직조하는 직물 생산지로 영국의 주력 산업인 모직 산업을 떠받들며 영국을 살찌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프랑스 왕실에서는 플랑드르 지방에 세금을 왕창 때리게 되는데 이를 괘씸하게 여간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 지방의 양모 공급을 중단해 버렸다. 이로 인해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된 플랑드르 지역 사람들은 프랑스 왕실에 반기를 들게 되었고, 영국과 힘을 합쳐 프랑스 왕실을 물리치자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양국 사이에 백년 전쟁이 일어나게 만든 진정한 요인이었다.

    쉽게 말하면 프랑스와 함께 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영국은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를 자국으로 편입하길 원했고, 프랑스는 영국의 모직 산업을 견제하길 원한 것이다. 결국 백년 전쟁이란 프랑스의 와인 제조 산업과 영국의 직모 산업이 거둬들이는 세금, 즉 돈 때문에 발생한 경제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왕기로 인해 기존의 역사가 비틀어진 탓에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프랑스의 필립 6세(Philip VI)가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위고'라는 추기경을 통해 위력이 뛰어난 최신 병기를 전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의 에드워드 3세(Edward III)가 영국의 왕이 프랑스의 왕에게 단순히 결투를 신청한 기존의 역사와 달리 얼마 전 프랑스에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었다.

    인구가 400만에 불과한 영국의 에드워드 3세의 입장에서는 인구가 3천2백만에 달하는 프랑스와의 초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영국의 사활을 건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신의 맏아들이자 항상 검은색의 갑옷을 입어 흑태자라고 불리던 이제 겨우 17세의 나이인 황태자를 시켜 갤리선 100여 척을 이끌고 프랑스의 됭케르크 지역으로 상륙을 감행하게 한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의 허를 찌르기 위해 두 가지를 노린 것이었다. 프랑스 입장에서 볼 때 영국이 안전하게 상륙이 가능한 자국의 땅인 노르망디 지역을 피한 것이고, 영국 본토와 가장 최단 거리에 있는 칼레(Calais) 역시 피한 것이었다. 장기전을 행할 경우 경제력이 딸리는 영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파리와 가까운 지역으로 상륙하여 곧바로 파리로 진격해 필립 6세를 사로잡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는 기존의 역사에 기사 계급의 몰락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크레시(Crécy) 전투'보다 6개월 정도 앞선 상륙작전이었고, 상륙 지역 역시 벨기에 지방인 안티오크가 아니었다. 아직 대항해시대 이전이기 때문에 제국으로 미처 발전하지 못한 영국 입장에서 갤리선 100여 척은 영국 해군이 지닌 전투력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운명을 건 상륙작전이었다. 하지만 영국 입장에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백년 전쟁 초창기인 1340년에 벌어진 '슬로이스(Sluis)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이미 궤멸시켰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면 언제든지 바다를 통해 도망갈 수 있다는 것과 영국의 장궁병들이 프랑스 기사단을 원거리에서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영국군은 우리들에게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스코틀랜드 반란과 아일랜드 반란. 웨일스 반란 등을 진압하며 실전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육상에서 벌어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한몫을 했다.

    - 촤악. 촤악...

    갤리선에 매달린 수많은 노들이 마치 그림처럼 일제히 미끄러지며 도버 해협을 건너 2차 세계대전에서 뒹케르케 철수 작전을 다룬 영화 덩케르케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한 됭케르크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각각의 배에 길이가 2미터에 가까운 장궁을 든 장궁 사수인 요먼들 100여 명에 실카 투구를 쓰고 기사들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배틀 훅(Battle hook)과 독일어로 막대기를 뜻하는' Halm'과 도끼를 의미하는 'Barte'가 합쳐진 '할베르트(Halbert)'를 든 200여 명에 달하는 영국 병사들이 실려 있었다. 이는 갤리선이 실어 나를 수 있는 사람 수를 초과한 과적으로 그걸 증명하듯 갤리선의 속도가 굼벵이처럼 느려터졌다. 프랑스가 해전을 벌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갤리선에는 이외에도 함장 1명과 조타장 1명 갑판장 1명 행정장 1명 항해장 1명이 타고 있었으며, 피리와 북을 이용해 명령을 내리는 군악장은 노꾼들이 있는 갑판 하부에 내려가 있었다.

    - 둥. 둥. 둥...

    신선한 공기가 제대로 순환되지도 않는 갤리선의 갑판 아래에서는 노꾼들이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노를 젓고 있었고, 군악장이 노꾼을 관리하는 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해안에 거의 도착했다. 노꾼들이 지쳐 쓰러져도 상관없으니 전력을 다해서 노를 젓게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공손히 대답을 한 노꾼을 관리하는 자가 눈짓을 하자 노꾼들을 감시하던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물통을 들고 노꾼들에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노를 젓는다는 것은 고되고도 힘든 육체노동이기 때문에 이 당시의 노꾼들은 하루에 평균 8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한다. 제때 물을 마시지 못한 노꾼들은 탈수 증상으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물이 없으면 노꾼도 없는 것이기에 갤리선은 현대의 배처럼 기름을 연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연료로 하여 나가아가는 배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잠시 후 노꾼들의 수분 보충이 끝나자 고수의 북소리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고 갤리선들이 일제히 속력을 올리며 뒹케르케 해안으로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갤리선들 중에 가장 크기가 큰 대형 갤리선에서는 흑태자가 휘하 장군들과 작전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검은 빛깔의 광택이 나는 갑옷을 입은 흑태자가 입을 열었다.

    "영국의 병사들이 프랑스의 막강한 기사단을 격파할 수 있겠소?"

    그러자 휘하 장군 중에 한 명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태자 저하.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영국군의 장궁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버리스트(Arbalest)'라고 부르는 석궁을 사용하는 제네바의 석궁 용병단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왕실에서는 얼마 전 제네바의 석궁 용병단과의 계약을 해지하였기 때문에 그들 모두 철수를 한 상태입니다. 뭘 믿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석궁 용병단을 아주 찬밥 신세를 하며 쫓아내다시피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의 프랑스에는 장궁병들의 원거리 공격을 상대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자 또 한 명의 장군이 말을 이었다.

    "그럽습니다. 황태자 저하. 영국군이 취할 작전은 아주 단순합니다. 프랑스의 기사단을 발견하면 가까운 산이나 동산으로 올라가 기마병의 돌격력을 저하시키는 동시에 유리한 고지에서 아래로 장궁을 이용해 활을 쏘는 것입니다. 이는 필승의 전략이니 손쉽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심각한 표정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걱정되지 않소? 프랑스 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제노바 석궁병들을 그냥 쫓아내지는 않았을 것이오. 거기에 대한 방비책이 있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소? 본인의 생각으로는 그 방비책이 아마도 새롭게 개발하고 있다는 신무기일 것으로 보이오."

    "저하. 영국이나 러시아에서 나는 주목(朱木)으로 활을 만든다고 해서 장궁병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따른 사격 훈련에만 몇 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지요. 영국의 장궁병들은 열을 셀 동안 화살을 한 발씩 발사할 수 있는 속사가 가능한 정예 사수들이며, 그 사정거리가 무려 400야드나 되옵니다. 프랑스에서 신무기로 새로운 석궁이나 활을 개발했다고 해도 아직 제대로 된 운용이 가능한 병력들은 거의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미심쩍다는 표정의 흑태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겠소. 본인은 그대들만 믿고 있겠소이다."

    잠시 후 뒹케르크 해안에 도착한 갤리선에서 수많은 병력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1만에 달하는 장궁병인 요먼과 2만에 달하는 창병들이었다. 영국군 전력의 90프로에 해당되는 병사들이 뒹케르케 해안에 상륙한 다음 재빨리 전열을 정비한 후 바닷가를 따라 칼레가 있는 방향으로 남하를 하기 시작했다.

    서기 1346년 2월 9일

    영국 병사들이 뒹케르케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필립 6세가 극비리에 양성한 8천의 병사들을 칼레 지역으로 급파했다. 3만에 달하는 영국군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고, 그들 중에 기사는 불과 3천에 불과했지만 그들 모두의 손에는 위고가 개발한 카빈 소총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고려에서는 최영 장군이 3백 척의 최신형 고려 전함을 이끌고 오키나와를 향해 출발하였다.

    서기 1346년 2월 12일

    - 두두두두...

    전날에 이어 이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뒹케르케에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칼레를 거친 영국 병사들이 파리와 인접한 '아미앵(Amiens)'까지 진격을 하였을 때였다. 척후병이 수천에 달하는 프랑스군을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은 흑태자가 아미앵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솜강 우측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역사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한 대영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이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아미앵 전투가 막 벌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새롭게 쓰인 역사에 의하면 이날의 전투로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한 영국군은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있던 모든 땅을 프랑스에 헌납하고, 포로로 사로잡힌 황태자를 돌려받기 위해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영국을 대파한 프랑스는 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솜강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알라쥬 인근의 언덕에서 포진을 한 영국 병사들 중에서 장궁병들이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몸을 잔뜩 웅크려 뭔가를 보호하고 있는 듯한 자세를 계속 취하고 있었다. 이는 비로부터 장궁의 활시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의 장수들 사이에서 마누라는 품고 자지 않아도 활은 품고 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내건 명분인 '사불가론(四不可論)' 중에 하나인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시대의 활은 습기에 극도로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프랑스군이 솜강에 도착하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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