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09화 (109/171)
  • 공민 황제, 북방 민족과 담판을 짓다 - 4

    - 아구아구. 짭짭.

    불꽃을 이끌며 하늘에서 강림하는 왕기를 발견한 북방 민족들이 탱그리의 화신이 강림했다며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고려군의 진지 앞에서는 북방 민족 부족장들이 걸신이 들린 듯 거대한 철판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는 볶음밥을 옆에 놓여있는 무를 소금에 절인 짠지와 함께 정신없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왕기도 끼여 있었다.

    '불판에 구워 먹는 삼겹살도 맛있지만 역시 내 입맛에는 볶음밥이 딱이로군. 한민족은 밥심으로 산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야. 그냥 먹어도 맛있는 전투 식량 1호를 돼지고기에서 나온 기름에다가 불판에 녹인 버터까지 동원해서 다시 볶았으니 맛이 없는 게 더 이상할 테지.'

    그 순간 왕기는 노국공주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버터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이 시대에도 버터는 이미 있지 않소?"

    굳이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말에 노국공주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폐하의 말씀처럼 이 시대에도 버터는 이미 존재합니다. 특히나 유목을 하는 북방 민족들은 요구르트와 함께 버터를 자주 만들어 먹지요. 하지만 그런 버터는 소첩이 아는 버터와 맛이 전혀 다릅니다. 이 시대에는 버터를 만들기 위해 염소나 양 등의 젖에서 얻어낸 지방질을 기둥에 걸어둔 가죽 주머니에 넣어 수평으로 천천히 저어서 만들거나 두들겨 패서 만들고 있습니다. 인력이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버터가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그래서는 신선도가 형편없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전직이 의사가 아니라 '파티시에(Patisser)'라도 되는 듯 반드시 맛있는 버터를 만들고야 만들겠다는 듯 열변을 토해내는 노국공주의 기세에 밀린 왕기가 대꾸했다.

    "하지만?"

    "소첩에게는 폐하께서 앙리를 시켜 유럽에서 들여온 젖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만든 전기로 구동하는 모터가 있지요. 그 말인즉슨 현대식 원심분리기와 교반기를 만들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기계만 있다면 젖에서 물과 기름을 손쉽게 분리시켜 버터 따위는 단숨에 만들 수가 있지요."

    "무슨 말인 줄은 알겠소만...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이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는 디저트 때문이지요. 버터를 만들 수가 있다면 치즈와 생크림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조만간 정몽주를 시켜 설탕을 만드실 테니 입안에서 살살 녹는 부드럽고 달콤한 디저트를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단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소첩이 장담하건대... 그런 디저트를 집어넣은 통조림은 도자기 못지않은 효자 수출 상품이 될 것입니다. 유럽의 귀부인들이 고려의 통조림을 사 오라고 남편의 목을 조르고 또 조를 테니까요."

    상념을 끝낸 왕기가 볶음밥을 퍼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볶음밥이 맛있기는 한데 무짠지만으로 먹기에는 너무 좀 느끼한 감이 있군. 여기에 김치를 같이 볶아 먹으면 딱일 텐데 말이야.'

    그 순간 왕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감자를 구하러 가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에 들렀을 때 함께 가져왔던 고추 종자가 이미 쌍성총관부에서 길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김치를 담가야 하겠어. 고추가 있다면 고추장도 만들 수가 있지. 떡볶이도 해먹어야 하겠군. 닭볶음탕을 해먹어도 맛있겠지.'

    왕기가 잠시 잠깐 고추를 이용한 메뉴를 구상하고 있을 때 정신없던 주변이 어느덧 조용해져 있었다. 회담의 주인공인 황제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먹고 떠들며 즐기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한 부족장들이 일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부족장들의 이목이 쏠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왕기가 입을 열었다.

    "대고려 제국의 황제인 짐은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전혀 남이라고 생각되지 않소. 같은 민족이며 동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오. 짐의 얼굴을 보시오. 그런 후 여러분 주위에 있는 부족장들의 얼굴을 보시오. 누가 고려인이고, 누가 여진족이며, 누가 거란족인지 구별할 자신이 있소? 없을 것이외다. 그만큼 피가 진하게 섞여 있는 다 같은 핏줄이라는 뜻일 것이오. 당연하지 않겠소? 그 옛날 이곳에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있었고,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가 있었소이다. 그러니 짐은 여러분들이 원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대고려 제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여 남쪽에 있는 고려 백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줄 것이오. 이를 황제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는 바이오,"

    왕기의 말이 끝나자 건주여진의 부족장이 주변 사람들이 들어라는 듯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가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은 심왕 시절 때부터 유명하지.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러자 왕기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짐의 품성을 이렇게 알아주니 고맙구려. 그대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짐은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오. 조만간 이 북방에 고려의 정예 군대가 지금 보시는 진지를 치며 주둔할 것이고, 그대들이 익히 알고 있는 통신소 역시 설치될 것이오. 만약 짐이 약속을 어겼다는 생각이 들면 그러한 통신소를 이용하여 짐에게 즉각적으로 항의를 하시오. 그래도 문제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도 좋고, 짐을 이곳으로 직접 호출해도 좋소이다. 짐이 단신으로 곧바로 날아올 테니까. 하지만 그러기 이전에 시험 삼아 다 같은 고려의 백성으로 한번 살아가 보는 게 어떻겠소? 그대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짐에게는 있으니까 말이오."

    왕기의 말에 건주여진의 부족장인 아합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고려와의 자유로운 교역을 보장하는 것이오? 지금 현재는 국경이 막혀 있어 교역이 불가능하오만..."

    "고려의 백성이 되겠다고 천명한 부족은 그 순간부터 고려와의 자유로운 교역이 보장될 것이외다. 당연하지 않겠소? 다 같은 고려의 백성끼리 교역을 막을 권한은 짐에게도 없소이다. 그런 부족의 부족원들은 고려 땅 어디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오. 짐의 명예를 걸고 보장하는 바이오."

    그 순간 해서여진의 부족장인 동휘호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듣기 좋은 사탕발림이오. 하지만 권리가 있으면 의무도 존재하는 법. 우리 여진족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할 것인지부터 말해보시오."

    "고려 백성과 똑같이 세 가지 의무를 부과할 것이오. 세금과 병역 그리고 노역이지. 하지만 농사를 짓는 자보다 유목을 하는 자들이 더 많은 그대들에게 남쪽의 고려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무를 부과하기는 힘들 것이오. 따라서 짐은 그대들이 익히 알고 있는 '맹안 모극제'를 본떠서 의무를 부과할 생각이라오. 그대들이 세웠던 금나라의 제도이니 짐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각 부족장이 책임을 지고 1모극부가 되는 300호에서 매년 100마리의 가축을 세금으로 납부하시오. 또한 1모극부에서 100명의 장정에게 병역과 노역을 지게 만드시오. 나중에 정확한 인원 파악이 끝나면 새로운 방식을 도모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으로 족하오."

    "다른 말은 다 알아듣겠소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될 장정의 숫자라면 충분히 받아들일만하오. 근데 궁금한 게 있소. 황제께서는 여진족에게 노역을 시키겠다고 했는데... 이 황량한 대평원에서 어떤 노역을 지게 만들겠다는 것이오? 이 평원에 황제의 황궁이라도 지을 생각이시오?"

    "아주 간단한 노역이오. 농경지를 개간하는 것이지. 모든 다툼은 먹고살기 힘든 것에서 비롯되는 법이오. 하지만 이 북부에는 기름진 땅이 존재하고 있소이다. 북쪽에 있는 대흥안령 산맥과 소흥안령 산맥이 휘감고 있는 평야지대이지. 그곳의 땅은 기름지고 또 기름지오. 흑룡강과 요하강이 실어 나른 흙들이 오랜 세월 모여들어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오. 물론 날씨가 춥기 때문에 참파처럼 이모작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이오. 하지만 그 평야는 넓고도 넓소이다. 일 년에 단 한 번의 수확만으로도 막대한 곡식을 안겨 줄 것이오. 그대들이 먹고사는 것이 단숨에 해결된다는 뜻이오. 그리고 노역하는 자들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주어질 것이오."

    "정당한 대가라. 아마도 군표를 말하는 모양이구려. 그 정도의 대가가 주어진다면 노역을 할 만하지. 그리고 황제께서 어디를 말하는지도 충분히 알겠소이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북 평야를 말하는 것일 것이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소. 그 넓고 험난한 땅을 농지로 개간하려면 지금의 숫자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오. 남쪽의 고려인들까지 모조리 동원해도 백 년이 넘게 걸릴 사업이오. 실현성이 너무 떨어지오."

    "물론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짐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땅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소이다. 하다 보면 결국 끝이 보이는 법이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개간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끝을 보게 될 것이오. 그리고 짐에게는 이미 두 가지 해결책이 있소이다. 하나는 단순히 인력으로만 개간하는 것이 아니라 조만간 짐이 직접 개발할 농기계들이 대거 투입될 것이고, 또 하나는 대규모 개간 인력이 조만간 이곳으로 투입될 예정이오. 그렇게 되면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내에 개간이 가능할 것이외다."

    "대규모 개간 인력이 어디서 들어온단 말이오? 설마 남쪽의 고려인들을 춥디추운 이곳까지 끌고 올 생각이오?"

    가장 반대세력이던 해서여진의 부족장인 동휘호의 말에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해서여진쪽도 어느 정도 내 말에 혹하고 있어. 이미 팔부 능선을 넘어섰다. 남은 건 화룡점정(畵龍點睛)뿐이야. 내가 여기까지 온 진정한 목적을 꺼낼 때가 되었어.'

    왕기가 모든 부족장이 보라는 듯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짐이 비록 황제라고 하지만 백성들에게 그렇게 무리한 노역을 시킬 수는 없소이다. 하지만 방법이 있소이다."

    "그게 어떤 방법이오?"

    "그대들이 짐의 정책을 정면으로 거역하면 되는 것이라오."

    - 쾅!

    그 순간 동휘호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외쳤다.

    "결국 목적은 전쟁이었구려. 좋은 말로 살살 꼬드기더니... 황제의 정책을 거역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들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속셈이 아니오?"

    그때였다. 왕기가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천지가 진동하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그대가 틀렸소!"

    왕기의 기세에 밀린 동휘호가 몸을 움찔하더니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무엇이 틀렸다는 것이오?"

    "짐은 고려의 백성들을 이곳으로 강제로 끌고 올 수가 없소이다. 그랬다가는 고려가 발칵 뒤집힐 것이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오. 하지만 데리고 올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 짐이 조만간 일본 정벌에 나설 것이니까."

    "그럼 일본에 있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고 올 생각이라는 것이오?"

    "그렇소. 얼마 전 짐이 고려 백성들에게 발표한 '공민육헌'이라는 것이 있소이다. 거기에 나와있기를 고려 백성은 황제를 제외한 모든 자들은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나와 있소. 하지만 동북 평원을 빠른 시간 내에 개간하기 위해서는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군소리 없이 개간에 임할 대규모의 노예가 필요하오. 짐은 일본인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곳이 고려의 땅이 되면 그들 역시 짐의 백성이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도 공민육헌이 적용되는 것이지."

    "오호라... 그러니까 공민육헌을 잘 모르는 여진족들과 거란족들이 일본인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려먹으라는 뜻이구려?"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 자로군. 하긴 아무나 부족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

    속으로 뇌까린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짐에게는 일본인들을 강제로 잡아와서 노예로 부릴 명분이 없소이다. 짐이 반포한 공민육헌을 짐 스스로가 어기는 꼴이 되니까. 그러니 그대들이 공민육헌을 잘 몰라서 짐의 정책에 반했다는 명분을 만들어줘야 하겠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순간 동휘호가 말을 받았다.

    "우리들도 일본 정벌에 참여하여야만 하겠지. 황제의 정책에 반해 고려인들의 손으로 직접 노예들을 잡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바로 그것이오. 옛적부터 여진족들이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걸 짐이 잘 알고 있소이다. 일본까지 간 적도 있다고 들었소. 예상외로 바닷길에 아주 능하다는 뜻이지. 맹안 모극제에 따라 병력을 차출한 다음 짐과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서시오. 그런 후 일본에서 잡아온 자들을 이곳으로 끌고와 노예로 부려 개간을 하면 되는 것이오. 그대들이 모든 고려의 백성들은 평등하다는 짐의 뜻을 잘 몰라서 일본인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것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소?"

    그 순간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났는지 잔을 높이 든 동휘호가 자신의 부족원들과 다른 부족장들이 들어라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일본에 가면 약탈할 것도 많을 것이오. 가진 재물이 많기로 유명한 대고려 제국의 황제이시니 우리가 약탈한 재물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을 것이라 믿소이다. 우리 부족은 황제의 뜻에 따를 것이오. 오늘 이 순간부터 고려의 백성이 될 것이고, 황제와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서 막대한 재물과 수많은 노예들을 잡아와 동북 평원을 개간할 것이외다."

    - 쨍.

    왕기가 잔을 들어 동휘호와 건배를 하자 동휘호가 공손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전쟁 중에도 지금과 같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당연하다. 짐은 전쟁을 함에 있어서 보급을 그 누구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이지."

    "언제 일본 정벌에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거기에 맞춰 소인이 가장 용맹한 전사들을 추려놓겠습니다."

    - 벌컥.

    단숨에 술잔을 비운 왕기가 대꾸했다.

    "날이 풀리는 즉시 시작할 것이야. 늦어도 봄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 벌컥.

    덩달아 술잔을 비운 동휘호가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소인이 거느리고 있는 부족원들이 얼마나 용맹한지 전장에서 황제 폐하께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겠네."

    그 순간 왕기의 시선이 저 멀리 바다 건너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북방 민족과 담판을 잘 지은 왕기의 마음속에서 본격적인 일본 정벌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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