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104화 (104/171)
  • 천마 교주와의 혈투 - 6

    [함양궁의 동루(東樓)]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60리가량 떨어진 고대 진(秦)나라의 수도였던 함양(咸陽). 함양의 오른쪽에는 함양과 서안을 연결하여 진나라 때부터 끊임없이 물자를 실어 나르던 위수(渭水)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서안에 짓던 화려하기 짝이 없던 아방궁(阿房宮)은 미처 완공이 되기도 전에 진시황이 죽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마저 멸망해 항우를 따르던 군대의 방화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위수만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함양 외곽으로는 진시황이 건설했다는 '위성(渭城)'이 둘러쳐 있었으며, 위성 안에는 진시황이 머물렀다는 '함양궁(咸陽宮)'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해가 조금씩 머리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는 오초(午初). 마교와 약속한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자 함양궁에서 가장 높다는 '동루(東樓)'에 모여 있는 원나라 황제와 고위 간부들 그리고 중원 무림의 수뇌부들이 목이 빠져라 위성 밖의 들판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제 막 결전을 앞두고 있는 함양성 외곽에 위치한 넓은 들판에는 예로부터 유명한 목화 산지답게 수확이 끝난 목화들이 힘겹게 겨울바람을 버티며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성곽 양쪽에 위치한 좌익과 우익에는 원나라 기마병들이 각각 1만씩 포진해 있었으며, 중앙에는 물경 2만에 달하는 중원 무림인들이 한곳에 뭉쳐서 자신들의 병기를 손질하며 혈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동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척 무관이 궁금한 점이 생겼다는 듯 자신의 바로 옆에 서있는 강호의 십대고수 중에 하나인 남궁세가의 창궁일검(蒼穹一劒)을 보며 물었다.

    "무림인들의 가슴마다 매달려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창궁일검이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응? 해동제일검께서는 지급받지 못하셨소? 무림인들이 가슴에 붙이고 있는 건 연단술(練丹術)이 뛰어난 모산파(茅山派)에서 대량으로 제작한 부적(符籍)이라오. 값비싼 괴황지(槐黃紙)에 모산파의 문주께서 도력을 집어넣은 주사(朱沙)로 직접 만든 진품이지요. 부적이 무쌍천마의 정기 흡입술을 막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미처 못 받으셨으면 제가 한 장 갖다 드리리다."

    그러자 척 무관이 뭔가가 들어가 있는지 불룩하게 솟아오른 자신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마교주와 직접 붙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마교주인 천마는 화경에 오르신 태청진인(太淸眞人)과 공심대사(空心大師)께서 상대하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상대가 천마만 아니라면 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적이 필요 없지요. 근데... 부적은 정말로 효과가 있습니까?"

    "아직 실전에서 시험을 해보지는 않았소이다. 하지만 부적이 천마의 정기 흡입을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좋은 것이지요. 화경을 뛰어넘은 절대 고수끼리의 결투는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할 테니까요. 작전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태청진인과 공심대사가 천마 교주를 유인해서 싸우고 그 사이에 나머지 천마 교도들을 죽여버린 후 합공을 한다는 계획이지요. 만약 천마 교주가 유인책에 넘어가지 않으면, 이쪽의 희생을 무릅쓰고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을 시전해 최대한 빨리 천마 교도들을 정리한 후 재정비를 하여 무공이 낮은 자들은 모두 뒤로 빠지고, 초절정 고수들만 남아 천마를 합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소이다. 원나라의 기마병은 별도로 치더라도 무인의 숫자가 우리가 훨씬 앞서오.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고수의 숫자에서도 우리 쪽이 앞서고 있소이다. 저쪽은 원로전의 팔마와 천마대주, 군림대주, 흑풍대주, 무쌍대주 정도가 초절정이라고 하오. 하지만 이쪽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가주들과 원로들이 모두 나섰소이다. 최대한 빨리 천마 교도들을 처치한 후 그들의 시체에도 부적을 붙일 계획이오. 시체에서의 정기 흡입만 막는다면 천마를 충분히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자신만만한 창궁일검(蒼穹一劒)의 말에 척 무관이 속으로 뇌까렸다.

    '말처럼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을까?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당대의 천마 교주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이며 이미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존재라고 말이야. 천하제일 고수이신 폐하께서도 단신으로 붙어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없다고 말하는 존재야. 절대 방심할 수 없어.'

    그때였다. 동루에서 들판 쪽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적들이 나타났다!"

    척무관이 고개를 돌려보니 백여 명에 달하는 악사들이 앞장서서 뿔피리를 불고 있었고, 그 뒤로 8천에 달하는 천마 교도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삘리리리...

    마치 제사나 장례식에 쓰일법한 괴상한 뿔피리 소리가 귀에 들려올 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창궁일검이 중얼거렸다.

    "이거 좋지 않군. 소문이 사실이었어."

    "뭐가 좋지 않다는 것이며, 뭐가 사실이라는 것입니까?"

    척무관의 물음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창궁일검이 답했다.

    "뿔피리를 부는 악사들은 마교의 제사장이 거느리고 있는 자들이라오. 여태껏 마교주가 중원을 네 번이나 침공했소이다. 하지만 그때에는 제사장이 단 한 번도 따라오지 않았소. 제사장은 교주의 명을 받드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움직이는 자이기 때문이라오. 제사장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중원 무림과의 전투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계시를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뜻이 되오. 느낌이 영 안 좋소이다."

    '폐하의 말씀처럼 당대의 마교주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 제사장이 따라나설 만도 하지.'

    그 순간 누군가가 척무관에게 다가와 말했다.

    "해동제일검. 황제께서 그대를 급히 찾으시오."

    잠시 후 황제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척무관을 보며 물었다.

    "고려검황인 공민 황제는 언제쯤 오는 것인가? 왜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지?"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폐하께서는 약속을 철석같이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오정이 되면 정확히 모습을 보이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보이시지 않는다고 해서 작전을 뒤로 미루실 필요는 절대 없습니다."

    척무관의 말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양 원나라의 여러 장수와 관리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 폐하. 적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 먼저 치셔야 합니다.

    - 적들이 포진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송양지인에 불과하옵니다. 기습의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치시는 게 좋을 듯 하옵니다.

    - 폐하. 위성 성벽에 배치해놓은 '텡게르(몽골어로 천둥벼락을 뜻함) 대포'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공격을 시작하시지요. 그래야만 아군의 희생을 최소로 줄일 수 있습니다.

    - 맞습니다. 폐하께서 아시다시피 돌로 만든 포탄은 그 제작이 어려워 보유량이 몇 발 되지 않습니다. 최대의 효과를 보려면 초전에 적들이 뭉쳐있는 곳으로 발포하여야만 합니다. 지금이라도 공격 명령을 내리시지요.

    전날 밤 자신이 대량으로 뇌물을 뿌렸던 장수들과 간부들이 약속대로 앞다투어 진언을 하는 모습을 보며, 척무관은 머릿속으로 지난밤 비행선에서 왕기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가죽 주머니에 가득 들어있는 금은보화를 보며 척무관이 물었다.

    "폐하. 기껏해야 약속된 전투 시간을 조금 앞당기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재물을 원나라 관리와 장수들에게 뿌리라는 것입니까? 너무 과해 보입니다."

    "걱정 말거라, 장차 내가 뿌린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재물을 거둘 것이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이미 협약이 체결된지라 원나라 황제가 더 많은 땅을 내어줄 리가 없습니다. 설사 원나라 황제가 관중 평야의 일부분을 내어준다고 해도 고려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지요. 여기까지 와서 농사를 지을 백성이 없을뿐더러, 수확한 식량을 고려까지 옮기기에는 수송비가 너무 많이 들 것입니다. 뿌린 재물의 반에 반도 가치도 없을 테지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렇게 넓은 땅이 아니며 농토도 아니니라. 나나 정비가 지낼 별장을 지을만한 조그마한 땅이지. 비록 조그마한 땅이라도 경치가 좋은 휴양지이기에 얻어내려면 생색을 제대로 내야만 한다.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 그렇게 진행하기만 해."

    왕기에게 기름진 관중 평야 따위가 아닌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걸 알아챈 척무관이 고래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언제나 소관의 예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척무관이 신하들의 간청에 넘어간 원나라 황제가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난 다음 대포와 관련된 장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대포의 탄환을 철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소?"

    "철로 탄환을 만드는 것은 쉽소이다. 대포의 구경에 맞춰 제작된 구형의 틀에 쇳물을 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돌로 탄환을 만드는 것은 대포 구경에 딱 맞도록 사람이 바위 덩어리를 일일이 손으로 깎아야만 하기에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제작하기도 힘이 드오. 성벽을 부실 때에는 철로 된 탄환이 좋지만,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돌로 된 탄환이 더 좋소이다. 그 효과가 전혀 다르지요."

    "어떻게 다르단 말이오?"

    "지켜보시면 알게 될 것이외다. 난 바빠서 이만..."

    황제의 공격 명령이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떨어지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장수가 대포가 설치되어 있는 성벽을 향해 떠나자 척무관 역시 약속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창궁일검이 다가오더니 당부했다.

    "해동제일검. 잊지 마시오. 우리 쪽 고수들은 상대편 고수들 중에 상대할 자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이오. 아무하고 붙어서는 곤란하단 말이오. 그대와 나는 팔마 중에 검마를 상대해야만 하오."

    척무관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위성 성벽에 거치되어 있던 텡게르 대포에서 그 이름처럼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돌로 된 포탄이 날아가기 시작했고, 양익에 있던 기마병들이 일제히 적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약속된 오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 쿠구쿵!

    - 쏴아악...

    하지만 천마 교도들은 모두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돌탄환은 제법 많은 숫자의 천마 교도들을 단숨에 쓰러트렸다. 거대한 탄환이 날아오는 것을 피하지 못한 자는 없었지만 돌로 된 탄환이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으로 쪼개지면서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했기 때문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척무관이 뇌까렸다.

    '저래서 돌로 된 탄환을 쓰는 거로군. 철로 된 탄환은 날아오는 방향을 읽고 피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떨어진 다음 쪼개져서 사방으로 날아가는 돌로 된 파편은 피하기가 쉽지 않지.'

    대포의 선제 공격이 제대로 먹히자 태청진인과 공심대사가 능공허도의 경공으로 날아가며 힘차게 외쳤다.

    - 죄 많은 중생인 마교주는 본승이 직접 상대하겠소이다. 그러니 피하지 말고 썩 나서시오.

    - 사람들의 정기를 빨아먹는 마교주는 천도(天道)를 거역한 자이니 하늘과 나의 검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두 절대 고수의 외침과 함께 중원 무림인들이 일제히 천마 교도들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고, 척무관 역시 검마를 목표로 훨훨 날아갔다.

    - 콰과광.

    양쪽의 무리들이 정면으로 맞부딪치자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접전에서 우위를 보기 시작한 것은 예상을 뒤엎고 천마 교도들 쪽이었다. 뿔피리를 불던 백여 명의 악사들이 예상을 뛰어넘은 고수 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원 무림인들이 밀리자 천마가 자신의 교도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는 태청진인과 공심대사를 옆쪽으로 따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어도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리라.

    강호의 최고 고수인 세 사람이 접전이 벌어지는 지역을 벗어나는 그 순간 하늘에서 새까만 비행선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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