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 역사의 비틀림 그리고 천마 교주와의 혈투 - 2 >
서기 1346년 1월 20일
[연경전의 침실]
최무선의 보고를 받은 왕기가 연경전으로 날아가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고려를 떠난 지 보름 만에 돌아온 왕기를 노국공주가 격하게 반겼다. 한바탕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왕기가 물었다.
"역모가 발생했다고 들었소이다. 어떤 역모이오?"
그러자 노국공주가 한 무더기의 두터운 서류철을 건네며 대답했다.
"영천에 있는 대지주와 유명한 유학자 가문이 손을 잡고 폐하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사옵니다. 그래서 신첩이 명을 내려 병사들이 파견해 역모를 꾸민 자들을 모조리 잡아와 개경에 있는 어사대의 옥에 가두어 놓았지요. 그것이 불과 사흘 전입니다. 이것은 그것과 관련된 투서들이고요."
그러자 왕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많은 서류들이 역모와 관련된 투서라고? 역모를 꾸미며 이렇게 투서가 많이 날아들 정도로 허술하게 일을 꾸민단 말이오? 혹시 역모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은 아니오?"
"폐하.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개발자의 마음이지만 그걸 사용하는 자들은 때때로 개발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곤 하는 법입니다. 자동차에 달린 블랙박스가 단순히 자동차 사고 현장만을 찍는 것이 아니라 주차장과 각종 골목에 세워둔 차량의 블랙박스가 강도 같은 범죄 현장을 찍는 CCTV처럼 활용되듯이 말입니다. 폐하께서 공을 들여 고려 전역에 그물망처럼 깔아 놓은 유선 통신망은 폐하께서 기대하시는 황실의 명령을 전국에 빨리 전파하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그렇사옵니다. 최근 들어 고려의 백성들은 전하께서 깔아놓은 유선 통신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냈지요. 첫째는 멀리 있는 사람의 안부를 손쉽게 묻는 것입니다. 부산에 사는 아버지가 저 멀리 압록강 근처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아들의 안부를 묻기까지 반시진도 채 걸리지 않으니까요."
"그럼 통신망을 우체국처럼 사용하고 있단 말이오?"
"편지나 소포를 보내는 것은 아니니 우체국이라기보다는 전신국(電信局)에 더 가깝겠지요. 통신소에서 자신의 부모나 친척들에게 전보를 보내듯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폐하가 안 계시는 동안 각 통신소에서 백성들의 그러한 요구들이 빗발치듯 많아져서 신첩이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누구에게 빚을 빨리 갚아라 같은 통신들은 제외하고 친척이나 부모 자식 간에 안부를 묻는 통신들은 어지간하면 들어주라고요.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사용료로 쌀 반되 정도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에 따른 백성들의 반응이 아주 폭발적입니다. 덕분에 전국에 있는 통신소들은 그 지역 백성들의 명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지요. 물론 그에 따른 황제 폐하에 대한 찬양 또한 날로 높아져가고 있사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통신소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부수입도 높아지고 있어서 시골에서는 최고의 신랑감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노국공주의 자세한 설명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대꾸했다.
"통신소를 이용하는 사용료와 관련된 기록은 확실히 남기도록 하시오. 통신소를 이용한 부정부패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오."
"이미 그리하고 있사오니 염려 마시옵소서. 그리고 백성들의 입은 그 무엇보다 무서운 법이지요. 최근에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발견되면 백성들이 근처에 있는 통신소로 달려가 곧바로 찔러버리는 것이 전국적인 유행을 타고 있사옵니다. 이번의 상소와 같이 말이지요. 고려의 백성들은 통신소를 황제 폐하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 정도로 여기고 있사옵니다. 조선 시대의 신문고(申聞鼓)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상소가 많이 올라온 것이오? 날 독살하려는 음모가 새어나가자 백성들이 너도나도 통신소로 달려가 찌른 것이란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고려의 만백성들은 폐하를 자신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켜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그런 폐하를 노리고 있는 음모를 알아차리자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노국공주의 말에 왕기가 한 손으로 들기도 힘들 정도로 두꺼운 상소 묶음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이자들에게 대대적으로 상을 내려줘야 하겠군. 그러면 앞으로 고려 전역에서 감히 날 노릴 음모를 꾸밀 자가 없어질 것이오.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완전히 사라질 테지. 백성들의 눈과 귀가 무서워서 말이야."
말을 하던 왕기가 노국공주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자들이 순순히 시인을 하였소? 날 제거할 역모를 꾸몄다는 것을 말이오."
"아직 국문을 하지 않았사옵니다. 폐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이기 때문에 그자들을 옥에 가둔 후 폐하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자들이 역모를 꾸민 것만은 확실하옵니다."
노국공주가 값비싸 보이는 궤짝 하나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 증거물로 칠보단장산이 담겨 있는 궤짝을 발견했으니까요.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이 발견된 것이지요."
상소 묶음에 이어 궤짝까지 건네받은 왕기가 상소의 내용을 몇 장 읽어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소이다. 내일 아침 짐이 직접 국문을 하겠소."
서기 1346년 1월 21일
[어사대 앞의 넓은 광장]
광장 전면에 있는 계단 위에는 왕기가 옥좌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노국공주와 함께 문무백관이 시립해 있었으며, 아래쪽 광장에는 척무관과 함께 검을 차고 창을 든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 둥. 둥. 둥...
고수의 북소리와 함께 어사대의 옥에서 병사들에 의해 죄인들이 줄줄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밧줄로 꽁꽁 묶인 선관서승(膳官署丞) 이약(李約) 집안의 사람들과 직장동정(直長同正) 정유(鄭裕) 집안의 사람들 백여 명이 옥에서 끌려 나와 계단 위에 앉아있는 왕기를 발견하고서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친히 국문에 나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지난 사흘간 옥고를 치르며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물거품처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으로 광장에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황제가 국문을 하며 칠보단장산이라는 물증을 내밀자 영천의 대지주인 이약과 유학자인 정유가 순순히 자신들의 죄를 시인했다. 물증이 확실한 이런 상황에서 행여 부인을 했다가는 끔찍한 고문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역모를 꾸미다 들킨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때였다. 왕기가 밧줄에 묶여 있는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될법한 어린 소년을 지칭하며 엉뚱한 소리를 꺼내었다.
"네가 선관서승(膳官署丞) 이약(李約)의 외손자이고, 직장동정(直長同正) 정유(鄭裕)의 손자가 맞느냐? 정유의 아들인 성균복응재생(成均服膺齋生)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 맞느냐 말이다."
"네. 폐하. 소인이 정운관의 아들이 맞사옵니다."
"듣기로는 네가 이름난 유학자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이라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익혀보았다지?"
"네. 폐하. 소인이 동무들과 함께 직접 훈민정음을 익혀보았사옵니다."
"익혀보니 어떠하더냐?"
"훈민정음은 참으로 엄청난 문자이옵니다. 소인과 친구들은 훈민정음을 익히기로 한 그날로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익혀사옵니다. 그만큼 익히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발음하는 구강구조를 형상화하여 만든 문자이기에 글로 쓰기도 쉽사옵니다. 짧은 시간 내에 고려 백성들의 눈과 귀를 번쩍 뜨게 해줄 엄청난 문자라고 생각되옵니다."
"어린놈이 참으로 기특한지고. 좋다. 네놈이 짐이 묻는 질문에 대답만 잘하고, 짐이 내린 문제에 선택만 잘한다면 이번 역모를 짐이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 물론 목을 치지는 않겠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정씨 집안과 이씨 집안은 유배를 각오해야 할 것이야."
그 순간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꼭 감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뜨며 희망에 찬 눈빛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왕기 주변에 서있던 문무백관들도 동시에 웅성대기 시작했다. 노국공주 또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폐하. 역모를 꾸민 자들을 살려주시면 좋지 않은 선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꾸미기만 했지 직접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지 않았소? 짐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 그 증거라오. 그리고 짐은 역모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라지. 백성들의 뜻이 짐에게 있는 이상 그 어떤 역모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건 고려를 굽어살피는 부처와도 관련이 있소이다."
왕기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한 노국공주가 한발 물러났고, 어사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왕기에게 집중되었다. 그 순간 왕기가 어린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짐이 듣기로는 네가 나이는 어리지만 익힌 학문의 경지가 낮지 않고 특히 최근 유행하고 있는 성리학 경전의 해석에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래서 물어보겠노라. 부모에 대한 효(孝)란 무엇이냐?"
그러자 어린 소년이 숨도 쉬지 않고 성리학을 인용해 줄줄 대답하기 시작했다.
"송나라에서 발달한 성리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론(理氣論), 도덕론(道德論) 그리고 수양론(修養論)이지요. 효는 이 중에서도 도덕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본연의 성(性)과 리(理)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덕(德)을 완성하는 것이며, 그러한 덕에 효가 자연스럽게 포함된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효란......."
사람들이 어린 소년의 막힘없는 답변에 감탄 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왕기가 손을 들어 소년의 말을 자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 어린놈이 제법 머리가 좋다고 들었는데 짐이 잘못 알고 있었구나. 머릿속에 쓸데없는 지식만 많고 근본이 없어. 네놈은 효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자 사방에서 혹시나 살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차있던 사람들이 탄식에 찬 신음성을 동시에 내뱉었고, 밧줄에 묶여 있던 어린 소년은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죽게 생겼다는 절망감에 돌바닥에 이마를 찧어대며 울부짖듯 외쳤다.
- 쿵. 쿵. 쿵...
"폐하! 부디 소인에게 효의 기본이 무엇인지 알려주시옵소서."
"잘 들어라. 효의 기본은 아주 단순하다. 효라는 것은 본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하는 것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효를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제사상에 값진 음식을 올리고, 부모님의 산소를 잘 관리한다고 해서 효를 하는 것이 아니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네. 폐하. 소인이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좋다. 아직 어린 나이이니 잘 모를 수도 있을 테지. 그러니 마지막 기회를 주도록 하마. 이번 문제에서 살아남으면 네 친족과 외가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야."
말을 하며 왕기가 손을 높이 치켜올리자 미리 준비해둔 듯 척무관이 그릇 세 개가 담긴 쟁반을 들고 어린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소년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준 후 쟁반을 앞에 내려놓았다.
"잘 들어라. 이 세 개의 그릇 중에 한 개는 맹물이고 나머지 두 개에는 날 죽이려고 했던 칠보단장산이 섞여 있다. 칠보단장산은 무색무취이니 눈이나 코로는 판별할 수가 없을 것이야. 고려를 지켜주시는 부처께서 널 살려주실 생각이라면 네게 행운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를 골라서 마셔보도록 하거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오랜 시간 밧줄에 묶여 있어서 팔이 저린지 잠시 자신의 팔을 주무르던 어린 소년이 마음을 굳혔는지 세 개의 그릇 중에 가운데에 있는 그릇를 향해 팔을 뻗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모든 사람들이 들리도록 크게 혀를 찼다.
"쯧쯧..."
그러자 움찔한 어린 소년이 고개를 들어 잠시 왕기를 바라보더니 팔을 옮겨 맨 오른쪽에 있는 그릇을 잡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어린 소년이 그릇에 있는 물을 입에 털어 넣어 단숨에 삼켜버렸다.
잠시 후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있는 어린 소년에게 다가간 왕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약속대로 부처께서 이 어린 소년을 살려주셨으니 짐도 이 소년을 살려주겠노라. 하지만 짐이 말한 대로 정씨와 이씨 집안은 모두 유배를 가야 할 것이야. 그러니 상령은 유배지가 정해질 때까지 이 죄인들을 모두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거라."
"존명! 병사들은 죄인들을 다시 옥에 집어넣어라."
그 순간 어린 소년이 다급히 왕기에게 물었다.
"부처께서 절 살려주신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절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짐이 부처에게 한 약속이 있다. 이왕 약속을 들어주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네놈이 그걸 대신해 줘야 하겠어. 넌 유배를 간 다음 평생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해석하여 훈민정음으로 옮기는 작업을 할 것이니라. 경전을 해석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네게 딱 맞는 임무일 것이야. 그리고 네가 해줘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말을 하며 왕기가 얇은 책 한 권을 내밀자 어린 소년이 책을 받아든 후 빠르게 제목을 훑어본 다음 물었다.
"설탕 제조법? 페하.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네 친가와 외가는 아마도 머나먼 카리브해 쪽으로 유배를 갈 것이야. 전 세계에서 사탕수수가 가장 잘 자라는 곳이 그 지역이니까. 너희 친족과 외가 쪽 사람들은 그곳 일대에서 사탕수수를 길러 설탕을 만들어서 고려에 공급해줘야 하겠다. 하지만 사탕수수 줄기는 당분이 많아 벌레가 꼬이기에 베자마자 곧바로 가공을 해야만 해. 즉 농장 바로 옆에 설탕 공장이 세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설계한 사탕수수 공장을 돌리는 건 보통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몽룡(夢龍) 네가 짐을 대신해 그 일을 해줘야만 하겠다. 자세한 건 책을 읽어보면 잘 알게 될 것이야. 단 짐이 약속하마. 팔만대장경을 해석하여 훈민정음으로 옮기는 작업을 끝내면 짐이 널 다시 고려로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말이야. 상령!"
왕기가 말을 마치며 상령을 부르자 척무관이 날듯이 뛰어 다가왔다.
"이 소년도 옥에 같이 가두어 두도록 하거라. 그리고 낼 오전에 근위대원들 중에서 무공에 관심이 있는 자들을 모조리 연무장에 집결시켜라. 칠성검의 전수를 시작할 테니까 말이야."
"존명!"
척무관이 어린 소년을 데리고 물러가자 왕기의 곁으로 다가온 노국공주가 물었다.
"폐하. 한편의 잘 짜인 이 연극은 도대체 무엇이며 저 소년이 누구길래 부처까지 팔아가며 그렇게 살리려고 애를 쓰신 것입니까?"
"그대는 저놈이 누군지 모르겠소? 정몽룡(鄭夢龍)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아명이오. 부모가 꾸는 꿈에 따라 몽란(夢蘭)에서 몽룡 (夢龍) 그리고 몽주(夢周)로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뀌게 되지. 그냥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라오. 정몽주는 그대도 알다시피 죽을 때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 바친 신하였소. 내가 혀를 찬 것은 저놈이 황제인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느냐를 보기 위한 것이었소. 날 믿지 않았다면 칠보단장산을 마시고 벌써 죽었을 테지. 듣던 대로 충성심이 강한 것 같으니 죽을 때까지 잘 부려먹을 생각이오."
"아..."
감탄성을 내뱉은 노국공주가 다시 물었다.
"그럼 아까 말한 효와 관련된 질문은 무엇이옵니까?"
"시묘살이가 뭔지 알고 있소?"
"알다마다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식이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 아닙니까?"
"맞소이다. 유학에서 나온 말도 안 되는 관습이지. 나 또한 효를 중시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악습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오. 정몽주 저자가 고려인 중에 처음으로 시묘살이를 한 자라오. 그 뒤에 많은 사람들이 정몽주를 따라 시묘살이를 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미리 경고를 해준 것이라오. 효는 자고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하는 것이니 그딴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말이오."
왕기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노국공주의 어깨를 껴안고 걸어갈 때, 영국과 백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기존의 역사와 전혀 다른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