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 역사의 비틀림 그리고 천마 교주와의 혈투 - 1 >
- 쉬이잉.
최영 장군과의 면담을 끝내고 슈퍼맨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는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최영 장군은 내가 가진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과 원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하지. 아직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시절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다르다. 당장의 왜구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난 일본 정벌을 통해 일본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일들을 명분으로 일본인들을 모조리 다 죽일 수는 없어. 그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 그리고 신들조차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 나에게는 일본을 영원히 꺾어버릴 적합한 방법이 이미 세워져 있다. 하지만 대단히 복잡한 작전이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어. 그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최대한 준비를 잘 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일단 그들부터 빨리 데려와야만 해.'
왕기가 신라면과 앙리를 데려오기 위해 비행선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는 동안 전 세계 역사의 수레바퀴가 크나큰 비틀림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을 알리는 곳은 고려에 인접한 원나라였다.
서기 1346년 1월 4일
[원나라 항주성]
항주성. 송나라 시절 임안(臨安)이라 불리던 항주성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도, 몽골족의 원나라에게도 끝까지 저항하며 버티던 한족(漢族)의 제국인 남송(南宋)의 수도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어지간한 공성병기로는 흠집도 나지 않는 두터운 성벽으로 인해 공격하는 자들을 절망과 비탄에 빠지게 만들며 '벽의 도시'라고까지 불렸던 항주성 안에는 '제1차 황하 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홍건적의 잔당들이 모조리 모여 있었다.
작년 12월 23일 발발한 제1차 황하 대전 때 수뇌부들과 강력한 군사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바람에 세력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은 홍건적들은 그때부터 불과 열흘이라는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분노할 대로 분노한 원나라 황제와 막강한 원나라 기병들에 의해 몰이를 당하여 최후의 보루인 항주성에 모여 농성을 하고 있었고, 그런 항주성 밖에는 원나라 병사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다. 특이한 것은 전장이 아니라 마치 뱃놀이라도 나온 것처럼 활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아니라 거대한 부채를 손에 들고 있는 병사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항주성의 두터운 성벽이 자신들을 든든히 지켜줄 거라 믿고 있는 홍건적 간부들이 자동차 여러 대가 동시에 지나갈 정도로 넓은 폭의 성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몽골족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생기는 길로 여러 필의 말들이 동시에 끌고 있는 처음 보는 기이한 물건이 그 모습을 선보이고 있었다.
- 드르륵.
새파란 포신을 자랑하며 거대한 수레에 실려 수십 필의 말에 의해 전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대포였다. 아시아를 넘어 중동과 유럽까지 파죽지세로 쳐들어가 연전연승을 거두며 전 세계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몽골군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후대에 '말과 활을 빼고 몽골군이 사용하는 모든 병기는 모조리 자신들이 정복한 민족이나 다른 나라의 것들을 흡수한 것들이다'라는 군사학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몽골군의 유연하면서도 뛰어난 흡수 능력이 여실히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의 대포로 인한 쌍성총관부의 대패 소식이 들리자마자 원나라 황실에서 전력을 기울인 것은 다름 아닌 고려처럼 화약을 이용한 대포의 개발이었다. 인도, 남미와 더불어 세계 3대 초석 생산지인 중국답게 화약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금방 모방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쇠로 된 대포는 고려의 대포와 달리 몇 발 쏘지 않아 포신이 터져나가는 현상이 발생했고, 그러한 기술적인 한계를 원나라는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개발한 것이 청동으로 된 포신을 지닌 대포였다. 청동은 철과 달리 물러 대포 발사시 발생하는 압력과 고열로 인해 포신의 일부가 살짝 부풀어 오르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홍건적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항주까지 직접 친정을 나와 있던 원나라 황제 혜종이 우람한 청동 대포의 자태를 바라보며 옆에 있던 장수에게 물었다.
"여기만 정벌하면 모두 정리되는 것이겠지?"
"네. 페하. 홍건적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들인 한산동(韓山童)과 팔비신장(八譬神掌)은 이미 황하에 수장되었음이 확실합니다. 남은 것은 그자들의 잔당과 시간 내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황하 대전에 불참했던 안휘성(安徽省)에서 봉기한 곽자흥과 그자가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뿐입니다. 항주성 안쪽에 곽자홍이 있다는 확실한 정보가 이미 입수되었습니다. 성벽을 깨트리고 항주성만 밀어버리면 홍건적의 난은 모두 평정이 될 것입니다."
수하 장수의 말에 위풍당당한 청동 대포를 바라보던 혜종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성벽을 깨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지?"
"네. 폐하. 항주의 성벽이 제아무리 두터워도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화약을 이용하는 대포는 기존의 공성병기들과 그 위력을 달리하니까요. 포탄의 무게가 무려 400근이 넘어가며 날아가는 속도 또한 무시무시한 대포의 위력을 돌로 된 성벽이 절대 버틸 수가 없습니다. 단지 대포의 숫자가 불과 3문에 불과해 성벽을 부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것입니다. 청동 대포는 한번 포를 발사한 후 열기를 식히기 전까지는 재사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물을 부어서 식힐 수도 없습니다. 포신이 휘어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기를 최대한 빨리 식히기 위해 거대한 부채를 든 2천의 병사들을 미리 배치해 놓았습니다."
수하 장수의 말에 혜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숫자가 부족하다는 말은 하지도 말게. 저만한 무게의 청동을 제련해서 대포로 만드는데 재물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고나 있나? 사용되는 화약의 가격은 또 어떻고? 원나라 황실이 제아무리 부자라도 지금 이상의 숫자는 무리야. 고려처럼 쇠로 된 대포를 만들 수 있다면 몰라도..."
"그렇다면 고려에게서 기술을 이전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휘이익.
단호한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저은 혜종이 입을 열었다.
"고려의 공민왕과... 아니지. 얼마 전 고려가 스스로 제국임을 선포했다고 하니 고려 제국의 황제이니 공민 황제이지. 짐이 그자와 비록 친분이 좀 있다고는 하지만 절대로 비밀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야. 나라도 그리했을 테니까. 설사 비밀을 알려준다고 해도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할 것이야. 고려 제국에게 벌써 토번과 징더전을 빼앗겼네. 여기서 더 땅을 빼앗겼다간 원이 고려에게 잡아먹힐지도 몰라. 지금도 행여나 고려가 쇠로 된 대포를 앞세워서 쳐들어올까 걱정이라고. 그나마 원나라의 인구수가 월등히 많아 버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명심하게나. 그자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손해를 보는 성격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황제가 말을 하는 동안 어느새 거치가 끝난 3문의 거대한 청동 대포가 두터운 항주성 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술탄인 메메트 2세(Mehmet Ⅱ)가 1453년 테오도시우스라는 난공불락인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위해 사용했던 거대한 청동 대포인 터키의 자랑이자 자긍심인 '우르반(Urban) 대포'를 보는 듯했다. 본래의 역사보다 100여 년 앞선 등장이었다.
- 콰과광
불 뿜는 도마뱀이라는 별칭처럼 거대한 청동 대포의 화구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고, 단 한번의 일제 포격에 항주성의 두터운 성벽에서 대규모로 부서진 성벽의 돌들이 바닥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는 청동 대포로 인해 성벽 위에서 곽자홍을 옆에서 수행하고 있던 이제 막 약관도 되지 않은 청년이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성벽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당장이야 버티겠지만 포격이 계속되면 결국은 어딘가가 무너지고 말 것이야. 그럼 몽골군 기병들이 즉각적으로 돌입하겠지. 아마도 이 자리가 내 무덤이 되겠구나."
안휘성에서 봉기한 홍건적의 수장인 곽자홍이 자신의 옆에 있는 청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주중팔(朱重八). 넌 어떡하든 살아남아라. 내가 너의 재능을 아껴 나의 양녀와 결혼을 시킬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살아남은 후의 일이다. 이곳에서 살아남게 되면 내 딸을 잘 부탁한다."
서기 1346년 1월 5일
이틀간 계속되던 청동 대포의 집중 포격에 항주성의 두터운 성벽 한쪽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천하무적이라는 몽골군의 기병들이 물밀듯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서 날렵하게 말을 달리던 장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곽자홍과 그 일당들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어차피 독안에 든 쥐들이야. 항주성을 샅샅이 뒤져서 다 죽여버려."
그날 곽자홍과 곽자홍이 아끼던 18세의 젊은 청년인 주중팔은 몽골군 기병의 화살에 맞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만약 살아남았다면 훗날 명(明)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朱元璋)이 될 뻔도 했던 주중팔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홍건적 토벌에 성공한 혜종은 마교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섬서성을 향해 출발했다. 그 모든 것은 어찌 보면 왕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서기 1346년 1월 6일
지난 이틀간 비행선을 움직이며 참파에서 유럽으로 가는 뱃길을 따라가고 있던 왕기가 바다 쪽을 내려다보며 열심히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분명 하늘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표시를 하라고 말했어.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는 해안을 최대한 가까이 따라가면서 운항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몇 시간을 더 날아가던 왕기의 눈에 큼지막한 돛에 각각 고려어로 '고'자 '려'자가 똑똑히 적혀져 있는 배가 눈에 들어왔다.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참파를 떠난 배가 이제 겨우 인도 해안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신라면이 탄 배를 발견한 왕기가 계류선을 손에 쥐고 아래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배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왕기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마치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갑판에 나와있던 신라면이 하늘에서 낙하하고 있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착.
깃털처럼 사뿐하게 낙하한 왕기를 보며 신라면이 허리를 정중하게 숙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별고 없었다. 넌 배를 오래타서 그런지 제법 얼굴이 많이 탔구나. 근데... 혹시 말이야.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네. 전하. 어젯밤 꿈에 부처께서 오래간만에 현몽하셨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오실 거라고 알려주시더군요."
- 와락.
순식간에 얼굴을 찌푸린 왕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양반은 뭔데 자꾸 나와 엮이는 거야?"
그러자 신라면이 입을 열었다.
"부처께서 전하를 뵙게 되면 꼭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
"소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대와 엮이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목적이 있거나 그대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단지 고려는 오랫동안 숭불 정책을 취했던 나라이고, 특히 고려가 제작한 팔만대장경에 서려 있는 백성들의 염원이 천상에 있는 나에게까지 와닿았기에 조금의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뿐이다.'라고 말입니다."
"팔만대장경? 고려의 보물인 팔만대장경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그게 다인가?"
"아닙니다.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금의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제작되어 있어서 마치 화중지병(畵中之餠 : 그림 속의 떡)과 같아 고려 백성들이 제대로 읽지를 못한다. 그러니 그대가 창안한 고려어로 번역하여 출판해 많은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주면 감사하겠다.'라고 말입니다."
신라면의 말에 왕기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 정도는 그다지 어려운 부탁이 아니지. 다음에 꿈속에서 또 부처가 현몽하면 내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해주겠다고 전해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신라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처께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하면 그에 대한 대가로 조언을 하나 해주겠다고 말입니다."
"조언? 어떤 조언?"
"그냥 이렇게만 말하면 아실 거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의 정기를 수도 없이 빨아먹은 천마 교주의 힘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그대의 무공으로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야. 그러니 최대한 빨리 그대의 대적자인 천마 교주를 처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천마 교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칠성검이 제격이니 칠성검을 익힌 수하들과 함께 천마 교주를 습격하도록 하거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조언이니 더 이상은 그대와 엮이는 일은 없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라면의 말에 시원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은 왕기가 중얼거렸다.
"난데없는 칠성검이라... 아무튼 이제 더 이상 나랑 엮일 일은 없다 이거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왕기가 신라면의 손을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라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부처의 충고처럼 빨리 고려로 돌아가도록 하자. 최대한 빨리 앙리를 데리고서 말이야."
그리고 마치 쏘아논 화살처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서기 1346년 1월 20일
[개경의 국방과학연구소]
북방 민족과 담판을 짓기로 약속한 날짜가 열흘 정도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밤이 깊어 사방이 고요한 캄캄한 연구소 하늘에서 내려온 비행선이 안에 실려있는 짐들을 울컥울컥 토해내기 시작했다.
- 음메에.
젖소 무리가 단체로 울음소리를 내며 비행선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왕기의 눈빛은 마치 명절 때 맘에 드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제는 더 이상 재료가 없어서 연구를 못할 일은 없어졌어.'
젖소들의 울음소리에 바깥 사정을 눈치챘는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온 최무선이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왕기에게 다가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도착하시는 즉시 곧바로 황실로 들어오셨으면 한다는 황후 마마의 전갈이 사흘전에 도착해 있사옵니다."
"그래? 황실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소신도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단지 역모(逆謀)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밖에는..."
"역모라. 알겠다. 최무선은 비행선에서 내린 짐들을 잘 보관해 그 누구도 만지지 못하도록 하거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유럽에서 고려로 돌아오자마자 급히 황실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