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95화 (95/171)
  • #95. < 공민육헌(恭愍六憲)의 반포와 본격적인 기술 개발 - 3 >

    [경북 영천]

    - 쪼르륵.

    이약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술잔과 밤늦게 찾아온 정유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물었다.

    "사돈어른께서도 책자를 보셨겠지요?"

    "네. 지금 황실에서 전국적으로 배포하고 있는 훈민정음햬례본이라는 해괴망측한 책자라면 당연히 보았습니다. 물론 첫 장에 적혀 있는 공민육헌만 읽어보고 집어던졌지만요."

    "황실에서 그런 해괴한 책자를 대량으로 찍어서 전국에 반포하며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런 쪽의 분석이라면 소작농이나 부리면서 집에서 돈이나 세고 있는 저보다는 학문을 깊이 배우신 사돈어른께서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물어보시니 대답은 하겠습니다만 영천에서 알아주는 대지주이신 사돈께서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을... 제 생각에는 황실에서 독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재를 노린다고요?"

    "그렇습니다. 고려라는 나라는 커다란 솥과 같아서 여태껏 3개의 다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을 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대국인 원나라를 따르는 자들, 즉 흔히 부원배들이라고 불리는 권문세족들이었지요. 두 번째가 오랜 세월 대국의 학문인 유학을 익히고 있는 선비들과 최근에 받아들인 성리학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신진 사대부들을 포함하는 지식인 무리들, 마지막 세 번째가 사돈어른과 같이 열심히 돈을 벌어 조정에 거액의 세금을 납부하여 황실의 재원을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는 대지주들 이렇게 나뉠 것입니다. 권문세족은 황제가 등극함에 따라 그날로 모두 숙청이 되고 말았지요. 남은 두 개의 세력만 정리되면 고려의 모든 것들은 황실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작업이 바로 공민육헌과 훈민정음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문자의 반포일 것입니다."

    "으음..."

    이약이 신음성을 흘리며 술잔을 벌컥 들이키자 정유가 말을 이었다.

    "공민육헌에 나와있는 대로 세금을 납부하게 되면 대지주의 세력들은 급격히 쪼그라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유의 말에 이약이 분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되겠지요. 소작농에게 거둔 수익의 8할을 세금으로 납부하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세상 천지에 이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거기에 땅까지 황실에 바치게 되면 거의 거지나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합법적인 땅은 그냥 놔두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니겠습니까? 황실이 원하면 언제든지 땅을 가져가겠다는 뜻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렇지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황실에서는 대지주들의 땅을 뺏어갈 것입니다. 당장은 전국적인 반발이 두려워서 어렵더라도 시간을 두고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조금씩 진행을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황실에서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반포한 것은 선비들과 사대부들의 세력을 견제하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조만간 치러질 과거를 통해 훈민정음을 익힌 새로운 신진 지식인 세력들이 등장을 하겠지요. 황실에서는 그들을 중용해 기존의 유학자와 사대부들 세력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오랜 세월 고려를 떠받들고 있던 세 개의 기둥이 모두 사라지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결국 남은 건 황실, 즉 욕심 많은 황제의 독재뿐입니다."

    "역시 학식이 깊은 사돈어른이십니다. 탁월한 분석력에 명쾌한 결론이에요. 그럼 거기에 대항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서 황제가 원하는 대로 당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장은 뾰쪽한 방법이 없어요. 황제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는 막강합니다. 특히 대포라는 신무기를 사용한다는 황제의 포병대는 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무적이라는 소문이 고려 전역에 자자하지요. 지방의 세력들이 제아무리 힘을 합쳐 총궐기를 하더라도 군사력으로는 황제를 절대 당할 수가 없어요. 황실에서도 그걸 믿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추진한 것이지요."

    이약이 비관적인 정유의 발언에 마음이 답답한지 또다시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반박했다.

    - 쪼르륵.

    "사돈어른.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황제만 제거되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게는 고려의 암시장에서 은밀히 떠돌아다니던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천금을 주고 산 '칠보단장산(七步斷腸散)'이라는 것이지요. 부원배였던 권겸이 황제를 독살하기 위해 어렵게 구한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그걸 황제에게 먹일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것입니다. 황제만 죽고 나면 본인이 대구와 영천 그리고 경주에 있는 대지주들을 동원해 새로운 자를 황제로 앉힐 자신이 있습니다. 왕씨 성을 가진 황족이 아직 여럿 더 남아있으니까요. 사돈어른께서는 경북 일대의 선비와 사대부들을 동원해 주세요. 수틀리면 새로운 성씨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씨나 정씨가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대담한 이약의 발언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정유가 마음을 굳혔는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운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은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가 필요하겠군요. 자고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산에서 내려오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지요. 칠보단장산이라는 것을 황제에게 먹이려면 황제가 개경을 벗어난 틈을 노려야만 할 것입니다. 황궁에서는 단계별로 미리 기미를 하는 자들이 여럿 있기에 황제에게 먹이기가 힘들 테니까요. 제가 들은 정보로는 이번 달 말에 황제가 고토로 가서 북방민족들과 담판을 짓는 자리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때가 적기일 것 같습니다. 당연히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도 사용해야 하겠지요. 일이 잘못 될 경우를 대비해서 우리를 대신해 죄를 덮어쓸 자가 필요할 테니까요. 거란이나 여진족에게도 뛰어난 무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적당한 돈을 주고 그런 자들을 조종해서 일을 벌이며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순간 얼굴이 환해진 이약이 무릎을 탁 치며 대꾸했다.

    "역시 배움이 깊고 머리가 영민하신 사돈어른과 의논을 하니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는군요. 사돈어른의 말씀처럼 황제가 북방으로 갈 때를 노려 독살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의 이약이 어느새 빈 정유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물었다.

    - 쪼르륵.

    "제 딸이 낳은 외손자는 잘 지내고 있겠지요?"

    "네. 사돈어른. 아직 나이라 어려 그런지 호기심이 아주 많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 대한 동경심까지 가지고 있어요. 훈민정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보겠다며 친구들과 함께 익혀보겠다고 제게 말하더군요. 제가 잠깐 만류하기는 했으나 억지로 익히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보나 마나 대국의 문자인 한자에 비하면 형편없이 뒤떨어지는 문자일 테니까요. 그 나이 때에는 몸소 겪어봐야 아는 것들도 있는 법이지요."

    그렇게 두 사람의 음모가 깊어지고 있을 때 왕기는 쾌속일포선의 설계도를 가지고 최영 장군을 면담하고 있었다.

    [변산반도의 조선소]

    여러 개의 선거(船渠 : 독(Dock))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조선소에서는 밤을 잊은 사람들이 망치를 뚝딱거리며 수십 척의 배들을 동시에 건조하고 있었고, 선거 옆쪽에 위치한 갯벌에서는 낮에는 배를 건조하는 작업을 도와주다가 밤이 되자 군사 훈련을 받고 있던 장정들이 간부가 흔드는 깃발에 따라 갯벌에서 좌우로 부지런히 이동을 하고 있었고, 훈련이 비교적 일찍 끝난 부대들은 단체로 군가를 부르며 자신들의 거처로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얼싸좋다 김일병 신나는 어깨춤. 우리는 한 가족 십도 사나이~

    조선소와 갯벌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왕기를 바라보며 한동안 설계도면을 검토하고 있던 최영 장군이 입을 열었다.

    "소신은 폐하의 심중을 잘 모르겠사옵니다."

    "내 심중을 잘 모르겠다니? 최영 장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일본 정벌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소."

    "그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고려는 오래전부터 육군 위주의 병력을 중시해왔습니다.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을 막아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수군이 약해 바다를 통해 건너오는 왜구의 기습에 힘없이 털린 경향이 없잖아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폐하께서 여태껏 키워온 병력과 배의 숫자라면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정도는 이제 일도 아니지요. 거기에 강력한 수군을 양성하겠다는 폐하의 의지를 받들어 과거에 전라도 진도를 근거지로 삼아 몽고에 저항하던 삼별초들의 후예마저 해군에 입대를 한 상태입니다. 고려군은 지금 역대 최강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말로 육지에 대포 몇 문만 설치해 놓아도 왜구들이 감히 고려 땅에 상륙을 할 엄두를 못 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힘들게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원정을 갈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북방의 고토까지 회복한 상태이지요. 토번이라는 머나먼 땅도 수중에 넣었고요. 고려 땅의 몇 배에 달하는 그쪽 땅을 잘 다스리는 것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본 역시도 고려 땅의 몇 배에 해당하지요. 잘못하다가는 고려가 심각한 소화불량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이 품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어 왕기에게 조심스럽게 내밀며 말했다.

    "지금의 일본 땅은 절대 정벌이 쉽지 않은 땅입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본에 보낸 첩자가 보내온 보고서입니다. 통신으로 보내기엔 그림들이 너무 많아 일단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 살펴보시지요."

    - 촤르륵.

    최영 장군이 건네준 보고서를 빠르게 살펴보던 왕기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시카가 요시아키라란 자가 '이자나미'의 능력을 부여받아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의 군대를 창설해 남북조로 나뉘어 있던 천하를 이미 통일했다고? 게다가 천황 일족을 모조리 죽여 자신이 직접 천황의 지위에까지 올랐어?"

    "네. 페하. 소신도 워낙 믿기지 않아 몇 번을 확인해 봤는데 확실한 정보라고 하옵니다. 천황 겸 쇼군의 지위에 동시에 오른 요시아카라란 자가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불사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하옵니다. 그 숫자가 일만 정도만 되어도 일본은 정벌이 불가능한 땅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숫자가 천을 넘지는 않는다고 되어 있군, 그자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야."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병사들이라니. 그건 현대의 과학으로도 불가능해. 이건 인간의 능력이 아니야. 신의 능력이지. 이자는 분명히 나의 대적자일 것이야.'

    왕기가 속으로 뇌까릴 때 최영 장군이 말을 이었다.

    "폐하. 천이라는 숫자도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니 옵니다. 그자들은 물에 빠져도 익사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본 정벌은 함부로 진행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일본의 신들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자나미란 신이 어떤 신이지? 조사해 놓은 것이 있나?"

    "네. 이자나미란 신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여 세상을 창조하는 여신(女神)이자 모신(母神)입니다. 일본의 황조신인 이자나기의 쌍둥이 남매이자 바다뿐이었던 일본에 아와지 섬(淡路島),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등의 섬을 만들어 지금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자나미는 불의 신인 가쿠즈치(軻遇突智)를 낳다가 음부가 불에 데어 죽게 되어서 명부로 내려가 명부의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화가 난  이자나기가 '한갓 이 아이 때문에 배우자를 잃었다'라며 가쿠즈치를 칼로 베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가쿠즈치의 피와 사체에서 8개의 화산의 신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일본에 화산에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음부가 불에 데어 죽었다고? 불에 약한 약점이 있을 수도 있겠군."

    왕기가 저 멀리 보이는 갯벌에서 깃발의 신호에 따라 병진을 짜며 열심히 움직이는 군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파벳이 필요하겠어. 저들 중에서 빨간 바지를 집중적으로 양성해야 하겠군,"

    고개를 돌린 왕기가 최영 장군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훈련에서 깃발 신호만 사용하는 것이오? 소리 신호도 있고, 전통도 있을 것인데 말이오."

    "바다에서는 고함을 크게 질러도 파도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가 않습니다. 전통도 시험해본 결과 바다에서는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선박과 선박의 거리가 멀어지면 전선이 그 길이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바닷물이 튀거나 하면 전통 장치가 고장 나는 경우도 자주 있고요. 그래서 깃발 신호를 주로 연습하고 있는 중입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대꾸했다.

    "내가 전함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해 주겠소. 그러니 일단은 지금 이대로 연습하시오. 그리고 일본 정벌은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니 차질 없이 준비해 주시길 바라오. 일전에 말한 것처럼 조만간 제주도로 출항해야 할 것이오. 가는 동안 선박의 조종 훈련을 하면서 말이오. 그런 후 대마도를 정복하면서 실전을 거친 정예 해군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오. 일본 정벌은 그다음이라오."

    말을 끝마친 왕기가 유럽으로 떠난 앙리와 신라면을 데려오기 위해서 하늘로 훨훨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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