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92화 (92/171)
  • #92. < 제국(帝國)의 선포 그리고 새로운 대적자 - 4 >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왕기를 집요하게 따라붙은 노국공주가 물었다.

    "폐하. 고토에 사는 거란과 여진을 고려에 복속시키고, 곧바로 일본 정벌까지 하시려면 믿을 수 있는 인재가 최대한 많아야만 합니다. 타지에 나가 있는 앙리와 신라면을 빨리 고려로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 우뚝.

    그 순간 재게 놀리던 왕기의 발걸음이 얼음 땡이 걸린 사람처럼 제자리에 멈춰졌고, 순식간에 안색이 일그러진 왕기가 노국공주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퉁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신라면이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모양이구려. 잘 생긴 그놈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기라도 하는 것이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왕기의 말에 노국공주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폐하!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십니까? 설마... 소첩이 신라면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때였다. 왕기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척무관이 이 자리에 있어봐야 좋은 꼴 못 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채고서는 두 사람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폐하. 소신은 먼저 황실 통신소로 가있겠사옵니다. 그리고 명경지수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척무관의 말에 비교적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왕기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후우... 나도 모르게 내 속마음이 나와 버리고 말았구려. 역사 속에서 신라면이 자신의 여종인 반야를 바치고 반야가 낳은 아들이자 훗날 우왕이 되는 아기가 신라면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바람에... 나 역시 평범한 남자에 불과한 모양이오. 워낙 잘 생긴 신라면으로 인해 행여 그대에게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이외다."

    - 스르륵.

    그 순간 노국공주가 양손을 들어 왕기의 양쪽 빰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께서 본래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계시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사옵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았던 유나는 연인인 폐하를 놔두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둘만큼 지조가 없지 않사옵니다. 소첩이 폐하께서 군 복무 중에도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어떤 여인인지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대의 말처럼 최대한 빨리 앙리와 신라면을 데리고 오겠소이다. 그러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일단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부터 빨리 처리해야 하겠소이다."

    "그리하시지요. 폐하."

    [황실 통신소]

    연경전을 벗어나 태조왕건의 신어(神御 : 임금의 화상)가 보관되어 있는 수창궁 옆쪽에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24시간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새로 지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건물 안에는 고려를 포함한 동아시아 주변 일대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큼지막한 지도가 벽에 붙어 있었고, 그 지도에는 백여 개에 달하는 붉은 점들이 찍혀져 있었으며 각각 넘버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십여 명의 통신 대원들이 관리하고 있는 백여 개의 아크 램프가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 왈칵.

    통신소 문을 열고 들어간 왕기가 병사들의 군례를 받으며 마치 비행기 관제탑과도 같은 통신소를 가볍게 둘러본 후 명을 내렸다.

    "동북면병마사를 당장 호출하거라."

    "네. 폐하."

    왕기의 말에 미리 도착해 있던 척무관이 통신 대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시다. 지금 즉시 동북면병마사 쪽의 통신소를 연결해 병마사를 대령시키거라."

    그러자 벽력가의 무인 하나가 통신을 보내기 위한 장치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뇌전공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 옆에 있던 고려인 병사 하나가 벽력가의 무인에게 수신호로 고려 신호를 연신 보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통신보안. 지금 즉시 44번 통신소는 호출에 대답하라. 여기는 황실 통신소다."

    잠시 후 통신이 서로 연결되고 동북면병마사인 이자춘이 연결되자 왕기가 명령을 내렸다.

    "동북면병마사인 이자춘은 내년 1월 말까지 무슨 수를 사용해서라도 거란족과 여진족의 모든 부족장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거라. 그날 고토에 머물고 있는 자들과 짐이 직접 담판을 지을 것이야. 이건 대고려제국 황제의 명령이니 만일 그날 참석하지 않는 부족장은 고려를 적대시하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간주해 짐이 직접 토벌할 거라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려주고."

    곧바로 답변이 왔는지 통신실에 있는 장치가 스파크를 튀기며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 파바박.

    그 순간 스파크를 지켜보고 있던 왕기의 뇌리로 언뜻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스파크! 내가 그걸 까먹고 있었군. 현대에서 사용하는 전파 통신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야.'

    그때 통신 대원이 상대방이 보내온 고려 부호를 해석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페하. 지금 고토에는 거란족 25개 부족과 숙여진(熟女眞 : 길림성 서남지방에 살던 여진족. 이들은 주로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귀화하여 복종하던 여진족들이다) 15개 부족 그리고 생여진(生女眞 : 길림성 동북지방에 살던 여진족. 거란의 지배를 벗어나 살던 여진족) 25개 부족이 있사옵니다. 소신이 그들 부족장들을 1월 말까지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모이는 위치는 어디가 좋겠사옵니까?"

    "길림성 장춘시로 하거라. 그날 참석하는 부족에게는 짐의 선물이 있을 것이고, 불참석하는 부족에게는 짐의 칼날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공지하도록."

    이윽고 통신이 모두 끝나자 척무관이 다가와 말했다.

    "폐하. 포악하기로 유명한 거란족의 위세가 예전보다 많이 약화되긴 한 모양입니다. 숙여진과 생여진을 합치면 거란족보다 그 숫자가 월등히 많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몽골족처럼 그들 모두 타고난 전사들이고, 하나같이 말을 귀신처럼 다루는 기병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거란과 여진 장정들의 수를 다 합치면 고려의 모든 병사들을 합친 것보다 그 수가 더 많을 테니까요. 폐하께서 부족장들을 만날 때 준비를 철저히 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머릿속을 감도는 생각에 왕기가 척무관의 말에 건성으로 답했다.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포병대 앞에서 숫자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야. 짐은 당분간 국방과학연구소에 머물 것이다. 개발할 것들이 많고 그대의 말처럼 거란과 여진족 부장들을 만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테니까. 황실에 급한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통신을 보내도록 하고... 그대가 따로 준비해 줘야 할 것이 있다."

    "말씀만 하시지요. 폐하."

    잠시 후 지시를 내린 왕기가 국방과학연구소로 떠나자 척무관이 통신 대원들을 독려했다.

    "지금 즉시 개경 인근의 모든 통신소에 전통을 날린다. 황제 폐하께서 대대적인 '수레 징발령'을 내렸다고 말이야. 그리고....."

    서기 1346년 1월 2일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열흘 가까이 왕기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처박혀 두문불출하고 있었지만 고려 황실은 공민왕의 이름으로 제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위고는 예상보다 사흘이나 늦어져 파리에 도착해 있었다. 오는 도중 무리를 지어 자신을 따라오는 프랑스 백성들 때문에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의 루브르 왕궁]

    - 긁적긁적.

    우여곡절 끝에 근위대가 엄중하게 호위하고 있는 왕궁에서 왕을 알연한 위고가 사타구니를 연신 긁고 있는 필립 6세에게 말했다.

    "전하. 프로방스의 추기경인 저에게 열흘 전 신의 음성이 들려왔고, 신의 능력 일부를 받게 되었사옵니다."

    그러자 필립 6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모든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생겼다지? 소문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네. 근데 짐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사자 우리에 목을 들이미는 것과 같을 텐데 말이야. 짐이 그대를 살려서 돌려보내 줄 것 같은가? 그대가 존재하면 교황의 위상이 이전처럼 다시 올라가게 될 것이야. 어떻게 떨어뜨린 교황권인데 말이야."

    "전하께서 소인을 죽이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똑같은 처사이실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언제 병이 들지 모르는 것이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건 왕이라고 해서 피해 갈 수가 없는 법이지요. 그리고 소인에게는 신의 소명(召命)이 주어졌습니다."

    "소명? 어떤 소명?"

    "조만간 동양에서 올 자를 막으라는 소명이지요."

    "동양에서? 칭키즈칸이 무덤에서 부활해 유럽으로 다시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보게. 위고 추기경. 짐에게 골치 아픈 일들이 한둘이 아니라네. 지금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오르한 1세'와 ‘임페리움 로마노룸(Imperium Romanorum : 흔히 비잔틴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이라고 불리는 곳. 이하 비잔틴 제국으로 호칭함)'의 '요한네스 6세'가 은밀히 교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그들이 동맹을 맺게 되면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단숨에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어 발칸반도로 진출할 것이야. 그 말인즉슨 지중해 일대가 곧 피 튀기는 전쟁터로 변할 거라는 뜻이지. 그뿐만이 아니야. 저 저주받을 영국 놈들이 프랑스를 노리고 있다고. 힘은 쥐뿔도 없는 것들이 프랑스 왕족과 친족이란 명분을 내세워서 말이지. 에드워드 3세가 호시탐탐 프랑스의 노른자위 땅을 노리고 있어. 그러니 짐에게 더 골칫거리를 안겨주지 말게나.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재림이라며 그대가 계속 세력을 모으다가는 짐이 그대의 목을 쳐야만 할 테니까 말이야. 또다시 교황이 유럽 전역을 통치하며 프랑스 왕이 교황의 허락을 받아야만 대관식을 할 수 있는 그런 꼴은 못 본다네."

    "전하. 소인에게는 그런 욕심 따위는 없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비잔틴 제국은 이단의 무리이며 처단해야 할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배울 것은 있지요."

    말을 하며 위고가 점점 필립 6세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는 눈부신 성광(聖光)이 번쩍이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에 왕을 지키는 근위대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고, 필립 6세 또한 별말 없이 뚫어지게 위고의 손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왕의 지근거리에 도착한 위고가 성광이 번쩍이는 손을 필립 6세의 사타구니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축원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질병은 지금 이 순간 사라질 것이다."

    - 화아악.

    한층 더 밝은 빛이 터져 나온 후 위고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 세월 전하를 괴롭히던 성병(性病)이 모두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위고의 말에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필립 6세가 이전보다 훨씬 진중해진 얼굴로 물었다.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대가 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동양에서 올 자를 막는 것입니다. 신께서는 그자를 막을 신무기를 제조하는 방법을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한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전하의 힘이 필요합니다."

    "어떤 힘이 필요하다는 건가?"

    필립 6세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알아챈 위고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200여 년에 걸친 'Crusades(십자군 원정 또는 전쟁)'를 하며 생긴 유명한 말이 하나 있지요. 전하께서도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God also need money.

    위고가 자신에게 돈을 뜯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챈 필립 6세가 물었다.

    "짐의 돈으로 어떤 무기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이단인 비잔틴 제국에게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천년을 내려오는 그들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 현재의 이스탄불)은 단 한 번도 외세의 무력으로 점령당한 적이 없사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walls) 때문이지 않는가? 삼중으로 쳐져 있는 그 성벽은 감히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지. 거기에 바다에 쇠사슬을 쳐 함선들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는 황금만의 뿔(Golden Horn)도 있고 말이야."

    "총명하신 전하께서 그들에게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붙으면 물로도 끌 수 없고, 바닷물 속에서도 활활 타오른다는 전설의 불 말입니다. 신의 천사가 콘스탄티노플에 내려와 그 비법을 알려줬다는 신화(神火)이지요."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말하는 모양이군. 이봐. 솔직히 말하자고. 그건 천사가 내려와서 알려준 것이 아니야. 시리아의 한 연금술사가 개발한 것이지."

    "연유야 어떠하든 그 불의 제조법은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고 아무도 그 제조법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신께서 소인에게 그 비법을 알려주셨지요."

    "그래서? 그 불로 무얼 만들겠다는 건가?"

    "그리스의 불과 석궁의 방아쇠 장치 그리고 화약을 이용한 새로운 신무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왕기가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그렇게 개발을 망설이던 총기가 본래의 역사보다 백여 년 가까이 빠르게 세상에 등장하려 하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제국을 선포한 고려의 정국은 때아닌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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