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86화 (86/171)
  • #86. < 대고려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다 - 2 >

    내시가 들고 들어온 원나라 황제의 서신을 압록 제1통신소에서 전통문으로 바꾸어 보내왔다는 길게 늘어져 있는 두루마리를 보며 왕기가 놀라 물었다.

    "이게 다 전통문이라고?"

    "그렇사옵니다. 전하. 서찰에 적혀있는 글의 내용이 워낙 많다 보니..."

    '원나라 황제가 고려의 왕에게 보낸 서찰이 아니라 누가 보면 연인에게 보낸 연서(戀書)인 줄 착각하겠구나.'

    속으로 뇌까리며 두루마리를 받아들어 노국공주와 함께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한 왕기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두루마리는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연서와도 같았고, 그 내용은 마치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해달라고 타국의 왕자에게 보내는 애절한 구조 요청과도 같았다.

    - 원나라 황실의 부마이며 원나라의 심왕이기도 한 고려의 30대 왕인 공민왕에게 짐이 급히 도움을 요청하는 바이오. 그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어쩔 수 없이 그대를 고려로 떠나보낸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짐에게는 그 시절이 마치 몇 년 전과 같이 길게 느껴지는구려.

    첫 문장을 읽던 왕기가 화가 났는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자기와 나랑 얼마나 친분이 있다고. 잠깐 스쳐가듯 얼굴 세 번 본 게 다고 같이 밥 한번 먹은 적이 없고, 술 한잔 기울인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러자 노국공주가 대꾸했다.

    "그만큼 원나라의 사정이 절박하다는 뜻이겠지요. 아니면 뛰어나신 전하를 흠모하여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자신이 황제다 보니 속으로만 품고 있던 마음을 서신을 통해 털어놓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중얼거렸다.

    "하나는 확실히 알겠군. 원나라에서 보냈다는 사신 놈은 이 서찰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야. 이걸 들고 고려의 조정으로 들어와 황제의 서찰이라며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읽기가 부끄러웠을 테지. 시간을 아낀답시고 전통으로 보낸 측면에는 그런 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야. 매번 올 때마다 자신이 마치 원나라 황제인 양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온갖 행패를 다 부리던 다른 사신들과 비교하면 운이 없다고 투덜거렸을 것이 분명해."

    말을 하던 왕기가 내시를 보며 물었다.

    "이 서찰을 보냈다는 사신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압록 제1통신소 인근에 여장을 풀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전하의 답변을 반드시 받아서 원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요."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서찰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 지금 원나라는 서쪽에서 침입한 마교의 세력과 강남에서 봉기한 홍건적들로 인해 누란의 위기에 빠져 있소이다. 이들 두 세력 모두 오랜 시간 이번의 난을 준비한 것이 분명하며, 서로가 내통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오. 그러한 이유로 강남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막강한 원나라 기병들이 힘을 못 쓰고 있소이다. 전통적으로 수전에 약한 원나라 기병들이 베를 이용하지 않고 육로를 통해 이동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적들이 산길 곳곳마다 '거마창(拒馬槍 : 기마병을 막기 위해 창을 비스듬히 세우고 횡목(橫木)에 꿰어 만든 울타리)'을 세워놓았고, 거마창을 쉽게 치우지 못하도록 바닥에는 철질려(鐵蒺藜 : 마름쇠)를 잔뜩 뿌려놓았으며, 말이 지나가다 밧줄을 건드리면 곳곳에서 행마(行馬 : 날카로운 화살을 거꾸로 박아 수레 위에 설치해놓는 것)가 튀어나오는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소이다. 이는 무지하며 재력이 없는 백성들이 단시간에 준비가 불가능한 일. 누군가가 강남의 한족들을 시켜 오랜 시간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오.

    '보아하니 원나라 기마병들이 한족이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에 호되게 당한 모양이로군.'

    속으로 뇌까린 왕기가 서찰을 마저 읽어나갔다.

    - 어쩔 수없이 원나라 병사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려고 하자 징발된 배들의 선주가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어 배를 침몰시켜버리는 일이 숱하게 있었소이다. 이는 한족들의 조직적인 반란이며, 머리가 좋은 누군가가 이번 난을 책동하면서 모든 경우를 대비해 사전에 지시를 내려놓았다는 명확한 증거이외다. 병사들의 어려움은 그뿐만이 아니오. 운 좋게 살아남아 이동한 기마대가 넓은 평원에서 홍건적과 대규모로 맞붙게 되었을 때 짐의 명을 거역하고 항주에 잔류해 있던 역적인 팔비신장이 그의 제자들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기마대의 돌격을 막아내고 화경에 달한 뛰어난 무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원나라의 기마대가 홍건적들에게 대패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소이다. 이는 사전에 잘 짜인 계획임에 분명하외다. 홍건적의 난이 일어난 날짜와 마교가 중원으로 침공한 날짜가 똑같다는 것이 그 증거이며 또한 중원의 무인들이 서쪽으로 침입한 마교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섬서와 사천으로 모조리 이동하는 바람에 팔비신장의 무력을 당해낼 자가 중원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이용한 계략인 것이오. 원나라를 건국할 때 중원 무림인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구려.

    황제가 보낸 서신은 구구절절 간절했으며 어찌 보면 애잔하기까지 했다. 뒤를 이어 마교 교주의 무공과 그 특징 그리고 이동 경로 등을 상세히 적어놓은 서찰들을 읽은 왕기가 속으로 빠르게 정리를 하며 뇌까렸다.

    '곤륜파를 단신으로 쳐들어간 마교 교주의 몸이 전투 도중 안개로 화해 칼로도 강기로도 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기이한 무공은 마교 역사상 당대의 교주가 처음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곤륜파가 멸문의 위기에 봉착하자 곤륜산에 은거하고 있던 여러 도사(道師)와 선인(仙人)들이 뛰쳐나와 마공과 상극인 무공들을 시전하여 마교 교주를 합공(合攻) 하자 안개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드는 효과를 보아서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었지만 안개로 이루어진 촉수가 주변에 죽어 널브러져 있는 시체의 심장에 꼽히며 다시 그 크기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결국 모든 도사와 선인들이 전멸을 하고 말았다. 이는 교주가 인간의 정기를 자유자재로 빨아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마교 교주가 전설에나 등장하는 '흡정마공(吸精魔功)'을 대성하였거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이상의 존재라. 그렇다면 딩대의 마교 교주라는 자가 아마도 나의 대적자일 가능성이 높겠군.'

    왕기의 시선이 어느덧 서찰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었다.

    - 짐은 마교의 침공 따위는 두렵지 않소. 다 합쳐도 숫자가 일만에 불과한 그들은 홍건적의 난만 평정되면 원나라 군사들로 충분히 물리칠 자신이 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한족이 일으킨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드오. 그래서 나의 오랜 친우(親友)인 공민왕에게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 바이오.

    "친우라니? 이 양반이 끝까지 나랑 친한 척을 하려고 드네."

    노국공주가 다시 화를 내려는 공민왕을 진정시켰다.

    "누군가를 남몰래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그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황제가 전하에게 나름 잘 대우해 줬잖아요? 영약도 내려주고 바얀의 재물과 팽가의 재물을 꿀꺽해도 눈을 감아줘서 황제 스스로는 전하가 고려의 왕이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자신이 도와줬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황제가 한 일이라고는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가진다는 몽골적 전통에 따른 것뿐이요. 바얀 승상을 항주까지 직접 날아가서 잡은 것도 나이고, 목숨을 건 결투를 통해 도왕을 죽인 것도 바로 나란 말이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냈다는 것을 소첩이 어찌 감히 모르겠사옵니까? 소첩의 말은 원나라 황제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노국공주의 말에 분기를 다스린 왕기가 마지막 문장을 마저 읽었다.

    - 짐은 고려가 오랜 역사를 지닌 황제국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황제만이 사용 가능한 짐(朕)이라는 칭호를 오래전부터 고려에서는 사용했었고, 제후국이 사용할 수 없는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과 같은 삼성(三省)과 예부(禮部), 호부(戶部) 등과 같은 육부(六部)의 관료 체제를 고려는 채택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소이다.

    '뭐 그렇긴 하지. 조선시대에서는 사대주의에 취해 중국과 같은 대국이 아니기 때문에 육부라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육조(六曹)라고 한 단계 낮추어 칭하였으니까. 나의 등장으로 그런 비굴한 역사는 없어지겠지만 말이야.'

    - 짐이 듣기로는 며칠 전 공민왕께서 고려의 고토인 쌍성총관부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무력행사를 하였다고 들었소. 어찌 그리하셨는지 모르겠소이다. 그대의 오랜 친우인 짐에게 좋게 말로 부탁을 하면 저절로 해결될 일을 말이외다. 하지만 그 덕분에 고려의 포병대란 것이 얼마나 막강한 부대인지를 절실히 알게 되었으니 실로 전화위복이라고 할만할 것이오. 이에 부탁드리는 바이오. 그 포병대를 이용해 조만간 황하를 넘어올 홍건적들을 막아주시길 말이오. 이는 황제 대 황제로서의 부탁이며 그대의 오랜 친우로서의 부탁이기도 하외다.

    "끝까지 구질구질하군. 하지만 아주 잘 된 내용의 서찰이기도 하구려."

    "어째서 그렇사옵니까?"

    "나를 친우라 칭하는 것은 원나라 황제가 사정이 다급하다 보니 정에 호소하기 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통신병이 한자를 한글로 풀어쓰면서 오역(誤譯)을 했을 가능성도 있소이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겠지만 고려를 같은 황제국으로 대우해 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신호라오. 아마도 처음 보는 포병대의 위력에 놀라 그런 것이겠지만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인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외교관계를 펼칠 수 있다는 뜻이며, 이전보다 우리 쪽의 말에 무게가 많이 실린다는 뜻이니까. 그만큼 많이 뜯어먹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전하. 원에게서 무얼 얻어내실 생각이시옵니까?"

    "첫째는 당연히 고토의 회복이지. 요동강의 동쪽, 흑룡강의 남쪽, 우수리 강의 서쪽을 경계로 하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만주 일대를 다시 되돌려 받아야만 할 것이오. 이는 고려가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오. 만주는 허허벌판이 아니라오. 방금 짐이 말한 것처럼 여러 강이 흐르고 있는 비옥한 토지이기 때문에 고려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는 뜻이외다.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부여가 그 땅에서 건국되지도 못했을 테지. 한반도의 세 배가 넘는 그 넓은 땅에 감자와 옥수수를 심는다고 생각해 보시구려. 추운 기후 때문에 만주 전역에 쌀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고 하여도 그 양이 엄청날 것이오. 그와 함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 고려인으로 받아들이면 고려의 백성 수가 단기간에 급증하는 효과 또한 볼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리고요?"

    "홍건적을 막아주는 대가로 일전에 말한 징더전을 받아내야지. 보아하니 원나라가 아주 똥줄이 타고 있는 모양이니 이번 기회에  하나를 더 얻어야 하겠소."

    "무엇을 말이옵니까?"

    "지금은 원나라에 흡수되어 있지만 그 옛날 토번(吐蕃)이라고 불리는 땅을 얻어낼 생각이라오."

    "토번이라 함은... 티베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 옵니까?"

    "맞소이다. 짐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이 여럿 있소이다. 그중 하나가 기후에 따른 농작물 재배라오. 심왕부에 심어져 있는 사탕수수는 지금쯤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오. 사탕수수의 북방 한계선이 하와이이니 한반도 보다 더 북쪽에 있는 심왕부에서 잘 자랄 리가 없지. 그런 작물들이 여럿 있소이다. 토번의 땅을 취하게 되면 그 한계를 극복하기가 쉬워질 것이오."

    "하지만 토번의 기후도 그리 적합하지 못할 텐데요?"

    "토번에서 키우겠다는 뜻이 아니라오. 토번에서 남쪽에 있는 히말라야산맥을 곧바로 넘어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아시오?"

    "인도가 나오지요."

    "정답이오. 토번은 인도 점령을 위한 고려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오. 인도에서 자라는 후추와 각종 향료들은 조만간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이 취급될 작물들이니까 놓칠 수 없는 작물들이오. 인도를 점령하게 되면 그 아래쪽에 있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도 손쉽게 먹을 수 있을 것이오. 조만간 고려가 지배하는 땅에서 사탕수수와 고무나무, 커피나무와 같은 열대 식물들의 본격적인 재배가 가능해진다는 뜻이지."

    "하지만 원나라에서 그러한 요구들을 들어주겠습니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지. 요구들을 안 들어줘도 상관없소이다. 조만간 무력으로 중국을 꺾고 진출하면 그만이니까. 내게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오. 그리고 원나라에게는 만주든 토번이든 전부 이민족이 사는 변방에 불과할 뿐이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찔러는 봐야지."

    왕기가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원나라 황제의 서신에 대한 답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오랜 친우이자 원나라 황제인 혜종에게 고려의 공민왕이 답장을 보내오. 고려의 왕에 등극한 짐도 그대를 본지 오래인 듯하니 그대가 그립기가 한이 없구려...

    - 탁.

    붓을 내려놓은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이왕이면 원나라 황제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이 좋겠지.'

    왕기가 완성한 서찰을 내시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을 왕실 통신소에 보내어 압록강에 있는 사신에게 전달하라고 명하거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훗날 목은 이색이 적은 '대고려제국사'에 따르면 이날 원나라 황제와 공민왕 간에 주고받은 서찰로 인해 맺어진 양국 간의 협약을 개벽 원년에 이루어진 '개벽협정서'라고 부르며 이때를 고려가 대제국으로 본격적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원나라가 상당히 불리한 조건으로 맺은 협정이긴 하지만 그만큼 개마고원에서 보여준 포병대가 위력이 무시무시했고, 포병대의 폭격에 직접 당한 당사자가 원나라이기 때문에 포병대의 위력을 그 누구보다 절감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서찰의 내용을 근거로 둘 사이에 야릇한 감정이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작자도 있었지만 그건 대고려제국사보다 더 뒤에 발굴된 공민왕이 직접 쓴 자서전인 '대고려제국건국사'에 의해서 허위 주장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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