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84화 (84/171)
  • #84. < 쌍성총관부를 박살내고 고토를 회복하다 - 5 >

    [개마고원의 빠오]

    병사 하나가 가죽으로 된 빠오 입구의 장막을 헤치고 들어와 긴장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전하. 적들이 개마고원 쪽으로 올라오고 있사옵니다."

    "알겠다. 다들 나가보도록 하지."

    - 스르륵.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다 본 후 암막을 헤치고 나간 듯 왕기는 눈이 부시다는 것을 느꼈다. 아침햇살이 천지사방에 무릎까지 쌓인 눈에 반사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밤사이 추운 날씨로 인해 눈이 꽁꽁 얼었는지 바닥이 빙판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화경의 고수답게 미끄러운 바닥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태연하게 걸어나간 왕기의 눈에 저 멀리서 일단의 기마대가 다양한 깃발을 들고서 산등성이를 줄이어 달려오며 평원 같은 고원 위로 올라와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새하얀 설원 위에 새까맣게 보이는 기마대 행렬의 끝이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숫자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왕기의 중얼거림을 들은 무지가 대꾸했다.

    "3만은 확실히 넘고 4만은 조금 안되어 보입니다. 소인이 보기에는 몽골군 정규군에 쌍성총관부가 다스리는 지역에 살고 있는 여진족 전사들이 합세를 한 것 같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고려군이 90년 가까이 잘 살고 있는 터전에서 자신들을 쫓아내려는 적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 순간 왕기의 얼굴에 초여름 햇살처럼 환한 미소가 걸렸다.

    "잘 되었군, 아주 잘 된 일이야."

    여진족까지 합세해 상대해야 할 병력의 숫자가 2배 가까이로 늘어났는데 오히려 웃고 있는 왕기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한 무지가 물었다.

    "전하. 잘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간단해. 우리가 포병이기 때문이지. 개경을 출발할 때 그대가 자신 있게 말하지 않았나? 상대가 10만이라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이야. 솔직히 말해 10만은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4만 정도는 일도 아니지. 원거리에서 화력으로 승부하는 포병대 앞에서 병력의 숫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짐은 여진족을 고려에 흡수할 생각이라네. 오늘 나온 여진족 병사들의 무장 상태를 보아하니 함경도 쪽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의 정예 병사들일 뿐만 아니라 태생적으로 고려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일 걸세. 그런 자들을 미리 몰살시켜 놓으면 남은 여진족들을 흡수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니 당연히 잘 된 일인 것이야."

    말을 하던 왕기가 적들의 기마대 본진에서 몇 명이 말을 몰아 깃발을 든 병사들과 함께 중앙으로 달려오기 시작하자 힘차게 외쳤다.

    "적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미리 말을 맞춘 듯 왕기가 말을 몰고 달려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척무관과 무장이 몇 명의 병사들과 함께 같이 뛰쳐나갔다.

    [개마고원 정중앙]

    양쪽의 대표들이 3 마신(馬身)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마주 섰다. 그러자 일반적인 두정갑(頭釘甲 : 두루마기 형태의 옷 안에 쇠나 가죽으로 만든 갑옷 미늘을 쇠못으로 박아 만든 갑옷) 대신 비단을 여러 겹 겹쳐서 제작한 특이한 갑옷을 입고 있는 늙은 장수 하나가 입을 열었다.

    "고려의 왕이시며 심왕부의 심왕이시며 고려검황이라고 불리시는 전하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소장은 쌍썽총관부에서 만호(萬戶)의 지위를 맡고 있는 야율목리라고 하옵니다. 전하께서 오랜 세월 원에 계셔서 원나라 군사들의 전투 방식을 잘 아실 거라 믿사옵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면 목숨을 살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전투가 발생하게 되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나를 칭할 때 고려의 왕이 가장 먼저 나왔다는 것은 고려의 왕이라는 지위를 가장 낮게 본다는 뜻이다. 쯧... 이래서야 고려의 왕인 나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두고 보자고.'

    속으로 빠르게 뇌까린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사전에 통보한 후 항복하면 살려주고 반항하면 다 죽여버리는 몽골족의 전투 방식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고려군은 그렇게 잔혹하지 않아. 그러니 싸우다가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을 하면 포로로 잡고 살려주도록 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나. 그리고... 부탁을 하나 하지."

    "어떤 부탁이옵니까?"

    "비겁하게 싸우다가 도망쳐서 쌍성총관부의 성벽을 끼고 싸우는 짓은 하지 말아 주게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하면 서로가 피곤해지니까. 짐은 최대한 빨리 이번 전투를 이기고 개경으로 돌아가 편히 쉴 생각이니까 말이야."

    두 사람이 몽골어로 대화를 나누는 그때 능숙한 고려어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전하. 그럼 항복을 하면 저희들도 살려주시는 것이옵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소인은 당대의 쌍성총관부 총관직을 맡고 있는 조양기(趙良琪)라고 하옵고 제 옆에 있는 자는 천호의 지위에 올라있는 탁도경(卓都卿)이라고 하옵니다."

    "오호라... 그대들이 몽골군이 침입하자마자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함경도를 통째로 원나라에 갖다 바친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의 후손이로군. 짐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배신한 자들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다네.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 아닌가? 이번 생은 그 정도로 만족하게나."

    "알겠사옵니다. 전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소인들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요. 근데... 삽을 든 병사 따위로 용맹한 몽골족과 여진족의 기마대를 이기실 수 있겠사옵니까? 소인은 오히려 전하가 걱정됩니다. 왕이 되신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 제대로 부귀영화도 누려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시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옵니까?"

    왕기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하지 말게. 그대 같은 매국노의 자손에게 죽을 정도라면 애초에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어. 누구의 목이 땅에 떨어지는지 두고 보세나."

    잠시 몇 마디의 말을 더 나눈 협상단이 말을 몰아 자신들의 진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척무관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전하. 조심하셔야 됩니다. 상대방 장수는 값비싼 비단을 수십 겹 대어서 지은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저런 갑옷은 서역으로 원정을 갈 때 장수들이 주로 입었던 갑옷이며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도 끄떡없는 갑옷입니다. 부드러운 비단이 겹겹이 화살촉을 휘감으며 뚫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지요. 이는 저자가 서역 원정에 참가했던 백호 이상의 장수였다는 뜻입니다. 그 말인즉슨 야율목리라는 장수가 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많고 그만큼 노련하다는 뜻이겠지요. 또 하나는 평상시와 달리 요 며칠 갑자기 날이 추워지고 눈까지 내리면서 땅이 꽁꽁 얼어 있어 박격포 방렬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대꾸했다.

    "걱정 말게. 내가 질 좋은 강철로 삽부터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 내가 만든 삽은 어지간한 명검보다 더 뛰어나다네. 이 정도로 얼어붙은 땅쯤은 가뿐하게 파고 들어갈 걸세."

    말을 달려 본진으로 돌아간 왕기가 황금빛 바탕에 화려한 색깔로 봉황이 수놓아져 있는 고려군의 깃발 아래에 꽁꽁 묶여 있는 이자춘과 이성계를 잠시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본래의 작전대로 갈 것인가?"

    그러자 무지가 즉답했다.

    "네. 전하. 현재 적들의 본진은 800장 정도 떨어져 있사옵니다. 박격포의 최대 사거리에 딱 걸려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쪽을 향해 발포했다가는 곧바로 도망을 칠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마대를 섬멸하기 위해 그들이 오도 가도 못하도록 500장까지 끌어들인 다음 일제히 발포를 할 예정입니다. 이동 속도가 빠른 기마대를 잡기 위해 450장 쪽에 지상 폭발형인 '나'탄을 먼저 발포할 것입니다. 땅을 패이게 해 기마대의 전진을 방해하는 한편 천성적으로 겁이 많은 말들을 놀라게 할 목적이지요. 그렇게 해서 기마대의 이동 속도가 떨어지면 곧바로 인마살상용인 '가'탄을 기마대 머리 위로 발포해 적들을 한꺼번에 주살할 계획입니다."

    "몽골군이 지닌 활의 사거리가 얼마나 되지?"

    "100장을 기본으로 잡고 길어야 120장입니다."

    "그럼 적들을 100장 정도 더 안쪽으로 끌어당기게. 조금이라도 전황이 불리해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놈들이 있어서 말이야."

    "존명!"

    씩씩하게 대답을 한 무지가 뒤로 돌아 4인 1조로 모여있는 포병대에 명령을 하달했다.

    "전 포대 박격포 방렬!"

    그러자 복명복창을 하며 모든 병사들이 말에서 뛰어 내려 옆구리에 있는 야전삽을 꺼내어 땅부터 파기 시작했다.

    - 팍. 파팍...

    날카롭게 벼려진 삽날이 마치 두부를 뚫고 들어가듯 얼은 눈을 파내고 딱딱한 땅을 손쉽게 깨고 들어가자 지켜보고 있던 척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하의 말씀처럼 대단한 삽이로군요. 이 세상 어디에도 저런 뛰어난 삽은 없을 것입니다."

    "짐이 일전에 말했잖은가? 군인 특히 포병은 삽질로 시작해서 삽질로 끝난다고. 군사들이 들고 있는 삽을 다 합치면 박격포 100문쯤은 너끈히 더 만들 수 있었을 것이야. 짐이 삽의 품질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 줄 아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순식간에 땅을 파헤친 병사들 중에서 포판을 담당하는 병사들이 가죽 주머니에서 둥그런 포판을 꺼내어 땅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러자 육분의를 든 관측병들이 포판의 수평을 자세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수평 작업이 끝난 조들은 포신과 포다리를 들고와 빠른 속도로 박격포를 조립해 나갔다. 순식간에 250문에 달하는 박격포의 방렬이 끝나자 왕기가 지휘부를 치하했다.

    "다들 고생했어. 병사들의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군."

    그러자 무지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장의 공이 큽니다. 무장이 병사들을 하도 엄하게 훈련을 시켜서 병사들 사이에서 염라대왕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였으니까요."

    "무장이 겉으로 보기에 좀 무서워 보이는 면이 있지. 타고난 체격에 욱하는 성질도 좀 있고 말이야. 아무튼 다들 고생했어. 고려군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

    그 순간 적들의 본진에서 화살 하나가 금방이라도 다시 눈이 퍼부을 듯 회색빛으로 물든 칙칙한 개마고원의 하늘을 날아가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삐이이이익...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嚆矢)였다.

    -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4만에 달하는 기마대의 일제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 무지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적들을 400장까지 끌어들인다. 초탄은 가탄이며 거리는 350장을 목표로 한다. 관측병들은 지금 즉시 지시를 내리도록."

    병사들이 복명복창을 하는 가운데 각 조에 있는 관측병들이 목이 터져라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 포신의 각도는 35도. 옆쪽의 조보다 1장 떨어진 곳이 목표이니 좌측으로 1도 더 틀어. 빨리 포다리를 돌려!

    생각보다 재빠르고 지시하는 각도가 동일한 관측병들의 명령에 왕기가 감탄을 하며 무지에게 물었다.

    "관측병들의 계산력이 짐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데?"

    그러자 무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 저건 관측병들이 실시간으로 계산을 해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제작하신 박격포들의 성능이 일정해서 사전에 연습사격을 통한 사격 제원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달달 외우게 만든 것이지요. 실제 관측병들의 계산력은 형편없습니다. 전하께서 알려주신 계산법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는 저를 포함해 한 손에 꼽습니다. 다들 머리가 아프다며 관측병을 하지 않으려고 들더군요.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입니다."

    '어느 시대나 수포자는 있기 마련이지.'

    왕기가 그 심정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육분의를 빼든 무지가 직접 관측을 하기 시작하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거리 600... 550... 500... 전군 포격 준비!"

    무지의 명에 포탄을 든 사수들이 일제히 박격포 포신에 포탄을 투입할 준비를 하며 동시에 외쳤다.

    - 포 하나 준비 끝!

    "전군 발포!"

    무지의 명령에 사수들이 포탄을 아래로 집어넣음과 동시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외쳤다.

    - 포 둘 발사!

    - 펑. 펑. 펑...

    거의 동시에 매끄럽게 미끄러져 내려간 250발의 포탄이 공이에 맞고 일제히 포신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가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 신년을 맞아 폭죽을 쏘는 소리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포탄들이 땅에 떨어지는 동시에 폭발하며 내는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 콰과과과광...

    거대한 불꽃과 폭음이 일자진(一字陳)을 이루며 달려오던 기마대 앞쪽에서 정확히 터졌고, 그 위력에 얼어붙었던 땅이 움푹 파이면서 얼음과 눈이 섞인 흙들이 전장 가운데에서 하늘 높이 튀어 올라 천지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운 나쁘게 가장 빠른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질주하던 기마대들이 폭발에 휘말려 말과 함께 하늘로 훨훨 날아가며 온몸이 폭죽처럼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로 옆에서 벼락이 떨어진 듯한 굉음과 비산하는 불꽃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후끈한 열기로 인해 공포심에 사로잡힌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 히이잉. 히잉...

    인마일체(人馬一體)를 자랑하는 몽골의 기마병들조차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말들이 흥분해서 날뛰고 있을 때였다.

    - 쉬이잉...

    죽음의 사자가 부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고려군의 박격포에서 발사된 250발의 '나'탄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기마대 머리 바로 위에서 폭발하며 전장을 휩쓸어버렸다.

    단 두 번의 폭격에 기마대의 절반이 죽거나 자빠져 나가자 전의를 상실한 듯 적들의 본진에서 뿔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 뿌우우웅,,,

    후퇴의 뿔 고동 소리에 기마대가 말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할 때였다. 무지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적들을 살려두지 마라. 450장부터 거리를 50장씩 잘라서 연속 발사에 들어간다. 전군 발포!"

    - 펑. 펑. 펑...

    후퇴하는 기마대를 끈질기게 추격하는 박격포탄이 적들의 머리 위에서 연속적으로 터지며 몰살을 강요하고 있을 때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매국노 놈들이 살아서 도망을 치고 있군."

    잠시 후 일각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기마대 4만을 대파한 고려군들이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전장을 뛰어다니며 살아남은 자들은 밧줄로 꽁꽁 묶어 포로로 삼고 있을 때 왕기가 무지에게 명을 내렸다.

    "최대한 빨리 정리한 후 쌍성총관부로 이동한다. 살아서 제 발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만 포로로 삼고 부상자들은 그냥 남겨둬. 나중에 정리해도 되니까. 적들이 성벽을 무기 삼아 농성에 들어갈 작정이야."

    "존명!"

    [화주에 위치한 쌍성총관부]

    높이가 10장이 넘어가는 단단한 성벽이 눈앞에 보였고, 그런 성벽 위에서 살아남은 조양기(趙良琪)와 탁도경(卓都卿)의 지휘를 받으며 병사들이 활을 들고 서있었다. 활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300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진을 친 고려군 본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뇌까렸다.

    '남의 땅에서 떡하니 살림을 차린 놈들답게 성벽을 높게도 쌓아놨군. 이러니 이자춘이 성벽을 열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을 인정받은 것이겠지. 하지만 난 다르다.'

    왕기가 무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박격포의 장점이 무엇이라고 했냐?"

    "무게가 가볍고 구조가 단순해 보병들이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대포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각(高角)으로 발사할 시 얕은 산을 넘어갈 정도로 높이 올라가기 때문에 산 너머에 있는 적도 거뜬히 타격할 수가 있사옵니다."

    "좋아. 제대로 이해하고 있군. 지금 성벽 위에 있는 놈들을 한방에 다 몰살시킨다. 만약 실패하게 되면 적들이 성안으로 기어들어갈 것이야. 그렇게 되면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어쩔 수 없이 백병전을 벌여야만 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전하. 한방에 명중시키겠습니다."

    "자신 있느냐?"

    "전하. 소인에게는 무려 250문에 달하는 박격포가 있사옵니다. 비록 계산이 조금 틀리더라도 각 포의 각도를 조금씩 달리하면 명중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믿고 맡겨주시옵소서."

    "그대를 믿는다. 이 한방으로 승리를 거두고 우리는 개경으로 돌아갈 것이야."

    잠시 후 250문의 박격포에서 일제히 날아간 포탄이 성벽 위 일대를 정확하게 덮쳤다.

    - 콰과과과광...

    성벽 위에 있던 조양기(趙良琪)와 탁도경(卓都卿)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활을 든 병사들이 단 한 번의 폭격에 모조리 몰살을 당하자 운 좋게 살아남은 누군가가 성벽 위에서 백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단단하게 잠겨있던 쌍성총관부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지금 즉시 왕실 통신대에 전통을 날려라. 짐이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적들을 대파하고 쌍성총관부를 회복했다고 말이야. 그리고 쌍성총관부의 관리를 위해 이자춘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한다고 타전하거라."

    "네. 전하!"

    무지가 물러가자 왕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상령(常領)은 어디에 있느냐?"

    "전하. 소장 여기에 있사옵니다."

    "상령은 지금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모든 것을 정리하거라. 고려인들을 해방시키고 계속 고려에 살고 싶다는 여진족들의 숫자를 파악해라. 그런 후 쌍성총관부에 모아둔 각종 재물들을 챙겨 개경으로 돌아간다. 그전에... 승리의 환호성부터 울리거라."

    그러자 척무관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하의 어명이시다! 다들 승리의 함성을 내질러라."

    - 우와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고려군의 함성과 함께 척무관이 병사들을 이끌고 열린 성문 안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민왕인 왕기가 꿈꾸던 고토 회복의 시발점이 되는 순간이었고, 전 세계적으로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게 될 대고려제국군 포병대의 전설이 시작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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