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83화 (83/171)
  • #83. < 쌍성총관부를 박살내고 고토를 회복하다 - 4 >

    서기 1345년 12월 9일

    [연경전의 침실]

    이틀이 빠르게 흘렀고 개경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가운데 왕기가 노국공주와 함께 자신의 침실에서 왕실 통신소로 날라온 전문들을 읽어보고 있었다.

    - 통신보안. 대고려 압록 제1통신소에서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조정에서 보낸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막 통과했습니다. 이상 통신 끝.

    - 통신보안. 대고려 철령 제28통신소에서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조정에서 보낸 사신이 철령을 막 통과해 화주에 있는 쌍성총관부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이상 통신 끝.

    옆에서 전문을 같이 보던 노국공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으로 보낸 사신도 곧 대도에 도착할 테고, 쌍성총관부에 보낸 선전포고 서찰도 곧 도착할 테니 정말로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되겠군요. 근데... 미리 대비를 할 수 있도록 사전에 다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기습의 묘가 사라져 행여 고려 군의 피해가 클까 걱정됩니다."

    노국공주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 송양지인(宋襄之仁 : 제 분수도 모르면서 남을 동정하는 어리석은 어짊을 일컬음)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오. 일종의 광고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지."

    "광고를 하고 계신다고요?"

    "그렇소. 원나라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계시잖소?"

    "네, 춘향각에서 지속적으로 보내오고 있는 정보를 저도 꼬박꼬박 다 읽고 있으니까요. 마교가 청해와 감숙을 피로 물들였다고 하더군요.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은 마교도들이 대도를 목표로 계속 진군하고 있고요. 강남에서는 원나라의 기마대가 여러 차례의 접전 끝에 결국 홍건적에게 밀려 달아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소이다. 원나라 군사력의 핵심인 기마대의 호전성(好戰性)이 예전만 못하오. 그럴 만도 하지. 제국을 완성하고 평화를 누린지 오래되다 보니까 배가 부른 것이지. 하지만 적들은 밀리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덤벼들고 있소이다. 게다가 강남은 수전에 능한 병사들이 필요한 곳이오. 수전은 원나라 군대의 주특기가 아니라오. 그래서 남송이 제법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물론 항주의 높고 두터운 성벽도 한몫했지만. 조만간 홍건적들이 황하 이남까지 진출할 것이오. 홍건적들이 황하를 도강하게 되면 원은 곧바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원나라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 있소."

    "그게 어떤 것입니까?"

    "하나는 홍건적이 황하를 넘기 전에 그대의 아버지가 있는 카라코룸의 몽골족들을 모조리 화북지역 쪽으로 불러내리는 것이오. 황하 인근에서 제국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는 것이지. 하지만 이건 실패했을 경우 뒤가 없는 술책이라오. 카라코룸의 전사들까지 동원하고서도 지게 되면 그 순간 곧바로 원나라가 멸망할 테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역사에 나오는 북원(北元)마저도 등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마지막 전력까지 다 날려먹은 셈이 되니까."

    "그렇군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옵니까?"

    "나머지 하나는 원군을 요청하는 것이지. 가령 나에게 말이오."

    "원나라가 다급해지면 전하에게 원군을 요청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엄밀히 말하면 고려에게 요청을 하는 것이지. 원나라 황제인 혜종(惠宗)은 나의 능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바얀 승상을 잡을 때 보여줬으니까. 하지만 나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망설이게 될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거느린 군대가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줄 생각이라오. 미리 통보를 다 해주고 싸워도 원나라 기마대 2만을 단박에 박살 내는 고려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말이외다. 이번 쌍성총관부와의 일전은 일종의 무력시위에 가깝고, 원나라 황실에 대놓고 광고를 하는 셈이지. 고려의 군대가 이렇게 막강하니 어서 빨리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말이외다."

    "전하께서는 원나라를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입니까?"

    "그렇소. 중국의 내전이 이런 식으로 빨리 정리가 되면 곤란하오. 최대한 길게 끌려면 지금은 원나라를 도와줘야만 하오. 그와 동시에 도와주는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려면 통일된 왕조가 세워져 있는 것이 더 좋소이다. 그래야만 국가 대 국가의 정식 계약이 성립될 테니까."

    "도움을 주시고 무엇을 얻어내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옛 고구려 땅을 다 돌려받으면서 중국과의 국경을 다시 설정할 계획이오. 원나라에게 만주는 그다지 중요한 땅이 아니라오, 그들에게 만주는 여진족이라는 오랑캐가 살고 있는 변방에 불과할 뿐이지. 하지만 고려에게는 아주 중요한 땅이라오. 대륙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 만주이니까. 요서와 요동을 나누는 요하강 그리고 북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흑룡강, 만주와 연해주를 가르는 우수리강을 고려의 새로운 국경으로 할 생각이라오. 그 세 강을 고려의 국경으로 삼아 만주 일대를 전부 손아귀에 쥘 생각이오. 무력으로 뺏는 것보다 이 방법이 백배는 더 낫소. 게다가 현 고려의 인구는 제국으로 발전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숫자라오.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정체성이 고려와 비슷한 북방 민족을 모두 흡수하는 길뿐이지. 한족이나 왜구를 고려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도 원치 않으니까. 만주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흡수해 그들을 영원한 고려인으로 만들 생각이라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 없이 흡수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서로가 피를 흘리면 복수심이 생길 테니까.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하나를 더 요구할 생각이오."

    "그건 또 무엇이옵니까?"

    "징더전(景德鎭)을 고려에게 내놓으라고 해야지."

    "징더전이 어디 있는 땅이옵니까?"

    "중국의 강소성(江西省) 파양호(鄱陽湖) 동부에 위치한 땅이라오."

    "원나라 중심부에 있는 땅을 고려에 넘겨주려고 하겠사옵니까?"

    "재주껏 얻어내야지. 홍콩처럼 몇 백 년간 조차(租借)를 하던지 말이오. 고려가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땅이니까.

    "그 땅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전하에게 깊은 뜻이 있겠지요. 남은 건 정말로 쌍성총관부에 있는 기마대 2만을 박살 내는 것뿐이로군요. 군사들을 이끌고 직접 출전하실 것이옵니까?"

    "내가 왕으로 등극한 후 처음 치르는 전쟁인데 당연히 친정(親征)을 해야 하지 않겠소?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박살 내고 곧바로 돌아올 테니까."

    "소첩은 전하만 믿겠사옵니다. 혹시 모르니 가시기 전에 소첩에게 씨를 듬뿍 뿌려주고 가시지요."

    "알겠소이다. 이리 가까이 오시구려."

    서기 1345년 12월 10일

    [만월대 앞 광장]

    밤새 내린 함박눈이 발목까지 쌓인 가운데 천명의 포병과 200명의 통신병이 별다른 보급병도 없이 부원배총 옆에서 간단한 출병식을 하고 있었다.

    - 둥. 둥. 둥...

    화려한 궁중 악사들의 연주도 없이 단 한 명의 고수가 두들기는 북소리에 맞춰 공민왕의 앞을 차례대로 지나가며 출병식을 끝낸 병사들이 만월대를 출발하였다. 그러자 원나라에게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기 위해 공민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친정을 한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는지 말을 타고 개경 시내를 진군하고 있는 길 양옆에는 백성들이 잔뜩 나와 환호성을 지르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백성들의 눈에는 적지 않은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 지금 무기도 없이 원나라 군사와 싸우러 가는 거야?

    - 소문이 사실이었어. 전하께서 삽을 만드는 데에 미쳐 있다는 것이 말이야.

    - 전하께서 처음으로 친정을 가시는데 재수 없는 소리는 그만해. 전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백성들이 걱정할 만도 했다. 모든 군사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예병의 무장인 날카로운 창검과 반짝이는 갑옷을 입기는커녕 등에 맨 큼지막한 가죽 주머니 하나와 옆구리에 찬 삽 한 자루가 무장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마대 특유의 질서정연한 말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몇몇은 말을 타는 것이 어색한지 말위에서 허둥대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맨 앞에 서서 늠름하게 가고 있는 공민왕을 호위하던 무지가 입을 열었다.

    "전하. 백성들의 실망이 제법 큰 것 같사옵니다."

    "당연하지. 병사들의 체력을 아끼고 최대한 빨리 개마고원에 도착하기 위해서 말을 타고 있지만 우린 기마대가 아니라고. 어디까지나 포병대이지. 걱정할 필요 없어. 결과로 보여주면 그만이니까. 보급품은 충분히 챙겼겠지?"

    "보급품이라고 특별히 부를 만한 것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 말위에서 먹을 통조림 3개와 내일 기마대를 박살 낸 후 돌아오면서 먹을 통조림 3개. 다 합쳐서 두당 6개의 통조림만을 챙겼으니까요. 그 대신 포탄은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인마살상용인 고려 제1식 박격포탄 '가'형 900발과 지상 폭발용인 '나'형 900발을 챙겼으니까요. 그 정도면 2만이 아니라 10만의 기마대도 박살 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 정도 포탄으로 10만은 무리이지. 전장에서의 인간은 광기에 휩싸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죽음을 무릅쓰고 폭탄이 터지는 전장을 달려오는 자들도 적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잊지 말아라. 포병이 적들과 백병전을 벌인다는 것은 이미 졌다는 뜻이라는 것을."

    "네. 전하. 접근하기 전에 몰살시킨다는 포병 정신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고려학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소인이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무기를 만들어내다니요. 전하 때문에 전쟁의 역사 자체가 바뀔 것입니다."

    말을 하던 무지가 손을 뻗어 아직도 퍼붓고 있는 함박눈을 손으로 받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어떻게 눈이 내리는지 알고 계시겠죠?"

    "당연히 알고 있느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자전을 하고 있을 테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겠지요? 소인에게 궁금한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에게서 고려학을 가장 많이 배운 것이 그대이니라. 전쟁의 시대가 끝나면 그대에게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모두 전수해 줄 것이야. 언젠가 나의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면 그대가 세자의 스승이 되어줘야 할 것이다. 세자의 무공을 가르치는 스승은 척무관이 될 것이고,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은 그대가 맡을 것이니까."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이번 전쟁을 압도적으로 이겨야만 하겠지요?"

    "그렇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고려군의 위력을 처음으로 보이는 전투이니까 말이야. 이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줘야만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고려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공포심을 가슴 깊숙이 말이다."

    이윽고 개경 시내를 통과한 병사들이 속도를 올리며 개마고원을 목표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서기 1345년 12월 12일

    [개마고원 위의 빠오]

    다음날 새벽 식사도 말안장 위에서 하며 빠른 속도로 달린 병사들이 산세가 비교적 순탄한 진천 쪽을 통과한 후 몽골군이 목초지로 사용하는 마치 넓은 평야처럼 보이는 개마고원 꼭대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고원 위에 공민왕이 머물기 위한 단 하나의 파오가 설치되어 있었다.

    곳곳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모닥불을 피우며 추위를 달래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두툼한 가죽 주머니 2개를 울러 맨 왕기가 지나가며 말을 걸었다.

    "다들 춥진 않느냐?"

    그러자 병사 하나가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전하. 모닥불도 있고 동료들도 곁에 있기에 추운 줄을 모르겠사옵니다."

    "몇 시간만 더 참거라. 적들을 물리치고 곧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땐 짐이 승전의 기념으로 술과 고기를 듬뿍 내려주도록 하마."

    "네. 전하."

    - 스으윽.

    파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왕기가 자신을 발견하고 기립하는 지휘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기록해 두거라. 추운 지방에서 싸울 때를 대비해 이동식 군용 천막과 이동식 난로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돌아가는 대로 개발에 착수해야 하겠어. 병사들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데 나 혼자서 편하게 빠오에 있으려니 마음이 영 불편하군."

    그러자 무지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병사들과 모든 걸 평등하게 함께 하시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적당한 차별성도 필요하옵니다. 이 빠오는 전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저희 지휘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전하께서는 추위를 느끼시지 못하시는 경지에 오르셨지만 소인을 비롯한 지휘부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근데... 울러매고 계신 것은 말씀하신 자들입니까?"

    - 툭. 툭.

    바닥에 가죽 주머니를 내려놓은 왕기가 대꾸했다.

    "그래. 이자춘과 이성계라는 자이지. 병사들에게 명령해 포병 진지 뒤에 높다란 장대를 2개 세우라고 하거라."

    "어디에 사용하실 것이옵니까?"

    "이자춘과 이성계라는 자를 높은 장대에 묶어서 이번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줄 생각이다. 죽을 때까지 나에 대해 감히 역심(逆心)을 품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럼 고려군 깃발과 포병대 깃발이 세워진 장대에 묶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 높이로도 충분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하지. 적들이 야밤을 틈타 기습할 조짐은 없고?"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사방에 세워둔 이동 통신소에서 연락이 올 것입니다. 별다른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약속한 대로 동이 트면 이곳으로 올 것 같습니다. 사전에 미리 박격포들을 방렬해 놓을까요?"

    "왜? 자신이 없느냐? 요 며칠 죽으라 그것만 훈련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자신 있습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반의 반각만에 모든 방렬이 끝날 것입니다."

    "그럼 그냥 놔두거라. 실전에서의 훈련이 필요한 법이니까. 괜히 방렬을 해뒀다가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들이 대량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적들이 겁을 먹고 돌진을 안 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전하."

    잠시 후 아침 동이 터오기 시작하자 개마고원 정상 서쪽에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밤사이 피운 모닥불들을 모두 정리하고 한 곳에 불을 피워 솥단지를 여러 개 건 병사들이 부지런히 통조림을 집어넣어 데우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아침을 해결하려는 그때 파오 안에서는 임시로 설치된 통신장비가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려 부호를 해석한 무지가 보고했다.

    "전하. 쌍성총관부 인근 산정(山頂)에 설치되어 있는 임시 통신소에서 전통이 도착했습니다. 적들의 기마대가 쌍성총관부를 방금 나섰다고 하옵니다. 늦어도 한 시진 이내로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 쪽도 슬슬 준비를 해야지. 병사들에게 최대한 빨리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방렬 대형을 유지하고 있으라 전해라."

    "존명."

    대고려제국 건국의 서막을 알리는 개마고원에서의 역사적인 전투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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