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82화 (82/171)
  • #82. < 쌍성총관부를 박살내고 고토를 회복하다 - 3(4권 끝) >

    서기 1345년 12월 7일

    이날 아침의 겨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고, 개경의 날씨는 몹시도 추웠다. 훗날 고려 문자로 쓰인 최초의 역사서라고 불리게 되는 목은 이색이 쓴 '대고려제국사'에 이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 개벽 원년 섣달 이레.

    이날은 대고려 제국을 건설한 공민왕이 즉위한지 불과 닷새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개경 시내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백성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꼈으리라. 역대의 다른 고려의 왕들처럼 거창한 즉위식을 하지도 않았고, 즉위하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직 대단한 정책을 펼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열 성군(聖君)이 즉위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날은 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공민왕이 고토 회복을 위한 본격적인 무력 행동에 나설 것을 정식으로 결정한 날이기 때문이다...

    [만월대 연경궁(延慶宮)]

    여느 날처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어전회의를 연 왕기가 입가에서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는 중신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으신 게요? 문하시중, 지나가는 젊은 처자의 속치마라도 보셨소? 뭐가 그리 즐겁소?"

    며칠 계속 어전회의를 하며 친해진 듯 자연스럽게 농이 섞인 왕기의 질문에 문하시중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넙죽 허리를 절반으로 접으며 대답했다.

    "전하. 전하의 은덕 때문에 개경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사옵니다."

    "짐의 은덕이라?"

    "그렇사옵니다. 전하. 얼마 전 전하께서 명을 내려 원을 등에 업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18개의 권문세가를 단칼에 정리하시고 그들의 창고에서 재물과 곡식을 모두 거두셨잖습니까? 재물이야 전하께서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자금이라 하시며 모두 가져가셨지만 그들 가문에서 나온 산더미 같은 곡식 일체를 고려의 만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중신들의 회의를 거쳐 얼마 전 왜구의 침략을 받은 전라도 쪽에 가장 많은 양의 곡식이 내려갔지만 개경 백성들에게 뿌려진 곡식 또한 적지 않사옵니다."

    빠르게 말을 하던 문하시중 이제현이 공민왕의 친위대장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옆구리에 떡하니 검을 차고서 화려한 관복을 입고 공민왕 옆에 서있는 척무관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처럼 왕실에서 곡식을 푸는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탐관오리들이 중간에서 착복을 하는 바람에 실제 백성들에게 돌아간 곡식은 쥐꼬리 보다 적은 경우가 허다했사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사사로이 곡식을 챙기는 관리들은 감찰을 통해 직접 목을 치겠다고 명하셨기에 그 누구도 감히 곡식을 빼돌릴 생각을 못 하였지요. 전하의 추상과도 같은 위엄을 모르는 관리는 고려 전역에 아무도 없사옵니다. 거기에 전하께서 천우위의 상령(常領 : 친위대 육군의 우두머리. 해군의 우두머리는 해령(海領)이라고 한다)으로 임명한 척노리 상장군(上將軍)이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중앙군을 이끌고 매일같이 관청에 나가 곡식의 분배를 엄격히 관리하였습니다. 이에 개경이 백성들이 다들 올겨울을 날 걱정이 없어졌다며 기뻐하고 있사옵니다. 또한..."

    뭔가를 더 말하려다 입을 닫은 문하시중 이제현을 보며 왕기가 말했다.

    "숨기지 말고 말해보시오. 일전에 짐이 약속하지 않았소? 어전회의에서 한 발언을 가지고는 절대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이오.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구려."

    "어흠..."

    말하기가 쑥스러운지 가볍게 헛기침을 한 이제현이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낯부끄럽지만 소신의 집 인근에 있는 백성들이 저만 나타나면 자꾸 엎드려 절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전하를 잘 보필해달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요. 소신이 전하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고려의 몇 안 되는 진정한 충신이라고 치켜세우면서 말입니다. 소신이 태어나서 백성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처음이라 얼떨떨하기도 하지만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더군요. 이것 또한 전하의 은덕이지요."

    '이 양반이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뽕 맛을 제대로 본 모양이로군.'

    속으로 중얼거린 왕기가 입을 열었다.

    "오호라... 그래서 문하시중의 얼굴이 그렇게 활짝 펴진 거로군. 조만간 짐이 그대 집 앞에 충렬비(忠烈碑)라도 하나 세워드려야 하겠구려. 만백성들이 오고 가며 절이라도 하게 말이오. 근데... 찬성사 이곡. 그대의 얼굴은 왜 또 그렇게 좋은 것이오?"

    왕기의 물음에 이곡이 즉답했다.

    "전하. 자고로 백성들은 '함포고복(含哺鼓腹 : 음식을 먹으며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천하가 태평하여 즐거운 모양새를 일컫는 말)'이 최상의 즐거움이라 하였습니다. 고려 전역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배불리 먹는다는데 소신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지만 소신에게는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사옵니다. 바로 훈민정음이라는 것이지요.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중국의 한자를 버리고 전하께서 창제하신 고려의 독창적인 문자라는 훈민정음을 사대부에게 강요하는 것은 크나큰 반발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소신의 장자인 이색이 왕비마마로부터 훈민정음을 깨우치고 와서 그날 밤 소신에게 훈민정음을 알려주더군요. 별다른 책도 없이 말입니다. 그날 밤으로 소신도 훈민정음을 다 깨우쳤습니다. 듣기로는 성균관에 있는 유생들도 요 며칠 새 다 익혔다고 하더군요. 빠르면 한 시진 늦으면 반나절만에 다 익힐 수 있으니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지요."

    "그렇겠지. 성균관에 있는 자들이라면 공부 쪽으로는 제법 재주가 있는 자들일 테니까."

    "그래서 유생들 사이에서 다들 이런 쉬운 문자를 놔두고 굳이 어려운 중국의 한자를 익힐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소문이 영남과 호서 지역의 전통적인 유학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가 조정에 상소를 올리고 개경으로 직접 상경할 준비를 하던 자들이 일단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하옵니다. 훈민정음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디 한번 익혀보기라도 하자라는 마음이 생긴 것이겠지요."

    "원래 그런 것이라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것이 단순히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 뛰어난 기술과 학문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 모든 방해와 견제를 뚫고 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는 법. 이 나라의 유학자들과 사대부들이 아무리 반발하더라도 훈민정음의 뛰어남은 그 모든 것을 헤치고 나가 고려 백성들의 문자가 될 것이오. 짐이 굳이 어명으로 강요하지 않더라도 말이오."

    왕기의 말을 우상시 백문보가 재빠르게 받았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개경에서는 요즘 가게마다 새로운 간판을 제작해서 내거는 유행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모두 고려 문자로 적힌 간판이지요. 항도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훈민정음으로 인해 상인들이 그들이 읽을 수 있는 고려어로 적힌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이전에는 한자를 잘 모르는 백성들에게 있으나 마나 한 이정표(里程標)가 사거리마다 세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또한 고려 문자로 적힌 것이지요. 이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이옵니다. 하지만 전하. 소신에게도 걱정거리가 하나 있사옵니다."

    "말해보시오."

    "전하께서는 뛰어난 인재들을 등용해 고려 전역에 강력한 행정체계를 구축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개발하신 유선 통신이라는 것을 이용해 왕실의 명이 단 하루 만에 고려 전역에 퍼지는 그런 나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백문보가 썰렁한 어전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조정에 사람이 너무 없사옵니다. 이는 행정공백을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최대한 빨리 과거시험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전국의 인재들을 등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되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왕기가 입을 열었다.

    "좋소이다. 짐이 한발 양보하지. 앞으로 한 달 뒤 문과, 무과, 실과를 포함하는 과거시험을 대대적으로 열겠소. 본래는 고려학을 얼마나 익혔나를 선발 기준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이오. 제대로 된 고려학의 책자들이 발간되지 않았고 그와 관련된 교육도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단 과거시험의 문제는 모두 고려어로 출제될 것이고, 답안 역시 고려어로만 써야 할 것이오. 한 달 이내에 훈민정음을 못 배울 정도의 머리라면 뛰어난 인재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니까."

    왕기가 자신의 옆에 서있는 노국공주를 한번 바라본 다음 말을 이었다.

    "조만간 훈민정음을 익힐 수 있는 책자를 대대적으로 찍어서 널리 반포할 게획이오. 짐이 듣기로는 왕비가 뛰어난 목판조각사들을 고용해 도판(圖板)을 파게 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림을 첨부해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쉽게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 책자를 대대적으로 발간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소."

    "알겠사옵니다. 전하. 책을 받아든 전국의 인재들이 기뻐할 것이며, 과거를 보기 위해 미친 듯이 훈민정음을 익힐 것이옵니다."

    "당연히 그리해야지. 그게 싫은 자들은 조정으로 진출할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이오, 짐에게는 그런 사대주의자들을 등용해 같이 이 나라를 이끌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과거 문제는 그리하고... 짐에게 또 다른 할 말이 있는 자가 있소이까?"

    그러자 다른 중신들과 달리 침중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서있던 최영 장군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소신에게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아서 이렇게 나섰습니다."

    "어떤 소문을 말하는 것이오?"

    "며칠 내로 전하께서 쌍성총관부를 칠 거라는 소문 말입니다."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오. 오늘 어전회의를 연 목적은 원나라 황실에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쳐서 고토를 회복할 것이라는 사신을 보내는 것과 쌍성총관부에 자진해서 군사들을 이끌고 원나라로 물러가면 뒤를 쫓지는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하기 위해 서찰을 보내는 것이라오."

    "하지만 전하. 소문으로는 쌍성총관부를 치기 위해 중앙군을 동원하지 않고 전하께서 직접 양성하신 천명의 군사들만을 동원한다고 들었사옵니다. 이는 무모한 일이옵니다. 고려가 자랑하는 궁수대도 동원하지 않으시고, 기마대도 동원하지 않으면서 원나라의 막강한 기마대를 상대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양성한 병사들이 하는 훈련이 나무 통을 들고뛰는 훈련이라고 들었사옵니다. 그런 훈련으로는 2만에 달하는 기마대를 상대할 수가 없사옵니다. 또 하나의 소문은 전하께서 뛰어난 철을 개발하셨는데 그것으로 땅을 파는 삽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옛말에 '좋은 철로는 못을 만들지 않고, 인재는 병사로 키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뛰어난 철로는 삽을 만들 것이 아니라 당연히 뛰어난 병장기나 갑옷을 만들어야 할 것이옵니다."

    "최영 장군의 정보력이 제법이구려.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천명만으로도 2만의 기마대를 박살낼 자신이 있으니까. 그리고 짐이 삽을 만들고 있는 건 또한 사실이오. 포병의 전투는 삽질로 시작해서 삽질로 끝나는 것이니까. 짐이 그대의 걱정을 덜어드리리다. 어전회의가 끝나면 짐을 따라오시오. 포병으로 양성된 군사들이 오늘부터 본격적인 실전 훈련에 들어가니까."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번에는 짐이 물어보겠소. 권문세가들을 정리하고 얻은 재물의 절반을 그대에게 맡겼소. 그대가 그 재물로 내년 봄까지 천척에 달하는 전함을 만들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해서 말이외다. 정말로 가능하겠소?"

    "가능하옵니다. 전하.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제1차 일본 정벌과 관련된 기록을 보신 적이 있사옵니까? 그 당시 고려에서는 3만 5천 명을 동원하여 불과 4개월 만에 9백 척의 전함을 만들었습니다. 고려의 조선(操船) 기술력이 결코 낮지 않지요. 그 기술과 그 인재들이 어디 가겠습니까? 이미 그 당시 전함을 만들던 변산반도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아 전함의 건조에 들어갔으니 믿고 맡겨주시지요. 내년 봄에 이 최영이 전하께 천척의 전함을 바치겠습니다. 이번에는 소신이 전하께 여쭤보겠사옵니다. 소신에게 권문세가에서 획득한 절반의 재물을 이용해 새로운 전함을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사옵니까?"

    "근해(近海)용 대고려 해군 전함 1식인 '거북선'을 말하는 것이로군. 새로운 전함의 설계는 짐이 직접 작업 중이라오. 비록 대양(大洋)을 항해하는 배는 아니지만 워낙 신기술들이 많이 들어가서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오. 그 배는 일본 정벌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장군선이니 내년 봄에 최영 장군이 그 배에 직접 타서 남벌(南伐)에 나설 것이오. 최영 장군의 안전을 위해 짐이 최선을 다해 만들 것이니 걱정 마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 짝.

    최영 장군이 물러나자 손뼉을 쳐 중신들의 이목을 모은 왕기가 위엄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이제는 원나라에 보낼 서찰과 쌍성총관부에 보낼 서찰을 작성하시오. 그리고 원나라에 보낼 사신을 선정해야 할 것이오. 그런 후 서찰을 가진 사신이 원나라 대도에 도착하는 4일 후 전격적으로 쌍성총관부를 칠 것이니 다들 그리 아시오."

    - 네. 전하. 명을 받잡습니다.

    잠시 후 서찰을 지닌 사신이 원나라로 출발했고, 국방과학연구소로 가는 공민왕의 뒤를 최영 장군이 따라나섰다.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시작으로 그 옛날 고구려 땅이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설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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