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81화 (81/171)
  • #81. < 쌍성총관부를 박살내고 고토를 회복하다 - 2 >

    [천마산 국방과학연구소]

    요 며칠 계속해서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원에서 고려까지 건너와 왕위에 오르기 위해 피의 숙청까지 단행하느라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왕기가 만월대를 떠나 순식간에 국방과학연구소 상공으로 이동하였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오래간만에 미소가 걸렸다. 마치 자신이 훈련받던 군대 시절과 인천에 있던 철공소의 모습을 재현한 듯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규모로 지어진 연구소 공터에서는 자신이 명한대로 무장이 살벌한 풍채로 심왕부의 병사들 사이로 지나다니며 그들을 포병으로 훈련시키는 모습이 보였고, 연구소 한쪽에서는 장작을 때워 쇠를 녹이는 듯 십여 개의 굴뚝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현대로 되돌아온듯한 익숙한 광경에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내가 직접 증명해 주지.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상대하기 위해 선정된 대적자 따위가 감당할 수 없는 현대 과학의 위대함을 말이야. 단 조심해야만 한다.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노벨은 자신이 발견한 다이너마이트의 위력 때문에 세상에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의사 겸 발명가였던 리처드 조던 개틀링이 기관총인 개틀링 건을 개발할 때도 기관총의 위력으로 세상에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어. 오히려 그러한 개발로 인해 전쟁에서 죽는 사람이 숫자만 급격히 늘어났을 뿐. 그건 원자폭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원자폭탄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끼리의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위력이 뛰어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것이야.'

    굴뚝에서 연기가 솟구쳐 오르는 쪽으로 날아간 왕기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최무선의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쇠를 용광로에 녹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열기가 후끈거리는 곳으로 조용히 낙하한 왕기가 최무선의 등 뒤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최무선.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구나?"

    화들짝 놀란 최무선이 뒤를 돌아보고 왕기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고함을 내질렀다.

    "이 나라 고려의 지존이신 공민왕 전하께서 직접 왕림하셨다. 디들 절을 올리거라."

    최무선을 선두로 사람들이 우르르 바닥에 엎드리며 절을 하자 욍기가 명을 내렸다.

    "다들 일어나거라."

    사람들을 일으켜 세운 왕기가 최무선에게 물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게 된 것이냐?"

    "전하께서 소인에게 연구소와 관련된 전권을 주셨잖습니까? 그런 전하께서 고려의 왕위에 오르셨으니 소인이 세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지요. 일을 진행하는 것에 거칠 것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어제 당장 향도들을 이끌고 장야서(掌冶署 : 고려 때 철공(鐵工)과 야금(冶金)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로 찾아가 전하의 명령이라며 개경 인근에서 갑옷을 만드는 백갑장(白甲匠), 큰칼을 제조하는 장도장(長刀匠), 철을 단조하는 연장(鍊匠), 화살촉을 만드는 전두장(箭頭匠) 등을 모조리 이곳으로 끌고 왔습니다. 또한 개경에서 숯과 철을 보관하는 창고인  ‘고수탄철고(固守炭鐵庫)’를 털어왔지요. ‘군기감(軍器監)에서 알면 소인의 목을 칠일이지만 전하께서 막아 주실 거라 굳게 믿고 있사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지방에 있는 민간인들이 운영하는 ‘철소(鐵所)’의 뛰어난 장인들도 모조리 끌어모을 생각입니다."

    왕기가 뒷배인 자신을 믿고 일을 빠르게 추진한 최무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잘 하였다. 내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육하는 것보다 전국의 유능한 철장들을 모조리 연구소에 모아놓고 교육하는 것이 편할 것이야. 고려의 제철 기술을 한 단계 진일보시켜야만 한다. 내가 군기감과 장야서에 어명을 내려 네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만들어줄 테니 뒤는 걱정 말고 힘닿는 대로 추진해 보거라."

    "감사하옵니다. 전하. 소신이 목숨을 걸고 추진할 것이오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씩씩하게 대답하는 최무선을 보며 왕기가 씩 웃으며 물었다.

    "즐겁냐?"

    "네?"

    "하루하루가 즐거우냐 말이다. 매일 같이 새로운 것을 연구개발하는 것이 즐겁지 않냔 말이다."

    "즐겁사옵니다. 전하를 만난 후 제 삶의 소명이 뭔지를 알게 되었고 하루하루가 즐겁기 짝이 없사옵니다."

    "그래.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너처럼 전형적인 공돌이 출신이니까...'

    뒷말을 속으로 삼킨 왕기가 물었다.

    "쇠는 충분히 녹였느냐?"

    "네. 전하. 전하께서 한꺼번에 여러 대의 포신을 대량으로 제작하시길 원하실 것 같아서 미리 용광로를 최대한 크게 10개 지어놨습니다. 소인에게 재물이 있고 인력이 충분하니 못할 것이 없지요. 어젯밤부터 불을 때웠으니 지금쯤이면 충분히 녹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철광석을 녹이는 게 아니라 고수탄철고에서 들고 온 한번 제련된 쇠를 녹이고 있는 거라 불순물도 별로 없어서 포신을 만들기에 용이할 것입니다."

    "고려에서도 쇠를 녹일 정도의 화력을 지니고 있단 말이지?"

    "당연하지 않겠사옵니까? 전하. 고려 곳곳에서는 고려청자(高麗靑瓷)를 만들고 있습니다. 본디 청자란 것은 쇠를 녹일 정도의 화력이 없으면 제작이 불가능한 도자기이지요."

    "맞아. 그랬지. 내가 깜박했어. 도자기를 위해 앙리에게 젖소까지 구해오라고 명을 내려놓고서는..."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고려의 정세가 안정되면 최대한 빨리 도자기 산업을 본격적으로 중흥시켜야 하겠어. 고려청자라면 유럽인들의 눈이 회까닥 뒤집어질 테니까 교역으로 금과 은을 산더미처럼 벌어들일 수 있을 테지. 중동인들을 위해서는 청화자기(靑華瓷器)가 제격일 테고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병사들을 이끌고 중동에 있는 이란을 최대한 빨리 정복해야 하겠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따로 교역을 추진하든지 해야 할 테고 말이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철장들을 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짐이 너희들이 잘 모르고 있는 철과 관련된 새로운 지식들을 알려주겠다. 물론 알려준다고 해서 당장 너희들이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야. 그때를 위해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잘 기억해야만 한다. 알겠느냐?"

    - 네. 전하.

    "본디 철이란 것은 가장 값싼 재료이다. 세상 곳곳에 철광석이 널려 있으니까. 구리보다 더 값싼 재료이다. 하지만 제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질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 또한 이 철이니라. 철중에 가장 단단한 철이 무엇이냐?"

    - 무쇠이옵니다.

    뛰어난 철장들답게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무쇠이지. 하지만 무쇠로는 솥과 솥뚜껑밖에 만들지 못하고 농기구로도 사용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더냐?"

    -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잘 깨지기 때문이옵니다.

    "그러하다. 단단하기는 하나 충격에 아주 취약하지. 마치 도자기처럼 말이야. 그런 이유로 저잣거리의 차력사들이 무쇠를 주먹으로 내리쳐서 부시며 약을 파는 것이니라. 그래서는 써먹을 곳이 별로 없어. 그럼 무쇠가 그렇게 잘 깨지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느냐?"

    - ......

    에상대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왕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인을 모르면 고칠 방법이 없지 않으냐? 짐의 말을 잘 들어라. 무쇠가 그렇게 잘 깨지는 이유는 철의 내부에 탄소(炭素) 즉 석묵(石墨) 가루가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야. 철은 이 석묵 가루와 결합하는 것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하지만 석묵 가루 성분이 많이 들어가면 단단해지기는 하지만 연성이 떨어져 쉬이 깨지게 되는 것이야. 무쇠팔 무쇠다리인 사람이 있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단단해 보이지만 달리기 한 번만 해도 팔다리가 다 깨어져나가 불구가 되고 말 것이야. 지금부터 짐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석묵 가루가 1.7/100, 즉 1리 7모(1.7%) 이하인 철을 제작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강철(鋼鐵)이라고 부른다. 단단하면서도 질겨 잘 부러지지 않고 자체적으로 탄성을 가지고 있는 철이지. 농기구로 만들면 수십 년간 밭을 갈아도 끄떡없고, 짐이 개발하고자 하는 대포의 포신으로 사용될 철이 바로 이 강철인 것이다."

    그러자 철장 중에 한 명이 물었다.

    "전하. 그러한 철을 만드는 비법이 무엇이옵니까?"

    "아주 간단하다. 탄소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철을 탄소와 결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철이 녹아있는 용탕에 순수한 산소를 불어넣어 주면 된다. 산소가 철안에 있는 규소, 인 등과 같은 잡다한 것들을 산화시켜 제거할 뿐만 아니라 철이 탄소와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지. 지금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방법을 알아도 사용할 수도 없고. 지금 당장은 그렇게 외워만 두거라. 언젠가 그대들이 고려 곳곳에 퍼져 산소를 사용하여 강철을 대량으로 제작할 날이 곧 올 테니까 말이다."

    왕기가 최무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준비하란 것은 준비되어 있느냐?"

    "네. 전하. 물이 가득 담긴 물동이와 곱게 간 쇳가루 한 가마니를 준비해놨습니다."

    "좋아. 그럼 강철 제련을 시작해보자. 물동이를 가지고 오너라. 산소를 뽑아내 불어넣어야 하니까."

    왕기의 말에 최무선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물동이를 가져오너라."

    시간이 제법 지난 후 왕기가 강기를 이용해 펄펄 끓고 있는 용탕에서 쇳물을 조금 퍼낸 다음 냉각수에 집어넣어 식힌 후 양손으로 철편(鐵片)의 끝단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화경에 달한 왕기의 힘에 저항하며 무쇠와 달리 부러지지 않고 조금씩 길게 늘어나던 철편이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가운데 부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 찌지직...

    '되었어. 이 정도의 인장강도(引張強度)라면 충분해. 지금 당장은 인장시험기도 없고 현미경과 성분분석기도 없어서 정확한 스펙을 확인할 수 없지만 박격포 포신으로 사용하기에는 이 정도 성능만으로도 충분하다.'

    왕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라!"

    - 네. 전하.

    철장들이 들고 와 바닥에 깔아놓은 포신용 거푸집에 용탕들이 부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백여 기의 포신이 제작되자 왕기가 열기가 식은 포신을 하나씩 들고 곱게 갈린 쇳가루를 한가득 뿌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양손으로 포신의 양쪽 끝을 잡고 전기를 흘렸다. 그러자 전자석으로 변한 포신에 미세한 쇳가루들이 잔뜩 달라붙어 버렸다.

    "전하.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지켜보고 있던 최무선의 물음에 왕기가 답했다.

    "제작한 포신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야. 그런 곳이 있으면 곱게 갈린 쇳가루가 자력에 의해 포신 안으로 파고들 테니까. 혹시라도 불량품이 있을까 확인하는 작업인 것이지. 내가 직접 시험하지 않은 포신은 사용 금지이다. 아무리 강철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포신은 발포 도중 터질 위험이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이윽고 왕기가 바닥에 늘여져 있는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백여 개의 박격포 포신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나의 용광로에서 열 개의 포신이라. 용광로가 열 개이니 하루에 백 개씩 제작이 가능하겠군. 앞으로 4일 후에는 포신 제작이 모두 끝나겠어. 4일간 내가 매일 들리도록 하마."

    "알겠사옵니다. 전하. 전하가 떠나시는 대로 철장들을 동원해 제작된 포신 내부를 깨끗하게 닦고, 용광로를 청소한 다음 곧바로 다시 쇠를 녹이는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매일 이 시간쯤에 들려주시면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말했다.

    "잘 들어라. 최무선. 앞으로 이 연구소에서 개발할 철의 제련 기술은 크게 4가지이다. 하나는 지금 막 내가 보여준 강철 제련 기술이고, 또 하나는 구상흑연주철(球狀黑鉛鑄鐵)의 개발이다. 주물(鑄物)용 주철에 들어가 있는 흑연 즉 석묵을 본래의 엽편상(葉片狀)에서 구상(球狀)으로 변화시켜 강인성(强靭性)을 증가시킨 주철이지. 대량으로 농기구를 생산하기에 딱인 재질이야. 강철은 제조공정이 복잡해 제작 단가가 너무 비싸지니까. 그리고 조만간 스테인리스를 제작하는 기술을 개발해야만 한다. 마지막은 고탄성강(高彈性鋼)인 스프링 강의 제조기술 개발이고."

    왕기의 설명을 들은 최무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강철과 주철 그리고 고탄성강이 무얼 뜻하는지는 소인도 어렴풋이 알겠습니다만 스테인리스란 것이 무엇이옵니까?"

    "오랜 시간 가만히 놔둬도 절대 녹이 슬지 않는 철이지."

    눈이 휘둥그레진 최무선이 물었다.

    "전하, 세상에... 그런 철이 정말로 있사옵니까?"

    "있느니라. 서역으로 떠난 앙리가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오면 그대의 눈앞에 보여주도록 하마. 조만간 고려가 만든 신재료를 이용한 각종 상품들과 도자기 등이 전세계를 휩쓸게 될 것이야. 고려를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강력한 국가로 만들 것이니라.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첫 걸음을 잘 떼야만 한다. 짐이 하나씩 상세하게 알려줄테니 당장은 박격포를 만드는데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또 하나 만들어줘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전하."

    왕기가 품에서 새로운 설계도면을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 만들도록 하거라. 야전삽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삽질을 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지. 박격포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포를 설치할 땅의 평탄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삽질이 필수라는 뜻이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철장들을 동원해 곧바로 제작을 시작하겠사옵니다."

    "부탁하마. 육분의, 야전삽, 박격포를 지닌 포병대는 천하무적의 군대가 될 것이야."

    [만월대 연경전]

    연구소를 떠나 다시 연경전으로 돌아온 왕기가 자신의 침실 앞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방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이 감각에 잡혔지만 기대했던 훈민정음을 공부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드르륵.

    직접 방문을 열고 들어간 왕기가 눈을 크게 떴다. 노국공주와 처음 보는 청수한 인상의 청년이 입을 꾹 다물고 고려어로 열심히 필담(筆談)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잘 다녀오셨습니까?"

    자신을 발견한 왕비가 물어오자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왔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소이다."

    그러자 청수한 청년이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절을 올리며 외쳤다.

    "공민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소인은 찬성사 이곡의 장자인 이색이라 하옵니다. 불경하게 전하의 침실에서 왕비마마와 단둘이 있는 것은 소인에게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전하의 명령이시라며 왕비마마께서 직접 소인을 부르셔서..."

    손을 휘이 저으며 이색이 말을 자른 왕기가 대꾸했다.

    "되었느니라. 짐이 직접 내린 명령을 짐이 모를까? 근데..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이더냐?"

    왕기의 물음에 노국공주가 대꾸했다.

    "이색의 머리가 워낙 총명하여 훈민정음을 단 한 시진만에 다 떼었습니다. 그래서 소첩이 글을 실제로 쓰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필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지요."

    "그래?"

    허공섭물을 일으켜 이색이 쓴 글들을 끌어당긴 왕기가 잠시 필담 내용을 읽어보더니 명을 내렸다.

    "이색 그대가 해줘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전하. 명령만 내리옵소서."

    "그대가 지금 성균관에 있지?"

    "네. 전하. 그렇사옵니다."

    "훈민정음의 위대함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돌아가거든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그대가 훈민정음을 전파하도록 하거라. 짐이 직접 명을 내리는 것보다 친우인 그대가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것이야. 유생들의 반발도 적을 것이고. 알겠느냐?"

    "네. 전하. 소인이 그리하겠사옵니다. 훈민정음은 참으로 위대한 문자이옵니다."

    "나머지 하나는 조만간 짐이 그대를 부를 테니 짐의 이야기를 잘 듣고 책을 하나 집필해야 하겠다. 보아하니 글 쓰는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어떤 책이옵니까?"

    "머나먼 서역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것이 책으로 전해져 온다. 성경(聖經)이라는 것도 있고. 서역인들의 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책 들이지. 그러한 책이 고려에도 있어야만 할 것이야. 백성들의 가치관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런 이야기책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우주와 신 그리고 고려인과 관련된 책을 쓰도록 하거라. 그와 관련된 내용들은 짐이 직접 구술해 줄 테니 그걸 참고로 최대한 재미있게 한번 써보도록."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이색이 물러가자 노국공주가 물었다.

    "전하. 단군신화라도 기술할 작정이십니까?"

    "그 책에는 단순히 단군신화만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오. 이 우주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 왜 고려학을 배워야만 하는지, 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집대성 해서 만들어야 하겠지. 용비어천가(飛御天歌)의 소설 버전 정도로 보시면 될 것이오. 훈민정음을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뜨리려면 훈민정음으로 쓰인 다양한 책들을 찍어내야만 하오."

    "저자에게 그러한 글재주가 있겠사옵니까?"

    "잊으셨소?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은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로 유명한 죽부인전(竹夫人傳)을 집필한 작가라오. 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잘 쓸 것이오. 조만간 다양한 책들을 출판할 생각이니 왕비께서는 금속활자 개발에 신경을 써주시구려."

    "전하. 그에 관해 이색이 의견을 낸 것이 있사옵니다. 조합이 가능한 모든 문자를 다 만들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많으니 차라리 받침용 문자와 'ㄲ', 'ㄸ', 'ㅃ' 같은 쌍자음 문자를 따로 만들어서 하나의 글자로 조합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마치 현대에서 타자기로 타자를 치듯 말입니다."

    "그것이 더 낫겠군. 컴퓨터야 크기를 알아서 조절해 주지만 타자기에는 그런 기능이 없으니 받침용은 작게 만들고 쌍자음과 ‘ㄳ’, ‘ㄵ’, ‘ㄺ’ 같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곁받침을 따로 만드는 것이 인쇄에 유리할 것이오. 훈민정음을 배운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이색의 머리가 제법이로군."

    "네. 전하. 보통 뛰어난 머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고 무지하고 무식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해야지. 뛰어난 인재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말이오."

    왕기가 박격포용 포신 제작과 야전삽 제작을 위해 매일 같이 국방과학연구소를 들리는 동안 빠르게 4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