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79화 (79/171)
  • #79. < 고려(高麗)의 개혁을 시작하다 - 2 >

    서기 1345년 12월 3일

    [만월대 연경궁(延慶宮)]

    전날 밤 백여 명에 달하던 고려 조정의 신하들을 단칼에 숙청한 후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와 희비를 찾아가 안심을 시킨 왕기가 다음 날 아침 만월대의 본궐인 연경궁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신하들과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하기 위해 옥좌(玉座)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왕기의 옆에는 정비인 노국공주가 서 있었고 옥좌 앞에는 왕기가 거느리고 있는 간부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왕기의 수신호를 받은 내시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 만조백관(滿朝百官) 입궐이오!

    중성적인 목소리로 외치는 내시의 외침과 함께 연경궁의 문이 활짝 열리며 피비린내 나는 숙청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문관 3명과 무관 7명이 누군가는 밝은 얼굴로, 누군가는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줄지어 들어왔다. 전날 밤 본인이 철혈의 군주임을 증명한 왕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옥좌에서 일어나 양팔을 활짝 벌리며 들어오는 신하들을 반겼다.

    "어서들 오시오. 고려의 진정한 충신들이여."

    자연스럽게 옥좌 앞쪽에 좌우로 나누어선 신하들 중에 문관들의 우두머리 격인 자가 입을 열었다.

    "전하. 소신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이제현(李齊賢)이라고 하옵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것을 진심으로 경하 드리옵니다. 고려의 적통이신 전하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신하는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소. 그대들이 짐을 인정하지 않아 또다시 신하들이 피를 흘리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라오. 짐이 왕위에 있는 한 어전회의에서 한 발언으로 죄를 묻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는 바이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해주시길 바라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전날 밤 숙청된 신하들은 흔히 부원배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며 재물을 탐하던 탐관오리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전하의 의중(意中)이 고려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그 누구가 모르겠사옵니까? 그와 관련된 전하의 뜻을 묻고자 하옵니다."

    "문하시중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오. 짐이 고려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만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려는 것은 맞소이다. 하지만 짐의 뜻은 단순히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오. 이 나라 고려를 최단 시간 내에 부강하게 만들어 남으로는 일본을 정벌하고 나아가 북으로는 대륙에 진출해 중국을 고려의 발아래 두고자 하는 것이 짐의 진정한 목표이기 때문이오."

    황당하기까지 한 발언에 신하들이 놀라 눈이 동그래지자 왕기가 말을 이었다.

    "이러한 짐의 뜻을 잘 알고 그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짐을 보필해 주길 바라고 있소이다. 문하시중께서는 살아남은 문인들이 누군지 그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오. 그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고 있소이까?"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사옵니다. 소신을 포함해 살아남은 문신들은 이곡(李穀)과 백문보(白文寶)이며 이들 모두는 소신이 조정에 추천한 자들이옵니다. 아마도 문신들끼리의 다툼이나 파벌 형성을 방지하고자 하는 전하의 뜻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소이다. 여기 있는 문관 모두 문하시중께서 '지공거(知貢擧 : 고려시대의 과거시험관)'의 자리에 있을 때 뛰어난 인재라며 왕실에 추천한 자들이라오.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사이이니 다툼이 없을 것이고, 모두가 같은 파벌이라고 할 것이니 당파 싸움 또한 없을 것이오. 또한 음서제에 의해 관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 분 모두 과거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이니 그 능력 또한 믿을만할 것이고, 모두가 원나라의 간섭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 매진한 자들이니 짐이 중용할만하지. 문하시중께서는 원에 표문(表文)을 올려 부당한 내정간섭을 비판하면서 고려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인물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인 이곡은 부원배들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처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한 바가 있소. 우상시(右常侍)인 백문보(白文寶)께서는 시급한 민생문제의 개선방안을 조정에 거듭 건의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자라고 알고 있소이다."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왕기가 자신들을 꿰뚫어 보고 있자 문신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을 때 왕기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있다고 하였소. 본인이 살생부를 작성하며 숱한 날을 고민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오. 지금부터 짐이 고려를 다스릴 방책을 말해주겠소. 오늘부터 고려가 이전과 달리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들어섰다는 의미에서 연호(年號)를 개벽(開闢)이라 할 것이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고려의 국시(國是)는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것을 천명하는 바이오."

    그 순간 문하시중 이제현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실사구시라 함은 각종 실험과 연구를 통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구명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학문이 아닙니까?"

    "맞소이다. 이 세상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를 연구하는 물리(物理), 인간의 생로병사를 연구하는 의학(醫學), 인간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 동물과 식물들을 연구하는 생물(生物), 하늘과 땅이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이 상호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화학(化學), 하늘에 떠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각종 별들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가 어떤 원리로 운행되는지를 연구하는 천문(天文), 그 모든 학문들의 기본이 되는 수학(數學)과 기하학(幾何學), 마지막으로 그 모든 학문들을 활용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물건들을 연구 개발하는 공학(工學)을 융성하게 만드는 실사구시를 이 고려 땅에 구현할 것이고, 앞으로 치러지는 모든 과거시험 또한 그러한 학문들을 중심으로 실시될 것이오."

    왕기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찬성사 이곡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전하의 뜻은 알겠으나 고려가 비록 숭불 정책을 취하고는 있지만 예로부터 중국에서 유학(儒學)을 받아들여왔고, 최근에는 사대부들이 성리학(性理學)을 받아들인 국가입니다. 너무 빠른 변화는 고려 전역에 퍼져있는 문인들과 사대부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전하께서는 그들의 반발을 어떻게 무마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다 죽이실 것은 아니시겠지요? 물론 전하의 무력이 뛰어나고 사람 죽이는 걸 두려워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만 천자문에 이르기를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고 하였나이다. 소신이 보기에 지금 전하의 모습은 마치 백기(白起)와도 같습니다."

    "기전파목 용군최정이라. 전국시대 때 뛰어난 명장으로 유명한 백기, 왕전, 염파, 이목 등이 군사 부리기를 가장 잘 하였다는 뜻이지. 짐이 그들 중에 백기와 같다 함은 진(秦)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지만 수많은 적과 포로들을 생매장해서 죽여 학살자로 불리던 인물과 성품이 비슷하다는 뜻이로군. 백기가 평생 동안 죽인 사람의 숫자가 물경 160만에 이른다고 알고 있으니까. 그대의 말이 맞소. 난 고려의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 수만 있다면 사람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오. 문인들과 사대부들이 실사구시라는 국시에 반발한다? 다 죽이면 그만 아니겠소? 짐의 성품이 잔혹하기로 유명한 진나라의 백기와 같다고 그대가 말하였으니 짐이 진시황(秦始皇)이 못될 이유도 없지. '분서갱유(焚書坑儒 : 진나라의 승상 이사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 서적을 불태우고 수많은 유학자들을 구덩이에 생매장한 일)'를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만월대 입구에 깊게 파놓은 구덩이도 있으니 때마침 잘 되었구려."

    분위기가 격앙해지자 최영 장군이 나서서 무마했다.

    "전하. 소신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실사구시를 국시로 삼는 이유가 고려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옵니다. 고려의 문인들도 전하의 뜻을 이해하게 되면 당장의 반발은 있을지라도 결국은 전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이오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최영 장군께서 짐의 뜻을 헤아려주니 짐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구려."

    "하지만 전하. 소신에게도 여쭤볼 것이 있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일본에 이어 원을 정벌하시겠다는 포부를 밝히셨는데 아뢰옵기 황송하지만 고려의 백성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삼백만이 겨우 넘사옵니다. 그런 숫자로 백성들의 숫자가 물경 7천만을 넘어가는 중국을 정복하기에는 무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려. 원나라는 한인 천만, 남인 6천만 그리고 색목인 수백만으로 이루어져 있소.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몽골족이 몇이나 되는 줄 알고 있소이까? 불과 100만에 불과하다오. 100만으로 7천만이 넘는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 몽골족이 한 것을 우리 한민족이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걱정 마시오. 짐이 그대들에게 약속하리다. 내가 왕위에 있는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단 한 번이라도 패하면 자진해서 왕위를 내놓고 그대들이 원하는 자에게 왕위를 이양하겠다고 말이오. 그 정도면 안심이 되겠소?"

    "아..."

    최영 장군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올 때 왕기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를 더 공표하고자 하오. 고려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과 중국의 문자가 사맞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익히기를 어려워하니 본인이 만든 고려 문자인 훈민정음을 고려의 정식 문자로 채택하고자 하오. 앞으로 모든 과거시험도 모든 공문서도 훈민정음을 사용하여야만 할 것이오. 그러니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최대한 빨리 훈민정음을 익히셔야 할 것이외다."

    또 한 번의 폭탄 발언에 우상시 백문보가 황급히 나서서 반발했다.

    "전하. 문자를 익힌다 함은 본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옵니다. 평생 한자를 사용하던 자에게 듣도 보도 못한 문자를 새롭게 익혀 과거를 치르고 문서를 작성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옵니다."

    백문보의 발언에 왕기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익혀보았소?"

    "네? 전하.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대가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익혀보았느냐 말이오. 내가 장담하리다. 훈민정음은 고려어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그만인 문자이기에 영리한 자는 하루면 익힐 수 있고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익힐 수 있는 문자라오."

    "세상에 그런 문자가 어디 있사옵니까? 한자의 기본인 천자문을 떼려고 해도 최하 삼 개월은 걸리는 법이옵니다."

    "그럼 짐이랑 내기를 합시다."

    "어떤 내기를 한단 말입니까?"

    왕기가 이곡을 바라보며 말했다.

    "찬성사이신 이곡에게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아들이 하나 있을 것이오."

    "있사옵니다. 전하."

    "그 아들에게 훈민정음을 익히게 해보시오. 만약 열흘이 넘어도 그 아들이 다 익히지 못하면 짐이 훈민정음을 고려의 문자로 삼겠다는 것을 취소하리다. 단 고의로 익히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워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니 그대의 아들을 내게 보내시오. 내가 직접 가르칠 테니."

    "전하. 약조하시는 것입니까? 소신의 아들이 열흘 만에 문자를 다 못 익히면 철회를 하시겠다는..."

    - 휘이. 휘이...

    손을 흔들어 이곡의 말을 자른 왕기가 대꾸했다.

    "약속했다 말하지 않았소? 짐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 성품이라오. 그러니 걱정 마시오."

    그때였다. 어전회의를 하고 있는 연경궁 안으로 한 명의 내시가 급히 뛰어들어와 왕기에게 다가와 고했다.

    "전하.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어디서 급보가 날아왔다는 것인가?"

    "전하께서 설치하셨다는 압록 제1 통신소에서 날아왔다는 급보이옵니다. 내용이 심상치 않아 이렇게 급히 뛰어들어왔사옵니다."

    내시가 내미는 서찰을 받아들어 읽어보던 왕기의 안색이 급변했다.

    - 통신보안. 압록 제1통신소에서 보고함. 사흘 전 항주에서 한산동이 이끄는 미륵 교도들과 정림방의 방주인 팔비신장(八譬神掌)이 이끄는 무림 세력이 반원복송(反元復宋)을 기치로 내세워 홍건적의 난을 일으킴. 동시에 마교가 중원으로 침공 감행. 이상 통신 끝.

    왕기가 신하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지금 원나라에서 대규모 내전이 발생했다고 하오. 짐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아봐야 하겠으니 어전회의를 이것으로 마치고 내일 오전에 다시 열겠소이다."

    옥좌에서 벌떡 일어난 왕기가 걸어가자 노국공주가 따라붙으며 물었다.

    "전하. 찬성사 이곡의 아들이 훈민정음을 열흘 안에 익힐 수 있겠습니까? 행여 괜한 내기를 하셨나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걱정 마시오. 이곡의 아들이 누군지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구이옵니까?"

    "이곡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 중에 하나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라오. 정몽주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길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소이다. 그래서 그자를 고른 것이지. 이색은 고려 말기에 대사성까지 올라간 자로 내가 그 이름을 알 정도로 학문의 경지가 뛰어난 학자이지. 그 정도의 머리라면 훈민정음을 못 익힐 리가 없소."

    왕기가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나의 침소로 같이 가자. 절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어떻게 이 기회를 잘 살릴지 긴급회의를 열 것이야. 무지는 지금 즉시 왕실 통신소로 달려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는 최무선을 급히 부르도록 하고."

    - 알겠사옵니다. 전하.

    홍건적의 난과 마교의 침공으로 원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고려의 국력을 최대로 키울 찬스가 찾아왔다는 것을 직감한 왕기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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