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78화 (78/171)
  • #78. < 고려(高麗)의 개혁을 시작하다 - 1 >

    서기 1345년 11월 30일

    고려로 진입한 후 비교적 길이 잘 닦여 있는 터라 빠르게 평양 가까이 접근한 이주대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뒤를 따르던 많은 백성들이 확 줄어들었고 병사의 숫자 역시 제법 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주대의 모습을 둘러보던 왕기가 무지에게 물었다.

    "남은 백성이 얼마나 되느냐?"

    "3천이 조금 넘습니다만 그들 모두 빠른 이동에 문제가 없는 자들입니다. 심왕부에서 뽑은 군사들처럼 자신들도 전하의 군사가 되겠다며 개경까지 따라가겠다고 결심한 장정들이니까요. 군사들에 대한 처우가 좋다는 것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자들이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전하께서 쌍성총관부가 다스리고 있는 땅을 최대한 빨리 회복해서 이주민들을 정착시키겠다는 말씀을 하신 후 다들 그 근처에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겠다며 행렬에서 빠져나갔습니다. 특히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물이 충분한 대동강 인근을 지날 때 많은 숫자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자들에게는 통조림을 50개씩 나눠주겠다는 말에 혹한 자들이 많았고요. 그 정도라면 기존에 자신들이 들고 온 양식이 있으니 올겨울을 충분히 날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전투식량 제1호보다는 제2호 통조림을 많이들 원하더군요."

    "다들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 개경까지의 양식은 충분하겠지?"

    "네. 통조림의 숫자가 확 줄어 아슬아슬하지만 개경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짐이 확 줄고 백성들의 숫자가 줄어 이동속도가 그만큼 더 빨라진 효과도 있으니까요. 개경까지는 계속 길이 좋아 앞으로 이틀이면 개경 인근에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틀이라. 얼마 안 남았군. 통신선을 까는 것은 문제가 없고?"

    "네. 전하. 겨울이라 땅이 단단하긴 하지만 어차피 전선을 깊이 묻을 것이 아니라서 쟁기를 단 말이 땅을 얇게 파고 지나가면 그 뒤를 따르던 군사들이 전선을 묻은 다음 파인 땅을 덮으면서 달려왔습니다. 현재 압록강 제1통신소를 시작으로 쌍성총관부 인근까지 합쳐서 총 30군데에 통신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이름만 통신소이지 전선에 전기를 흘려보낼 수 있는 벽력가 무인 1명과 그를 수발하고 호위할 군사 10명이 지낼 집이라고 보시는 게 더 맞을 겁니다. 각 통신소마다 통조림과 적당히 재물을 주었으니 당분간 먹고살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총 330명이 빠졌군. 개경까지 깔 전선은 모자라지 않겠지?"

    "네. 충분해 보입니다."

    "그대가 잘 관리해야 할 것이야. 통신대의 대장이 그대이니까. 얇게 묻다 보면 전선이 끊어지는 경우가 잦을 것이니 유지 보수에 신경을 많이 써야 될 것이야. 고려의 정세가 안정이 되면 전봇대라는 것을 세워 고장을 최대한 방지해 줄 테니까 그때까지는 고생을 좀 하도록."

    "알겠사옵니다. 전하."

    "생각난 김에 압록강 제1통신소 쪽으로 연락을 해보게. 별문제 없이 소통이 잘 되는지 확인도 할 겸 해서 말이야."

    "네. 전하. 소인이 아직도 전하께서 알려주신 양의(兩儀) 심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어 뇌전공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뇌전공을 익힌 벽력가의 무인을 불러오도록..."

    왕기가 무지의 말을 잘랐다.

    "그럴 필요 없네. 벽력가의 무인이 없어도 통신이 가능하니까."

    말을 하며 왕기가 자신이 타고 있던 말에 매여있던 나무 상자를 꺼내자 옆에서 같이 달리던 노국공주가 물었다.

    "그것이 전하께서 출발하기 전 밤을 새워가며 연구하시던 전지(電池)라는 것입니까?"

    "맞소이다. 납을 전극으로 사용하고 수용액으로 황산을 사용하는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전지이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납축전지 말이오. 당장은 문제가 좀 있어서 시험용으로 하나밖에 제작하지 않았소이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옵니까? 납과 황산은 이 시대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대의 말이 맞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오."

    말을 하며 왕기가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어 노국공주에게 슬쩍 보여주었다. 그러자 안에 들어있는 누런 빛깔의 시각형 납축전지가 보이자 눈이 동그래진 노국공주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황금(黃金)으로 제작된 것 같은데요?"

    그러자 왕기가 노국공주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대의 말처럼 황금이 맞소. 그대도 잘 알다시피 일반 금속으로 케이스를 만들었다가는 황산에 녹아내려버리오. 황산에 버틸 수 있는 건 황금밖에 없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오. 당장은 황금을 대체할 것이 유리밖에 없소이다. 실험실에 있는 황산은 유리병에 주로 보관을 하니까. 하지만 유리는 깨지기가 쉽소. 이렇게 말을 타고 달리며 보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지. 현대의 세상처럼 플라스틱을 구할 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만든 납축전지라오."

    "그럼 전하. 납축전지를 실용화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소. 쇠로 케이스를 만들고 내부 표면을 순금으로 도금(鍍金) 처리를 하면 되니까. 내가 그것까지 개발할 시간이 없어서 순금으로 만든 것뿐이요. 고려가 안정되면 도금 기술을 개발하면 그만이라오. 도금 쪽은 내 전공분야이기도 하니까."

    두 사람이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납축전지를 건네받은 무지가 병사를 불러 전선을 연결한 후 전선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단자를 이용해 능숙하게 고려 부호를 발송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중얼거렸다.

    "압록 제1통신소는... 응답하라. 전하의 명령이시다. 국경에 별일이 없는지... 특별한 정보는 없는지... 알려주길 바란다."

    발신을 끝낸 무지가 입을 열었다.

    "전하. 압록 제1통신소까지 무려 열여섯 통신소를 거쳐야 합니다. 그곳까지 직통으로 보낼 수 있는 뇌전지기를 지닌 자는 천하에 전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시간이 되면 직통으로 전선을 깔아야만 할 것입니다. 전하가 사용하실 용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답신을 받기 위해서는 결국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할 것입니다."

    "꼭 그렇지마는 않을 것이야. 납축전지가 상용화되면 중간에 전기를 증폭해서 중계할 통신소의 숫자를 대폭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일단 밥이라도 먹으며 기다려보자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무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정지!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이동한다."

    점심 식사 준비가 시작되고 왕기가 말에서 내리자 곁으로 바짝 다가온 노국공주가 조용히 물었다.

    "전하. 차라리 무선 통신을 사용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선 통신이 백배 천배 더 나을 것이오. 하지만 나에게는 당장 그걸 개발할만한 능력이 없소이다. 난 그쪽을 전공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개발이 가능할 것이오. 기본적인 원리야 알고 있으니까. 무선 통신의 원리 정도는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원리야 소첩도 잘 알지요. 안테나와 전자기파를 이용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소첩에게 만들라고 하면 만들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행여나 자신에게 개발하라고 명할까 봐 다급히 발뺌을 하는 노국공주를 보며 빙긋 웃은 왕기가 대꾸했다.

    "나도 마찬가지라오. 무선 통신은커녕 유선 전화기조차 만들 자신이 없소. 하지만 어느 시대나 천재는 있기 마련이지. 고려학을 고려 전역에 전파시키면 누군가가 제작을 해줄지도 모르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봅시다. 당분간은 불편하지만 어쩔 수가 없소이다."

    - 화악.

    간부들과 둘러앉아 데운 통조림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던 왕기가 납축전지와 연결되어 있는 구리 깡통 안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얼마나 들들 볶으며 교육을 시켰는지 앉아 있던 모든 간부들이 단체로 고려 부호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 통신보안. 대고려 압록 제1통신소에서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특이 사항 없음. 이상 통신 끝.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간부들을 둘러본 왕기가 무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답신이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느냐?"

    "이각은 걸린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두 배는 더 걸린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무지가 다급히 변명했다.

    "아마도 걸어 다니는 인간 전지를 하는 벽력가의 무인들이 고려어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중간에 병사들이 통역을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일각 안에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 달 안에 가능하도록 만들도록."

    "존명!"

    이윽고 식사를 끝마친 이주대가 말을 달리며 개경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서기 1345년 12월 1일

    이주대가 평양을 지나 사리원(沙里院)을 거쳐 개성으로 내달리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홍건적의 난이 항주에서 본격적으로 발발했고, 기다렸다는 듯 마교가 전격적으로 청해와 감숙을 향해 쳐들어갔다.

    서기 1345년 12월 2일

    개경을 지척에 둔 이주대가 지금의 황해 남도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군 사이에 흐르는 예성강(禮成江) 인변에서 잠시 목을 축이며 물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이주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선두에 서있는 자가 행여나 자신들이 공격을 받을까 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전하. 저 신라면이옵니다."

    자신을 따르는 향도들을 이끌고 찾아온 신라면이 왕기의 부인들 그리고 수하의 간부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다급히 보고했다.

    "전하. 개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개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니? 백성들이 나에게 반기를 들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개경의 백성들은 전하가 오시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지요.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부원배들이 권겸의 집에서 모여 작당을 하는 것이 제 정보망에 걸렸습니다. 전하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서는 똥줄이 타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자들이 요 며칠 다들 얼굴이 환하게 펴진 것이 아무래도 부원배들이 전하를 시해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개경에 있는 군사들로는 도저히 날 막을 수가 없을 텐데?"

    "정확한 방법까지는 소인이 모르겠사옵니다만 전하를 시해하기로 결정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를 반성하고 살려달라고 빌어도 시원찮을 마당에 날 시해하기로 작정을 했단 말이지?"

    살기가 감도는 눈빛으로 중얼거린 왕기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천지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무지는 내명을 받거라."

    - 풀썩.

    왕기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은 무지가 공손히 대답했다.

    "무지 여기 있사옵니다. 전하."

    "살생부는 이미 완벽하게 파악이 되어있겠지?"

    "그렇습니다. 전하. 소인의 머릿속에 완벽하게 담겨있사옵니다."

    "개경에서 말을 달려 하루 만에 왕복이 가능한 곳에 있는 부원배들의 가문이 몇이나 되느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무지가 대답했다.

    "18가문이옵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고려의 모든 부원배들을 정리한다. 무지 넌 기병대를 50씩 나누어라. 그런 다음 그들에게 자신이 맡은 부원배들의 가문으로 달려가서 살아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해. 그런 후 재물과 식량을 챙겨 개경의 만월대로 돌아오라고 명하거라. 넌 나를 따르도록 하고."

    "존명!"

    "신라면은 어디 있느냐?"

    신라면이 달려와 냉큼 무릎을 꿇자 왕기가 명을 내렸다.

    "향도들 중에서 개경 지리에 밝은 자들을 기병대에 딸려보내거라. 길 안내를 하며 행여 죄 없는 다른 가문을 치지 않도록 재차 확인을 하게 만들고.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존명!"

    신라면이 다급히 무지가 기병대를 나누고 있는 쪽으로 뛰어가자 왕기가 무장과 척무관을 불렀다.

    "너희들은 지금 즉시 남은 기병대 100명과 함께 말을 달려 개경의 만월대로 향한다. 중간에 쉬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너희들이 할 일은 간단하다. 애꿎은 백성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만월대를 둘러싸고 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한 채 내가 오기를 기다리거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존명!

    척무관과 무장이 달려가자 왕기가 주변을 둘러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따르는 백성들은 짐의 말을 잘 듣거라. 말이 없는 고려의 백성들은 쉬엄쉬엄 개경까지 걸어오도록 하거라. 말을 탄 벽력가의 무인들과 부인들은 나와 함께 개경으로 달려갈 것이니라. 단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짐과 왕실을 욕보이는 자는 내가 직접 목을 칠 것이니라."

    - 알겠사옵니다. 전하.

    백성들을 뒤에 남겨두고 말에 올라탄 왕기가 개경을 목표로 부인들과 함께 달려가기 시작했다.

    [개경의 만월대]

    하늘도 오늘 적지 않은 피가 뿌려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피처럼 새빨간 노을이 개경을 완전히 뒤덮어가고 있을 때 말을 타고 도착한 왕기 일행이 길옆에 줄지어 무릎을 꿇고 있는 고려 백성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으며 궁궐이 있는 만월대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만월대 앞쪽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척무관이 왕기를 반겼다.

    "전하. 무장이 기병대를 동원해 사대문을 모두 틀어막았고 여기 남대문만을 남겨두었습니다. 그 바람에 조정에 있는 문무백관들이 모두 남대문 쪽에 모여 있사옵니다."

    척무관의 보고에 왕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척무관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넌 지금 즉시 무장과 함께 중앙군의 본영(本營)으로 달려가 천우위를 접수하도록. 명을 어기는 자는 즉참해버려. 천우위의 수장이 될 너의 무위가 어떤지 그들에게 제대로 보여주란 말이다."

    "존명."

    척무관이 기마대를 이끌고 물러가자 일과시간이 모두 끝나 퇴청을 하기 위해 남대문을 나섰지만 기마대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문무백관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 쉭. 쉬식. 쉬쉬식...

    왕기의 수신호에 맞춰 300에 달하는 벽력가의 무인들이 날랜 경공을 펼치며 문무백관을 엄중하게 둘러싸 버렸다. 독안에 갇힌 쥐 꼴이 된 그런 자들을 향해 왕기가 말을 몰고 다가서자 한 명이 앞으로 용감하게 나서며 외쳤다.

    "공민왕 전하께서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오르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그러자 다른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감축드리옵니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싸늘한 왕기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신은 판삼사사(判三司事) 권겸이라고 하옵니다."

    그 순간 왕기가 저 멀리서 구경하고 있는 고려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무지. 핀심사사 권겸이라고 한다."

    그러자 무지가 내공을 끌어올렸는지 만월대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권겸은 부원배로서 고려의 이익보다 원나라의 이익을 앞세운 자이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 자신의 재물을 축적한 자이기에 죽어 마땅한 자옵니다. 참하심이 마땅할 것이옵니다."

    - 칭. 칭.

    그때였다. 말에 타고 있는 왕기의 옆구리에서 하늘로 튀어 오른 삼삼이와 칠칠이 중에 삼삼이가 벼락처럼 날아가 권기의 몸을 반으로 갈라 죽여버렸다. 불문곡직하고 권겸을 죽여버리자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뛰어나오는 일행이 있었다.

    "전하. 아무리 왕이시라고는 하지만 이러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신하의 죄를 물으시려면 엄연히 지켜야 할 절차가 있고 따라야 하는 법도가 있는 법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따라나온 세명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하는 그대는 누구이고 그대의 뒤에 서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소신은  좌정승(左政丞)인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노책이라 하옵고 제 뒤어 서있는 자들은 저의 세 아들인 노제(盧濟), 노진(盧稹), 노은(盧訔)이라고 하옵니다."

    "더럽게도 많이 해처먹었군. 아비에 이어 아들 셋이 다 중앙 관직에 올라와 있다니 말이야. 하나만 물어보자. 네놈의 아들 중 과거를 봐서 등용된 자가 단 하나라도 있느냐? 그런 아들이 있다면 살려주겠다고 짐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왕기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겠지. 다들 말도 안 되는 음서제(蔭敍制)로 등용된 자들일 것이야. 그러니 네놈이 죽어마땅한 것이야. 무지는 들어라. 노책과 노제, 노진, 노은이라고 한다."

    "그들 또한 죽어 마땅한 부원배들이오니 참하셔야 마땋할 것입니다."

    - 쉬이잉.

    허공에 떠있던 칠칠이가 번개처럼 날아가 네명의 머리통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런 후 왕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잘 들어라. 지금 이 순간부터 짐의 말이 곧 고려의 법도이니라. 그러니 더 이상 법도니 뭐니 따지지 말고 지은 죄에 따라서 순순히 벌을 받도록 하거라. 그리고 음서제도 지금 이 순간부터 폐지한다. 능력이 있는 자는 능력에 맞게 중용될 것이고, 부모 잘 만나서 손쉽게 관직에 올라 백성들의 피 같은 세금으로 녹봉을 받는 개 같은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이야."

    그날 남대문 앞에서 살아남은 고려의 신하는 불과 열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벽력가의 무인들이 내공을 이용해 재빠르게 판 구덩이에 합장되었다. 훗날 고려 백성들이 '부원배총(附元輩塚)'이라고 부르게 될 구덩이를 살아남은 신하 열을 이끌고 빙둘러 지나간 왕기가 자신의 부인들과 함께 곤성전으로 당당하게 이동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신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단하시옵니다. 전하. 속전속결로 그 많은 부원배들을 한꺼번에 다 정리해 버리시다니요. 소신도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죽을까 간이 조마조마했사옵니다."

    "이제 보니 최영 장군이 농도 제법 잘하시는구려. 그대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고려의 충신을 왜 내가 죽이겠소? 늙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부려먹을 작정이니 각오하시구려. 앞으로는 능력이 뛰어나고 고려의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들만이 신하로 등용될 것이오."

    "전하의 밑에서라면 이 최영이 송장이 되어 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기꺼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여 모시겠사옵니다. 근데... 소신에게 당장 두 가지 걱정거리가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부원배들은 음으로 양으로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이옵니다. 그런 자들을 다 죽이셨으니 원나라의 보복이 걱정되는 것이 하나이옵고, 또 하나는 방금 전 죽은 부원배들의 가문에는 적지 않은 사병들이 있사옵니다. 살아남은 자식들도 있고요. 노책에게도 노영(盧瑛)이라는 아들이 하나 남아있지요. 그들이 행여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심히 걱정이 돼옵니다."

    "둘 다 걱정할 필요 없소. 원은 고려에 신경 쓸 여력이 없소이다. 며칠 전까지 원나라에 살다가 온 짐의 말을 믿으시구려. 그리고 부원배의 가문들에게는 이미 기마대를 보내어 모조리 죽이라고 명을 내려놨으니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벌써 손을 다 쓰셨다는 말입니까? 전하의 심모원려(深謀遠慮)에 소신은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 툭. 툭.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최영 장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왕기가 대꾸했다.

    "조금만 참으시구려. 그대를 일 본정벌에 앞장서서 보내어 두 번 다시 왜구 따위가 이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짐이 해줄 테니까."

    "전하. 왜구를 토벌하는 것은 소신의 숙원이자 소원이옵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이 최영 죽을 때까지 전하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명령만 내리시면 타는 불속이라도 뛰어들겠사옵니다."

    "그러면 곤란하지. 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죽은 자를 되살릴 능력은 없으니까. 그대는 짐을 믿고 짐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어느새 곤성전 앞에 도착한 왕기가 방문 앞에 서있는 나인들을 보며 외쳤다.

    "안에 전하거라. 공민왕이 도착해 대비마마와 희빈마마를 뵙고자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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