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76화 (76/171)
  • #76. < 왕기, 마침내 고려(高麗)의 왕이 되다 - 6 >

    [천마산 국방과학연구소]

    재활용을 위해 대불에서 수소 가스를 조심스럽게 다 뺸 후 다시 똘똘 말아 가죽 주머니에 챙긴 왕기가 만월대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신라면과 최무선을 만나 회의를 하고 있었다.

    "전하. 생각보다 왕실 쪽에서 차기 왕으로 전하를 올리겠다고 쉽게 굴복을 해서 다행입니다. 혹시 끝까지 버텨서 유혈사태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말입니다."

    신라면의 말에 왕기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자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벽란도에 한 번씩 온다는 아라비아 상인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고 말이야. 그 이전에 올라간 무거운 짐들을 잘 버티던 낙타가 더없이 가벼운 지푸라기 하나를 더 올리는 순간 버틸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가는 바람에 쓰러져 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무능한 왕실에 대한 고려 만백성들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이지. 조그마한 자극에도 터지기 일보직전인 일촉즉발의 상태라는 뜻이야. 그걸 모를 리가 없어. 물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불의 등장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야. 그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도 갑자기 나타난 대불의 뒤에는 내가 버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버텼다가는 자신들이 화가 난 백성들의 손에 맞아죽을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지. 그 정도의 눈치도 없는 자들이라면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테니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왕실의 경호병들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상태이니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벌벌 떨었겠지. 삶에 대한 집착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백성들보다 그런 자들이 더 지독한 법이니까. 지금은 어쩔 수없이 양보하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반드시 대갚음해 주겠다는 복수심도 한몫했을 테고 말이야."

    왕기의 자세한 설명에 신라면이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전하께서 조사해보라고 말씀하신 자들에 관해 알아낸 것들입니다."

    신라면이 공손하게 내미는 서찰을 챙긴 왕기가 치하했다.

    "고생했어. 짧은 시간 내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닙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자들은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영재라고 소문이 널리 나있는 자들이 많아서 조사에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향도들끼리 전국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알아보기도 힘들지 않았고요."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최무선을 보며 물었다.

    "내가 원나라로 가기 전에 꼭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네. 전하. 일전에 전하께서 주고 가신 재료들을 이용해 박격포탄 개발을 완성했고 시험발사까지 무사히 끝낸 상태입니다."

    "벌써? 어떻게? 발사에 필요한 포열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포신용 재료인 강철을 만들어준 기억이 없는데..."

    "궁하면 통하는 법이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법이지요. 전하께서 만들어주실 튼튼한 포신이 없더라도 시험발사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먼저 포탄에 대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 쿵. 쿵. 쿵.

    최무선이 탁자에 올려놓은 세 종류의 포탄을 보며 왕기가 물었다.

    "두 개는 내가 설계해 준 박격포탄 같은데 저 길쭉한 하나는 뭔가?"

    "장거리 사격용 박격포탄으로 제가 개발한 것입니다."

    "그대가 직접 설계해서 제작했다고?"

    "네. 원리 자체는 기존의 박격포탄과 똑같으니 어려울 것이 없었지요. 먼저 박격포탄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주신 백린이라는 것을 가죽 주머니에 단단히 밀봉해 포탄의 맨 밑부분에 장착합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추진 장약이 되는 것이지요. 포탄이 포열을 통해 미끄러져 내려가면 송곳처럼 뾰쪽한 공이가 정확히 포탄 아래의 가죽 주머니를 관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공기와 접촉한 백린에 불이 붙으면서 화약과 함께 타들어가며 강력한 힘을 뿜어 내어 포탄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거야 이미 내가 설명했던 것이잖아? 박격포탄이 두 종류인 것은 뭔가?"

    "하나는 포탄이 땅에 떨어졌을 때의 충격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튼튼한 성벽이나 적의 진지 등을 부실 때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하나는 시한 뇌관이 들어가 있습니다."

    "시한 뇌관?"

    "네. 전하. 추진 장약에 불이 붙으면 포탄 내부에 빙빙 감겨있는 화약과 연결되어 있는 도화선에도 불이 붙게 되지요. 그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목표지점까지 날아가 지상이 아니라 목표물의 상공에서 자동적으로 폭발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성벽 파괴보다는 인마살상용(人馬殺傷用)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기마대 등을 상대로 아주 유용할 것입니다."

    "수류탄과 같은 원리로군."

    "그렇습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슬쩍 언급해 주신 내용을 참고해 소인이 직접 구현해 보았지요."

    "나쁘지 않군. 나머지 하나는 뭔가?"

    "장약을 삼중으로 채운 것입니다. 첫 번쨰 장약이 터지면서 포탄이 발사되고 허공을 날아가는 와중에 두 번째 장약과 세 번째 장약이 붙타면서 비거리가 좀 더 길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해군용 고려 대포 제2식'인 장거리 대포 개발에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직접 시험까지 해봤다고?"

    "네. 포탄을 제작한 후 포판과 포다리 그리고 포열을 현재 제작이 가능한 쇠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동원해 시험발사를 해보았습니다. 물론 마지막 발사 시에는 사람들을 멀리 물리고 난 후에 한 것이지요. 포열이 박살 나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 결과는?"

    "기존의 쇠로도 3발까지는 정상적으로 발사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포탄이 멀리 날아가지 않더군요."

    "포열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늘어난 탓이겠지. 포탄과 포신의 유격이 너무 넓어져서 압력이 옆으로 새어나가서 그런 것일 거야. 그래서 새로운 강철이 필요한 게지. 강하면서도 질기고 탄력성이 뛰어난 강철이..."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7발째에 포열이 터져버렸습니다. 시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박격포는 전하의 말씀처럼 포수, 장전수, 관측수 3인 1조로 충분히 운영이 가능하며 '직접타격탄'과 '공중폭발탄'을 사용할 수 있으며 장거리 사격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강철만 개발되면요."

    최무선의 말에 왕기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좋군. 아주 좋아. 거기에 두 가지 개념을 더 알려주지. 하나는 '날개탄'이라는 것이다. 안정익탄(安定翼彈)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지. 포탄이 날아갈 때 흔들리지 않도록 꼬리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야. 그럼 정확성이 올라가지. 물론 그러한 세공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야. 하지만 충분히 제작 가능한 개념이지. 또 하나의 개념은 '강선(腔線)'이라는 것이다. 포열의 내부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양으로 홈을 파두는 것이지. 포탄이 목표물에 깊이 박히도록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가게 만들게 말이야. 정권 찌르기를 할 때 관통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주먹을 비틀어주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이지. 이것 또한 포열의 세공이 어려워서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내가 새로운 철강을 개발하면 적용이 가능한 기술들이야."

    "날개탄과 강선이라..."

    - 툭. 툭.

    새로운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 중얼거리는 최무선의 어깨를 두들겨준 왕기가 입을 열었다.

    "사뭇 기대가 되는군. 조만간 그대와 같이 연구개발할 신형 대포가 말이야. 제대로만 개발이 되면 조만간 이 고려가 전 세계를 호령하게 될 걸세. 그대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알아두게나."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다음에 볼 때는 내가 고려의 왕이 되어 있겠지? 그때를 기약하세."

    자리에서 일어난 왕기가 천마산의 국방과학연구소를 벗어나 원나라 대도를 향해 날아갔다.

    [심왕부의 연병장]

    빠르게 대도로 돌아온 왕기가 연병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밤이 깊어가는 연병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거대한 비행선을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연병장 만한 크기의 비행선이었다.

    [심왕부의 가주전]

    방안으로 들어오는 왕기를 보며 노국공주가 물었다.

    "전하, 가신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그렇소. 늦어도 4일 이내에 고려에서 원나라로 보낸 사신단이 도착할 것이오. 물론 날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서찰을 들고서 말이요."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마침내 고려의 왕이 되시겠군요. 이 시대의 정보 전달은 확실히 느려터졌습니다. 당사자인 전하가 직접 오셔야 겨우 소식을 들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철장들에게 구리로 된 전선(戰線)을 계속 만들라고 하는 것이오. 전선만 충분하면 정보 전달력이 놀랍도록 빨라질 테니까."

    "그러한 세상이 곧 오겠지요. 전하. 저녁은 드셨는지요?"

    "아직 먹지 못했소."

    "잘 되었습니다. 그럼 소첩과 함께 시식(試食)을 한번 해보시지요."

    "시식?"

    "네. 전하."

    노국공주가 밖을 보며 소리쳤다.

    "지금 즉시 고려 육군용 전투식량 1호와 2호를 가져오거라. 화로와 물을 담은 대야도 가지고 오고."

    - 뽀글뽀글...

    잠시 후 화로 위에 올려진 놋쇠로 된 대야 속에 담긴 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고 노국 공주가 집게로 물속에서 데워지고 있는 통조림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일전에 전하께서 소첩에게 말씀하셨잖습니까? 전투식량용 볶음밥을 선정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소첩이 조금 손을 봤습니다."

    왕기가 상위에 놓인 통조림 두 개를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이건 통조림 따개가 필요 없는 현대식 통조림이로군, 팝탑 캔(Pop-Top-Can) 방식의..."

    "그렇습니다. 방식의 이름까지는 소첩이 모르지만 전하와 소첩이 현대식 마트에서 흔히 보던 스팸 통조림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지요. 철장들이 통조림 따개를 만들어온 것을 보니 이 시대의 제작 기술도 그렇게 나쁘지 않더군요. 그래서 소첩이 살짝 변화를 줘봤습니다."

    - 딱. 끼이익.

    스팸을 따듯 통조림 윗면에 달린 고리를 잡아당겨 뚜껑을 열은 왕기가 안에 담겨 있던 볶음밥과 삶은 고기와 비슷한 것을 시식해보며 중얼거렸다.

    "맛이 나쁘지 않군."

    "야채가 들어간 볶음밥만으로는 전투 식량으로 부족하지요. 군사들이 전장에서 힘을 내려면 고기를 먹어야만 할 것입니다. 스팸과 똑같지는 않지만 고기를 잘게 갈아서 소금을 친 다음 푹 익힌 소시지 정도라면 전투식량으로는 충분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거리 항해용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이고요."

    "아주 잘하셨소.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세세한 것까지 그대가 알아서 챙겨주니 내가 한결 편해지구려. 역시 나의 정비(正妃)답소이다."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근데... 밖에 있는 비행선은 무엇이오?"

    "전하. 심왕부에는 재물과 식량 그리고 비단과 약재 같은 값비싼 것들이 넘쳐나옵니다. 그걸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원나라에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를 운영하려면 막대한 재물이 소요될 테니까요. 하지만 마차로 일일이 고려로 실어 나르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지요. 그래서 소첩이 거대한 비행선을 설계한 다음 만들라고 지시했지요. '고려 공군용 수송선 제1식'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비록 엔진도 없는 멍텅구리 비행선이지만 일단 짐들을 하늘로 띠울 수만 있다면 전하의 능력으로 충분히 고려로 옮기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요. 한 푼이라도 남기지 말고 다 챙겨가야지요. 심왕부의 모든 재물들을 반드시 고려로 가져갈 것입니다."

    "살림살이는 그대가 하는 게 더 낫겠지. 아주 잘하셨소이다."

    거듭 칭찬을 한 왕기가 볶음밥과 삶은 고기를 먹다가 신라면이 건네준 서찰을 꺼내어 읽어보다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전하. 무슨 일이옵니까? 안색이 안 좋습니다."

    "한 나라를 경영하려면 무신(武臣)만으로는 불가능하오. 문신(文臣)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 나에게 무신은 이미 충분하오. 척무관이 속해 있고 한때 무신정권 시대를 열었던 척씨 가문과 최영 장군이 속해있는 최씨 가문이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하지만 뛰어난 문신은 턱없이 부족한 편이지. 비록 무지가 총명하다고는 하나 그 하나로는 역부족이오. 그래서... 역사 시대 때 배운 고려 말엽의 뛰어난 문신들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소이다. 그대의 기억 속에서 그런 뛰어난 문신이라면 누가 떠오르오?"

    "일단 뛰어난 외교관이었던 서희(徐熙)가 떠오르네요. 선죽교에서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다 철퇴에 맞아 죽었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도 떠오르고요. 정몽주와 나이를 뛰어넘은 막역지교(莫逆之交)를 선보였으며, 새로운 왕조인 조선(朝鮮) 시대를 열었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도 떠오릅니다."

    - 촤르륵.

    왕기가 서찰을 활짝 펼쳐 보여주며 대답했다.

    "그 정도가 다일 것이오.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조사한 것을 보시오. 서희는 죽어서 이미 흙이 된지 오래이며, 정몽주는 이제 겨우 9살이고, 정도전은 이제 겨우 4살이라오.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왔던 문익점 역시 이제 겨우 7살이고. 역사적으로 증명된 뛰어난 문신들이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외다."

    왕기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노국공주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대에 없다면 인재들을 새롭게 키우셔야만 하겠지요. 어차피 전하께서 추구하시는 세상은 조선시대처럼 유교의 세상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불교의 세상도 아니고요. 전하께서는 과학이라고 불리는 고려학의 시대를 활짝 여실 분입니다. 지금의 문신들은 모두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고, 신진 사대부라는 자들도 성리학에 목을 매고 있는 자들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요. 새로운 학문인 고려학의 사조를 활짝 열고 거기에 적합한 인재들을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어느 시대에나 천재들은 존재하는 법이지요. 전하의 입맛에 맞는 인재들이 고려에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당장은 답답하겠지만 그리해야만 하겠지."

    말을 하며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앞으로 50년만 더 버티면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이 세상에 탄생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200년 후의 인물이니 못 보고 죽을지라도 세종대왕은 반드시 보고 죽어야지. 세종대왕 정도의 훌륭한 인물이 있다면 대고려가 날개를 달 것이야.'

    서기 1345년 11월 18일

    빠르게 이틀이 흘렀다. 왕기가 완성된 거대한 비행선에 값비싼 재물을 잔뜩 실은 다음 으슥한 밤중에 비행선을 뒤에서 밀며 고려로 날아가 재물을 숨겼다.

    서기 1345년 11월 19일

    산동의 벽력가를 떠난 사람들이 마침내 심왕부에 도착했다. 뇌전공을 익힌 벽력가의 모든 무인들을 통신대에 집어넣었고 최대한 빨리 훈민정음과 고려어를 익히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왕기의 두 번째 비가 된 벽력가의 왕녀는 기황후의 도움으로 '벽하옹주(霹夏翁主)'라는 호를 받았다. 여춘옹주(女春翁主)에 이어 벽하옹주마저 비로 삼은 왕기는 세 명의 여인들과 밤마다 꿈같은 시간을 보내며 고려로 넘어갈 준비에 매진했다. 비록 노국공주에게 춘하추동으로 네 명의 비를 두면 딱이겠다고 한소리를 듣긴 했었지만 말이다.

    서기 1345년 11월 20일

    고려를 출발한 사신단이 원나라에 도착해 황실로 입궐했다. 곧바로 황실로 불려간 왕기는 자신이 고려의 왕이 되기 위해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꾹 참고 황제인 혜종(惠宗)이 건네준 칙서를 받아들고 심왕부로 돌아가 대장정을 떠날 준비를 마무리했다.

    서기 1345년 11월 21일

    심왕부에서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고려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심왕부의 영지에서 뽑아 일찌감치 군사 훈련을 시킨 천명의 장정들, 노국공주가 지참금으로 받아온 몽골족 병사들로 이루어진 천명의 기마대, 벽력가의 무인들 삼백 그리고 공민왕이 다스릴 고려에서 살고 싶다며 먼 길을 따라나선 고려촌의 백성들까지 기나긴 행렬이 줄을 지어 고려로 출발했다. 마침내 고려의 제30대 왕인 공민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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