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 왕기, 마침내 고려(高麗)의 왕이 되다 - 5 >
대불이 빠르게 날아가고 있는 개경 인근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본격적인 겨울 가뭄이 시작된 건조하고 마른 공기로 가득 찬 하늘이었다. 거대한 대불을 타고서 그런 마른하늘을 달려 박연 폭포에서 정남 쪽으로 빠르게 이동한 왕기가 천마산의 험준한 산세를 순식간에 뛰어넘어섰다.
왕기가 정북 방향에서 개경 시내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건립되어 있는 성균관 인근에 도착하자 그 속도를 급격하게 늦추었다. 하늘을 천천히 이동하고 있는 대불이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는 개경 시내에 등장하자 지상에 있던 사람들이 하늘에 떠있는 대불을 발견하고서는 난리법석을 피우기 시작했다. 대불을 발견하고서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연거푸 절을 하는 사람, 대불을 손가락질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갓난 아기를 안고 나와 하늘로 치켜올리며 대불에게 소원을 비는 사람 등등 다양한 행태를 보이던 사람들의 다음 행동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았다. 성큼성큼 하늘을 걸어가고 있는 대불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불을 타고서 매번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개경 시내를 처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있던 왕기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저 멀리 보이는 만월대 인근에만 제대로 된 집들이 보일 뿐 나성(羅城)의 출입구인 사대문 밖의 개경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겉옷도 없이 홑겹의 옷을 입은 채 추위에 벌벌 떠는 백성들과 어릴 때부터 못 먹고 자랐는지 영양실조에 걸려 멸치처럼 비쩍 마른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시대나 힘없는 백성들만 힘든 법이지. 특히 제대로 된 왕이 없어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이 시대 고려 백성들의 삶은 참으로 처참하구나. 이들을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왕기의 머릿속으로 현대적인 수많은 정책들과 제도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 불 보듯이 뻔했고, 왕기가 실천하기에는 백성들의 교육수준이 떨어져 실제로 적용하기가 난망한 것들뿐이었다. 그 순간 왕기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툭. 툭.
손으로 자신이 타고 있는 대불의 머리통을 두들기며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이 시대는 중세 시대이다. 민주주의니 공화정이니 하는 것들은 다 필요 없어. 오로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철권통치(鐵拳統治)로 부약제강(扶弱制强)의 정치를 펴는 것만이 백성들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시대인 것이야. 부처께서 말씀하셨다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랴고 말이야. 이는 대악(大惡)을 소악(小惡)으로 멸하고 자신이 그 모든 업보를 짊어지고 가겠다는 자기희생적인 정신을 강조하는 것일 것이야. 결심했다. 내 손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고려 백성들의 삶을 결코 이대로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전 세계의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왕기의 마음속에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이 시대에 적합한 가치관과 뚜렷한 이상향의 세계가 세워지고 있을 때 대불의 뒤를 쫓는 사람들의 숫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늘어가고 있었다. 마치 하멜의 피리 소리에 홀린 쥐 떼처럼 셀 수도 없는 숫자의 백성들이 하늘을 걷고 있는 대불의 뒤를 기를 쓰고 쫓아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의 소명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개경의 영안왕부(榮安王府)]
이른 아침부터 영안왕부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실을 당긴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자신들이 구경꾼의 입장이라고 할지라도 당대의 최고 권력자 집 앞에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영안왕부의 정문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행여 병사들이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재빨리 도망을 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군중들 중 일부는 시선이 하늘로 고정되어 있었다. 군중들 속에 섞여있는 신라면을 따르는 향도 무리들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 높여 외쳤다.
"오셨다. 예언대로 마침내 부처님이 보내신 사자가 하늘에서 내려오셨어."
그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신라면의 눈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왕기에게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말로 듣는 것보다 대불의 실물을 눈으로 직접 보니 그 충격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힌 신라면이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하늘에 떠있는 대불과 그 대불을 뒤따르는 수많은 백성들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는 군중들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예언한 대로 부처께서 보내신 사자가 도착했습니다. 고려의 차기 왕은 미륵의 화신인 강릉부원대군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고려를 지켜주시는 부처의 명이며 이를 어기려는 부원배들에게 천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외친 신라면이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찌르며 힘찬 목소리로 선동했다.
"강릉부원대군을 왕으로!"
그러자 신라면을 따르는 향도들도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찌르며 똑같이 외쳤다.
- 강릉부원대군을 왕으로!
군중들 속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간 구호가 하나의 거대한 함성의 되어 영안왕부를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도착한 백성들마저 합류하며 일심으로 외치자 거대한 함성이 노도처럼 영안왕부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 강릉부원대군을 왕으로!
- 부원배들에게 천벌을!
신라면의 선창에 이은 고려 백성들의 후창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며 대불 위에 앉아있는 왕기의 고막을 때렸다.
'신라면이 잘해주고 있군.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제법 소질이 있어. 현대에서 사이비 교주를 해도 성공했을 놈이야. 오른팔만을 들어 올렸다는 것은 기철의 손자가 여기 없다는 뜻이지. 마음껏 천벌을 내려도 되겠군.'
대불을 조종해 지상으로 좀 더 가까이 접근시킨 왕기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인사하듯 대불의 양팔을 흔들며 대불의 고개를 숙여 영안왕부 경내를 살펴보았다. 고위 관직의 의복을 입은 기철과 그의 수행원들이 가장 큰 전각 앞에 모여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왕기의 눈에 잡혔다.
그때였다. 대불의 오른손이 몸통에서 이탈해 마치 로버트 태권 V의 로켓 주먹처럼 기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슈아앙...
- 우와아아...
- 부처님의 사자가 천벌을 내리신다.
하지만 대불의 주먹은 군중들의 기대와 달리 힘없이 기철의 일행 앞쪽 땅을 때렸을 뿐이었다. 기본적인 중랑이 부족한 탓인지 그 위력 또한 보잘것없었다. 지켜보던 군중들의 실망스러운 탄식에 땅이 꺼질듯할 때였다. 그 순간 뇌전벽력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린 왕기가 대불의 위에서 손을 들어 아래로 내리쳤다. 그러자 건조한 마른하늘에서 때아닌 번개가 내리쳐 대불의 팔을 강타했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 콰과과과앙...
내부가 수소 가스로 가득 차 있던 거대한 대불의 팔이 번개에 적중하면서 대폭발을 일으켰다. 기철 일행의 몸뚱어리가 산산이 찢어졌고 폭발의 후폭풍으로 그 뒤에 있던 전각들이 단박에 허물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대폭발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때 신라면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 다시 한번 사자후를 터뜨렸다.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부처님의 사자께서 부원배에게 천벌을 내리셨습니다. 우리 모두 만월대로 몰려가 다음 왕은 강릉부원대군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 나라 왕실과 문무백관들에게 똑똑히 알려줍시다. 하지만 부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백성들끼리 피를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다들 폭력을 행사하셔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다들 나를 따라오시지요."
신라면을 비롯한 향도 일행이 앞장서서 가까이 있는 나성의 남대문을 향해 걸어가자, 그 뒤를 수만에 달하는 개경 백성들이 쫓아가기 시작했으며 그런 백성들을 호위하듯 대불이 하늘에 뜬 상태로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남대문을 무사통과해 망월대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남대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하늘에 떠있는 대불이 점점 가까이 접근하자 혼비백산을 해 도망쳤으리라,
[만월대의 연경궁(延慶宮]
금일 중으로 원나라로 떠날 사신단을 위한 환송회를 위해 모여있던 문무백관들이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급보와 밖에서 들리는 어마어마한 함성에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도 귀가 있기에 만월대 밖에서 외치는 백성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강릉부원대군을 왕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외치는 소리가 연경궁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질 때 부원배 중에 하나인 노겸이 문무백관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소식에 따르면 기철 승상이 부처께서 내린 천벌을 받아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하오. 그리고 백성들이 지금 들리는 것처럼 만월대 쪽으로 몰려와 외치고 있소이다. 강릉부원대군을 왕위에 올리라고 말이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소이까?"
그러자 또다른 부원배인 노책이 답했다.
"지금이라도 군사들을 풀어서 백성들을 해산시키면 그만 아니겠소이까? 몇 십 명만 죽어나자빠지면 다들 두려움에 꽁지가 빠져라 도망갈 것이오. 이 나라의 왕위를 어찌 백성들의 협박에 못 이겨 다른 자에게 넘겨준단 말이오?"
그 순간 전날 밤 왕기를 만났던 최영 장군이 입을 열었다.
"부당하외다. 나성의 성벽 밖에 있는 백성들을 막는다면 몰라도 그들은 이미 만월대까지 왔소이다. 만월대는 수만에 달하는 백성들을 막기 좋은 지형이 아니오. 행여 군사를 동원했다가는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형국이 되어 그들이 폭도로 변해 이곳을 덮칠 것이고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외다. 더 중요한 것은 만월대를 지키고 있는 군사들의 사기가 이미 꺾여있다는 것이오. 자리를 비우고 도망친 병사들의 숫자 또한 부지기수이고. 여기 계신 분들도 방금 전 연경궁 밖을 나가 다 보셨을 것 아니오? 하늘에 떠있는 부처의 사자라는 대불을 말이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본인도 다리가 다 후들거리는 판국에 일반 병사들이야 오죽하겠소이까?"
그러자 노겸이 물었다.
"그럼 최영 장군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오?"
"돌아가신 기철 승상이 일전에 한말이 있지 않소이까? 곤성전에 계시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마마와 희비마마의 의중이 어떤지 물어본 다음 정하자고 말이오. 본인 역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겠소이다. 곤성전에 계시는 그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본 다음 결정하면 되지 않겠소?"
- 그러는 것이 좋겠소이다.
자신의 말에 다른 문무백관들이 동의하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최영 장군이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겨 곤성전으로 향하며 뇌까렸다.
'구심점인 기철만 죽고 나면 부원배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이라는 전하의 예측이 정확하구나. 하긴 신념도 없고 고려에 대한 충성심도 없이 자신의 이속만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의리나 절개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지.'
[만월대의 곤성전]
안색이 어두운 대비마마와 희비마마와 면담을 하고 있는 최영 장군이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러자 덕녕공주인 대비가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강릉부원대군 저하께서 직접 친필로 작성하신 각서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두 분과 경창부원군의 안전을 보장하며 죽을 때까지 저하의 보호 속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실 것이라는 약속을 적어둔 각서이지요. 강릉부원대군 저하에 대해서 알아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그 누구보다 약속을 잘 지킨다는 정도는 익히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나와 희비가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
"부처님이 보내신 사자라는 바깥에 떠있는 대불을 두 분도 두 눈으로 직접 보셨겠지요? 강릉부원대군 저하께서 어떠한 재주를 부리셨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것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은 압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부처님의 사자가 이곳에 천벌을 내릴 것이고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평화적인 왕권 이양을 간절하게 원하고 계시지요. 그래야만 왕실의 권위를 지킬 수 있고 그것이 고려의 만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차지할 능력이 없으셔서 참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 순간 경창부원군의 어미인 희비가 입을 열었다.
"장군. 내 강릉부원대군은 잘 몰라도 최영 장군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소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이오. 장군이 보기에 그자가 정말로 약속을 지킬 것 같으시오? 나의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소. 하지만 그자가 왕이 된 뒤에 경창부원군을 시해할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라오."
"희비마마. 믿으십시오. 이것이 최선의 방책이고 강릉부원대군 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보령이 어리신 경창부원군을 견제할 만큼 속이 좁은 분이 절대 아니시니까요. 오히려 경창부원군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실 것입니다. 만약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 최영이 나서서 저하께 대항해 경창대원군과 두 분 마마를 지켜드리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믿음직한 최영 장군의 약속에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잠시 후 곤성전 밖으로 나온 최영 장군이 연경궁으로 뛰다시피해서 이동해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충목왕 전하의 모후이신 대비마마와 경창부원군 저하의 모후이신 희비마마께서 고려의 차기 왕으로 강릉부원대군이 적합하다고 말씀하셨소이다. 그러니 원나라에 보낼 서신을 즉시 수정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그 이후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늘에 떠있는 대불에 타고 있던 왕기가 최영 장군이 밖으로 나와 약속했던 신호인 양손을 하늘로 올려 힘차게 흔드는 것을 보고서는 대불을 조종해 하늘 높이 올라가 버렸다. 그러자 만월대를 둘러싸고 있던 백성들도 신라면과 향도들의 외침에 하나둘씩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강릉부원대군을 고려의 차기 왕으로 추대한다는 서신을 지닌 사신단이 원나라를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