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72화 (72/171)
  • #72. < 왕기, 마침내 고려(高麗)의 왕이 되다 - 2 >

    [심왕부의 가주전]

    주요 간부들만이 모여 있는 가주전의 분위기는 뭔가 기묘했다. 왕기가 직접 주관하는 회의인 탓에 긴장감도 감돌고 있었지만 모여든 간부들이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처음 본 어린아이들처럼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기가 전날 자신이 대장간과 공방에서 뚱땅거리며 만들어놓은 것들이 잔뜩 올려져 있는 탁자를 힐끗 쳐다본 다음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모든 간부들이 지금까지 다들 자신이 맡은 일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노고를 치하한다. 그리고 어제 척무관에게 말한 것처럼 본인이 고려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느니라. 중요한 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다들 정신을 집중하여 이번 회의에 임해주길 바란다."

    - 알겠습니다. 전하.

    씩씩하게 대답하는 간부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왕기가 어느새 머리가 제법 자라 스님인지 속인(俗人)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는 무지를 불렀다.

    "시다바리."

    "네. 전하."

    "지금부터 내가 설명하는 것들을 집중해서 잘 들어야 할 것이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영특한 너라면 내가 한 말들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모든 간부들을 붙잡고 일일이 설명해 줄 여유가 없으니 네가 이해를 한 후 잘 모르겠다는 다른 간부들에게 설명을 해주도록 하거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먼저 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것들은 본인이 발명한 물건들이다. 세상의 이치와 자연만물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는 학문의 결과물인 것이지. 난 그러한 학문을 과학 아니 '고려학(高麗學)'이라고 부른다. 고려인인 내가 시작한 학문이고 내가 다스릴 고려에서 그 꽃을 활짝 피울 학문이니까 말이야. 쉽게 생각해서 실학(實學)이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한 형태의 학문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야."

    "고려학이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제일 먼저 보여줄 것은 시다바리 너에게 아주 중요한 발명품이다. 반야심공과 관련이 있으니까."

    왕기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나무를 깎아 만든 둥근 구에 형형색색의 색깔이 칠해져 있고, 그 가운데에 막대를 집어넣어 빙글빙글 회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건 지구본(地球本)이라는 것이다. 다들 내가 일전에 나의 빠른 경공을 이용해 전 세계를 돌아보고 온 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의 자료를 이용해 만든 것이지. 물론 그 정밀도는 떨어지지만 이것이 바로 너희들이 지금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세상인 것이니라. 본 왕처럼 아득한 하늘 저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너희들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둥근 구의 형태라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이러한 구는 매일 같이 하루에 한 바퀴씩 회전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야."

    왕기가 손을 움직여 지구본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는 시다바리에게 물었다.

    "반야심공에서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더냐?"

    "반일(反日) 방향으로 작용하는 대력(大力)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을 회전시키는 미증유의 힘이지요. 그러한 힘의 작용에 의해 미력(微力)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고요."

    왕기가 시다바리의 눈앞 가까이 지구본을 들이밀며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지구본을 자세히 보거라. 잘 살펴보면 수직과 수평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선이 그어져 있고 각각의 숫자가 매겨져 있을 것이다. 수직으로 그어져 있는 것을 경도((經度)라 부르고, 수평으로 그어져 있는 것을 위도(緯度)라고 부른다. 위도와 경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기준점이겠지요. 그래야만 시작이 어디이고 끝이 어디인지가 명확해질 테니까요."

    "역시 총명하단 말이야. 수평으로 나누어져 있는 위도의 기준점은 구의 중심이다. 구의 한가운데에 수평으로 붉은 선으로 그어져 있는 것이 보이겠지? 이것을 난 적도(赤道)라고 부른다. 그리고 수직으로 나누어져 있는 경도의 기준점은 고려의 개경이다. 개경을 통과하는 선을 기준선으로 잡는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왕기의 손가락이 아무것도 없는 새파랗게 칠해져 있는 더 넓은 바다 위를 짚으며 말했다.

    "위도와 경도만 알게 되면 자신이 이 세상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망망대해인 바다에서도 가능한 것이지. 예를 들어보자. 개경의 경우에는 경도가 0이다. 개경이 기준점이니까. 위도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대략 39도 정도 위쪽에 위치해 있다. 이를 위39북이라고 부르면 되겠지. 그럼 지금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대도는 얼마가 되겠느냐?"

    시다바리가 지구본에 그어져 있는 눈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대도의 위도는 적도보다 북쪽으로 38도 정도 올라가 있으니 위(緯)38북(北)이 되겠군요. 경도는 개경보다 10도 정도 더 서쪽으로 위치해 있으니 경(緯)10서(西)가 될 것입니다."

    "네 말이 맞다. 그런 식으로 읽는 것이니라. 바다 위에서도 마찬가지야. 위도와 경도만 알면 자신이 더 넓은 바다의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목적지까지 최단거리의 바닷길을 찾아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망망대해 위에서 위도와 경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전에 내가 앙리에게 준 육분의(六分儀)라는 것을 기억하느냐?"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면 위도를 손쉽게 측정할 수 있다. 밤하늘의 북극성을 이용해서 말이야. 하지만 경도를 측정하는 것은 좀 더 복잡하지.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를 돈다고 했다. 그럼 1시진에는 몇 도나 돌겠는가?'

    "12시진에 360도를 도니 1시진에는 30도를 돌게 됩니다."

    "바로 그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야. 시간의 흐름에 따른 태양이 이동하는 각도를 측정하면 경도를 측정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정확히 계산을 하는 법을 따로 또 배워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럼 문제점은 무엇이 있겠느냐?"

    "반드시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 위에서도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지구라는 거대한 땅덩어리 위에서는 그 오차가 엄청날 테니까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지."

    왕기가 탁자 위에 사각형의 투명한 통 안에 똘똘 말려져 있는 얇은 철판으로 되어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철판 위에 있는 손잡이 같은 것을 붙잡은 왕기가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 끼리릭. 끼리릭.

    "이게 바로 태엽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감아놓으면 다시 본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힘으로 인해 철판이 조금씩 풀리게 되지. 그러한 힘을 이용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시계(時計)라고 부른다. 시간이 부족해 아직 제대로 된 시계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원리 자체는 단순한 것이야."

    "아... 시계만 있으면 시간을 측정할 수 있고 따라서 바다 위에서도 경도와 위도의 측정이 가능해지겠군요? 그럼 안전하고 최단거리인 바닷길을 찾아서 항해를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고요."

    "그렇다. 그게 바로 조만간 고려의 함선들이 전 세계를 안전하게 누빌 수 있는 대항해 시대를 여는 핵심 기술인 것이야. 조만간 네게 시계와 함께 경도와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정확한 계산식을 알려주마. 대고려 군대의 백인장 이상 고위급 군인들은 지도 한 장과 육분의 그리고 나침반과 시계만 주어지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위도와 경도의 숫자로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른바 독도법(讀圖法)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그것이 불가능한 자는 절대 위로 진급할 수가 없을 것이야."

    말을 하며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은 태엽시계 제작이 어렵다. 이 시대에서 사용하는 철판은 탄성(彈性)이 너무 부족해. 탄성이 뛰어난 스프링강을 제작해야만 한다. 어려울 건 없지. 대포의 포신이 될 강철에 특수 원소 몇 가지를 첨가하고 열처리를 하면 되는 것이니까. 정 안되면 전기로 움직이는 시계를 개발해도 되는 것이고.'

    그 순간 시다바리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혜능 사조의 깨달음이 틀렸다고 말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적도 위쪽에 위치해 있기에 미력은 우향(右向)이 되지만 적도 아래쪽에서는 미력이 반대로 좌향(左向)이 될 것입니다."

    "맞느니라. 그런 이유로 적도에서는 미력이 무향(無向)이지. 따라서 적도 아래쪽 즉 남반구(南半球)에서 발생하는 태풍의 회오리치는 방향은 북반구(北半球) 즉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곳과 반대로 돌게 되어 있다. 그건 그 정도로 넘어가고... 뇌전지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겠다. 뇌전지기란 무엇이냐?'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의 힘을 말하는 것이지요."

    - 딱.

    그 순간 왕기가 핑거 스냅을 하는 소리와 함께 방안에 있는 모든 간부들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너희들이 느낀 찌릿한 기운이 바로 뇌전지기이니라. 난 그걸 줄여서 보통 전기(電氣)라고 부르지. 그러한 전기는 태극(太極)처럼 음의 전기와 양의 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 반대되는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이러한 전기를 물에 흘리게 되면 재밌는 현상이 일어난다."

    말을 하며 왕기가 물이 가득 차 있는 투명한 어항에 담겨 있는 두 개의 금속 막대에 손을 대며 말했다.

    "한쪽은 양극을 띄는 아연 막대이고 한쪽은 음극을 띄는 구리 막대이다. 여기에 전기를 흘려주면 물이 두 가지 성분으로 분해가 되어 각각의 막대에 달라붙게 된다. 각각 수소와 산소라는 것이지. 지금 당장은 이해가 어려울 것이니 일단은 그렇게만 외워둬라. 음극인 구리 막대 쪽에서는 수소 기체가, 양극인 아연 막대 쪽에서는 산소 기체가 발생하게 될 것이야."

    왕기가 전기를 흘리자 각 막대에서 거품이 뽀글뽀글 발생하기 시작했다.

    "보이느냐? 물속에서 뭔가가 생성되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전하. 서로 반대되는 것을 끌어당기는 태극의 원리라고 하면 음극에 달라붙고 있는 수소 기체는 남성처럼 양(陽)의 성질을 띄고 있겠군요? 양극에는 음(陰)의 성질을 띄고 있는 기체인 산소가 발생할 것이고요. 음은 곧 여인을 뜻하니 산소 같은 여자라고 불러도 될 듯합니다."

    - 풉.

    시다바리가 자체적으로 해석한 말을 듣고 있던 승의공주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때 왕기 역시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대꾸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관련된 지식이 부족한 상태이니 지금 당장은 뭐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도 상관은 없겠지. 수소 기체는 네가 해석한 것처럼 남성과도 같아서 강력한 폭발성을 띠고 있으며 엉덩이가 가볍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수소 기체는 자연스럽게 공중으로 떠오르게 되어 있지. 산소 기체는 내조를 잘 하는 여인처럼 불꽃을 더욱 북돋아 주는 성질이 있고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줘서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해준다. 내가 왜 이런 광대 같은 짓을 해가며 보여주고 있는지를 이해하겠느냐?"

    왕기의 질문에 다른 간부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고 있을 때 시다바리만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아래 위로 끄덕였다.

    "네. 전하. 지금 전하께서는 얼마 전에 삼돌이라는 자에게 명하여 제작한 대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그 위에 양가죽을 씌운 비행선이라는 것이 어떻게 공중으로 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위험성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이기도 하지요. 소인이 미욱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수소 기체가 양의 성질을 지니고 있고 엉덩이가 가벼워 공중으로 뜨려는 성질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양가죽 안에 그 수소라는 것을 가득 집어넣으면 비행선이 저절로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겠지요. 하지만 수소 기체는 남자들이 성질이 급해 자주 욱하는 것처럼 강력한 폭발성이 있기에 반드시 조심해서 다뤄야만 한다는 것을 저희에게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승의공주가 감탄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호오... 전하에게 듣긴 했지만 정말 머리가 영특하군요."

    왕기가 승의공주를 바라보며 내 말이 맞지 않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한 후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마지막 발명품을 집어 들었다. 길게 늘어져 있는 선 끝에 얇은 구리 판을 이리저리 구부려서 반으로 자른 깡통 형태의 원통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원통에는 2개의 구멍을 뚫려져 있었으며, 거기에는 길쭉한 형태의 석묵(石墨 : 흑연) 막대가 서로 맞닿을 듯 가깝게 끼워져 있었다.

    "이것 또한 전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기를 이용한 전등(電燈)이라는 것이지. 지금은 시간이 촉박해 조잡하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보다 개선된 것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야."

    왕기가 길게 늘어진 구리 선을 손에 쥐고 전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까이 붙어 있던 석묵의 양쪽 끝에서 옅은 푸른색의 실 무더기 같은 아크가 발생하더니 양쪽이 서로 연결되었다.

    - 파지지직.

    그 순간 방안이 환해질 정도의 밝은 빛이 구리 깡통 안에서 터져 나왔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검증된 실험이니 실패할 리가 없지. 최초의 가로등은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 만든 것이 아니다. 1808년 영국의 화학자인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가 탄소에 전류를 흘리면 빛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 그것을 응용해서 만든 데이비램프라는 것이지. 전류가 흐르고 있는 두 개의 탄소 막대를 가까이 접근시키면 자연스럽게 아크 방전(Arc Discharge) 현상이 일어난다. 야생 서바이벌 프로에서도 본 적이 있어. 망간 건전지 안에 있는 탄소봉을 끄집어 내어 간단히 손전등을 제작하는 것을 말이야. 지금 당장은 필라멘트를 이용한 전구를 만드는 것이 힘들어. 당분간은 이걸 사용할 수밖에 없다.'

    왕기가 전류를 흘렸다 끊었다 하자 방안이 밝아져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감탄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시다바리만이 별빛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사령부에서... 전달한다. 3천의 기마병과 5천의 창병으로 이루어진... 적군이 출몰했다. 적군의 위치는... 위(緯)41.3북(北), 경(緯)1.5서(西)이다. 지금 즉시 무장이 이끄는 돌격대와... 국경을 지키고 있는 고려 제1군단은 적을 막아내기 위해... 즉시 이동하기 바란다. 이동할 장소의 위치는..."

    뭐라 중얼거리던 시다바리가 갑자기 큰 소리로 버럭 외쳤다.

    "전하! 이것은 불빛을 이용한 고려 부호로 완성된 일종의 군령(軍令)이로군요."

    "맞느니라. 이런 식으로 통신을 보낼 수가 있는 것이지. 잘 만 이용하면 개경에서 대도까지 단 일각만에 군령을 전달할 수가 있는 혁신적인 통신 방법이야. 시다바리가 책임을 맡고 있는 통신대에게 전달해라. 며칠 뒤에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내가 직접 시험을 볼 테니 고려 부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자들은 내 손으로 목을 칠 것이라고 말이야. 그동안 고려 부호를 공부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으니 뭐라 변명하지는 못할 것이야."

    "존명!"

    기특하다는 듯 시다바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왕기가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극비에 속하는 것들이다. 다들 입조심하도록.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이제 밖으로 나가서 비행선을 시험해 보도록 하자. 하늘에 제대로 뜨는지 말이야."

    그러자 승의공주가 나서서 건의했다.

    "전하. 가급적이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밤에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날이 너무 밝아 보는 눈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낫겠구려. 잘 모르는 백성들이 비행선을 봤다가는 다들 혼이 나가 천재지변이 일어날 하늘의 징조로 오해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요. 괴물이 나타났나고 난리법석을 피울 것이고."

    심왕부에서 비행선을 시험하기 위해 밤이 찾아오길 기다릴 때 고려의 조정에서는 곤성전(坤成殿)을 다녀온 기철이 자신을 따르는 부원배들을 동원하여 차기 왕으로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 왕저(王㫝)를 추대하기로 결정한 후 이를 원나라 황실에 알리기 위해 원나라로 출발할 사신 일행을 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은 고려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국경을 넘어 원나라 황실에까지 그 정보가 전달되었다. 고랴의 차기 왕위를 두고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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