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69화 (69/171)
  • #69. < 대혼돈(大混沌)의 시대가 도래하다 - 1 >

    왕기가 자신의 근거지인 대도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 때 대륙의 패권과 고려의 운명이 걸린 대혼돈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마교의 원로원]

    마교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참석하는 천마집회(天魔集會)와 달리 교주인 무쌍천마 갈중악과 원로원의 팔마만이 참석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드디어 거사의 날짜가 잡혔다고?"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천마교주 갈중악의 물음에 뇌마(腦魔)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교주님. 섣달 초하루로 잡혔습니다. 그날 한산동과 팔비신장이 강남에서 일제히 봉기를 할 것이고, 거기에 발맞춰 마교는 중원을 향해 쳐들어 갈 것입니다."

    갈중악이 놔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앞으로 약 보름 후면 거사 날이라. 머리가 뛰어난 그대가 알아서 잘 정했겠지만 이유가 궁금하군. 섣달이라고 하면 일 년 중 가장 추울 때가 아닌가? 따뜻한 봄을 놔두고 굳이 이 추운 한겨울에 봉기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지금 이맘때가 강남의 농민들이 먹을 것이 가장 풍족할 때라는 것입니다. 가을걷이가 모두 끝난 상태이고 봄이 오지 않아 내년에 파종할 종자까지 모두 보관을 하고 있는 시기이지요. 원나라에 바칠 세금도 아직 덜 낸 상태이고요. 군량미라는 측면에서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군, 우리쪽 군량미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가?"

    "이곳에 남을 교인들을 먹일 곡식은 내년 가을까지 충분하며 중원으로 진출할 교도들이 먹을 군량미도 6개월 치를 이미 비축해 놓은 상태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6개월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때쯤이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대도를 함락한 상태일 테니까 말이야. 다른 이유는 또 무엇인가?"

    "강남에서 대규모로 한족의 봉기가 일어나면 원에서 군사들을 동원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단순히 마교가 중원 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침공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원나라 군사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기마대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겨울에는 말에게 먹일 풀들이 다 말라죽어서 없습니다. 기마대의 뒤를 미리 말려둔 건초더미를 실은 보급대가 항상 따라다녀야만 하기에 기마대의 진격 속도가 턱없이 느려진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폭설이 내려 눈이라도 쌓이게 되면 기마대의 생명인 돌파력과 기동력이 현격하게 떨어지지요.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시간을 끌며 미루다 가는 반란군의 기세가 죽어 실기할 가능성인 높다는 것입니다. 원에서도 눈치를 채고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고요. 지금쯤이면 원나라 황실에서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챘을 겁니다. 조만간 강남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들이 바보는 아니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네. 우리 쪽의 세부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건가?"

    "마교가 중원 정복에 계속 실패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마공을 익힌 마교 무인들의 특성상 언제나 피에 굶주려 있기에 일반인과 무림인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학살을 자행하는 바람에 중원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민심이 우리 쪽에 있지 않다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마교의 핵심인 교주께서 단독 행동을 하시다가 중원 무림인들의 비겁한 협공에 걸려 죽거나 중상을 입어 불가피하게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고려해 계획을 짰습니다. 섣달 초하루에 십만 대산을 떠나게 될 마교의 무인들을 두 갈래로 나눌 것입니다. 마교의 중원 진출을 막아서는 첨병 역할을 하는 두 문파를 치기 위해서 말이지요."

    "공동(崆峒)과 곤륜(崑崙)이겠군."

    "그렇습니다. 교주님. 두 문파 모두 속세의 문파가 아니라 도교(道敎)의 문파들입니다. 마교의 무공인 각종 마공(魔功)들과 상극이라는 뜻이지요. 공동과 곤륜이 마교를 막아서는 동안 중원의 문파들이 똘똘 뭉쳐 힘을 합치는 게 전통적인 중원 무림의 전략입니다. 따라서 두 문파를 최대한 빠른 시간에 쓸어버린 후 교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영구한 지배를 위해 교인들을 엄격히 통제할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고서 청해(靑海)와 감숙(甘肃)의 무인들만 완전히 씨를 말린 후 대도를 향해 일직선으로 진격해 나갈 것입니다."

    갈중악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계획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군. 교도의 무인들의 많다고 해도 그 숫자가 1만에 불과하다. 얼핏 많아 보이지만 더 넓은 대륙에 뿌리게 되면 한 줌의 모래밖에 되지 않는 숫자이지. 각개격파를 당할 가능성도 있고 말이야. 모든 마교의 무인들은 하나로 뭉쳐서 공동을 치도록 하거라. 하나로 합친 마교의 전력이라면 공동파를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말이야. 곤륜파는 내가 단신으로 가서 개미 새끼 하나 남기지 않고 정리하겠다. 그런 다음 합류하도록 하지."

    마교교주의 말에 뇌마가 펄쩍 뛰었고 나머지 팔마들도 고개를 저었다.

    "교주님의 무공이 막강한 것을 어찌 모르겠사옵니까만 그건 패착에 가까우며, 여태껏 마교가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교의 정통을 이은 곤륜의 무공은 마공과 상극일 뿐만 아니라 곤륜의 늙은이들은 오래 살기로 유명합니다. 교주께서 단신으로 가시게 되면 곤륜산 일대에 은거해 있던 모든 원로 고수들이 뛰쳐나와 떼를 지어 죽기 살기로 덤벼들 것입니다. 행여 교주께서 다치기라도 하시면 이전의 중원 침공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 뱀과 같은 갈중악의 눈에 극악한 마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역대 교주들과 난 많이 다르니라. 난 하늘에 계신 천마의 진정한 힘을 이어받았으니까. 곤륜이 아니라 중원에 있는 모든 무림인들이 떼를 지어 덤벼들어도 난 지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너희들에게 그것을 증명해 줄 것이야."

    천마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는지 말을 하고 있는 갈중악의 신형이 타오르는 검은 불꽃과도 같은 마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칠흑처럼 검은 마기의 색이 한층 더 짙어질 때 갈중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천마무산(天魔霧散)!"

    그 순간 갈중악의 몸이 머리 위에서부터 빠르게 모래처럼 허물어지며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살아있는 사람의 몸뚱어리는 사라지고 순식간에 검은색의 안개 덩어리로 변해버렸다. 그런 갈중악의 몸에서 마치 문어처럼 여덟 개의 안개 줄기가 팔처럼 길게 뻗어 나와 팔마의 목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 이게 무슨.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 말도 안 돼. 사람의 몸이 어떻게 안개로 변한단 말인가?

    - 정신 차려. 교주께서 우리들을 죽이려고 드신다. 다들 반격해라.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팔마 중에 손이 빠르기로 유명한 검마와 창마 그리고 장마가 반격을 가했다. 검마가 순식간에 뽑아서 휘두른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안개 줄기를 베었다. 아니 베었다기보다는 검이 안개를 통과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불어오는 바람을 벤 듯 아무런 걸림도 없이 검마의 검이 통과했고, 안개 덩어리의 머리통 부분을 찌른 창마의 창도 마찬가지였다. 안개의 몸통 부분을 후려친 장마의 막강한 위력의 장풍도 찰나간 안개를 흩뜨려 놓았을 뿐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향해 공격을 한 듯한 양상이었다.

    - 큭. 크윽...

    팔마가 단체로 내지르는 신음성과 함께 여덟 개의 흑무(黑霧) 줄기가 팔마의 목을 휘감아 그들을 공중에 띄웠고, 안개 덩어리에서 윙윙거리는 울림을 동반한 갈중악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본 교주의 무공은 천마신공을 대성해 이미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올랐느니라. 하늘에 계신 천마의 능력을 이어받은 본 교주를 그 어떤 무인도 해할 수 없음이야. 너희들은 본교의 무인들을 이끌고 공동을 치면 되느니라. 곤륜은 본 교주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그러자 안개 줄기에 목이 휘감겨 숨이 막혀가는 와중에도 뇌마가 안간힘을 쓰며 외쳤다.

    - 천마강림(天魔降臨)

    그러자 팔마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만인앙복(萬人仰伏)

    - 스르륵.

    팔마의 목을 휘감던 안개들이 다시 안개 덩어리로 흡수되더니 천천히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자 다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된 갈중악이 살기가 넘실거리는 눈빛으로 명했다.

    "하늘에 계신 천마께서 본 교주에게 명하셨느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의 펄떡펄떡 뛰는 싱싱한 심장을 산 제물을 바치라고 말이다. 교인들에게 본 교주의 명을 전하거라. 중원인들의 피를 보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미쳐 날뛰라고 말이다. 굳이 일반인과 무림인을 구별할 필요도 없다. 제물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본 교주의 무공 또한 더 강력해질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보름 후 다 같이 피의 축제를 벌리도록 하자꾸나. 조만간 천하는 마교의 지배를 받을 것이야."

    교주를 제외한 마교의 최고 고수들인 팔마를 단 일수에 제압하고 역대 그 어느 교주도 달성하지 못했던 천마신공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음을 몸소 증명한 갈중악의 명에 팔마가 오체복지를 하며 흥분한 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 존명(尊命)!

    한편 그 시각 고려. 개경을 둘러싸고 있는 나성(羅城) 안에서는 때아닌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개경의 만월대(滿月臺)]

    만월대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고려 왕조의 궁궐 터를 고려 말엽부터 일컫던 말로 트로트 제목으로도 유명한 '황성옛터'가 지칭하는 바로 그곳이다. 태조 왕건이 태어난 집터 자리에 세운 궁궐 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궁궐 그 자체를 칭하는 용어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만월대의 본궐(本闕)에 해당하는 연경궁(延慶宮)에서 병색이 완연한 어린 소년인 고려의 29대 왕인 충목왕이 어의(御醫)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전하. 아니 되시옵니다. 그 몸으로 어딜 행차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개경의 겨울은 춥사옵니다. 찬바람을 쐬시면 병세가 더욱 악화되실 것이옵니다."

    그러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고려의 왕이 되어 타고난 총명함으로 큰 뜻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선천적인 병약한 몸과 어머니인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섭정으로 인해 연경궁에만 계속 처박혀 어의의 치료만 받고 있던 충목왕이 처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의는 짐(朕)의 말을 잘 들으시오. 짐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해 궁궐 밖으로 그 흔한 나들이 한번 못해봤소이다. 욍이 된 후에도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한 암행(暗行)은 꿈도 못 꾸고 계속 만월대에만 머물렀음을 그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니오? 다행히 오늘은 기침도 잦아들어 이렇게 멀쩡하니 개경 밖을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오. 내가 다스리고 있는 백성들이 어찌 사는지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가 어찌 왕이라 할 수 있겠소? 내가 멀리 나가지는 않을 것이오. 높은 곳에 올라가 개경 시내를 잠시 구경만 하고 다시 들어올 테니 그리 아시오."

    피를 토하는 듯한 충목왕의 말에 어의에 눈에 동정의 빛이 감돌더니 속으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전하의 기침이 평상시보다 잦아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전하의 건강이 좋아지셔서가 아니라 회광반조(回光返照)의 현상이야. 해가 지기 직전 하늘이 잠깐 밝아지듯이, 촛불이 꺼지기 전 불빛이 잠깐 밝아지는 것과 같은 것이지. 밖으로 모셨다가 행여 붕어(崩御)라도 하시게 되면 내 목이 달아날 것이야. 하지만 오랜 시간 전하의 옥체를 치료해왔던 어의로써 전하의 마지막 소원을 어찌 외면하리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정 원하신다면 그리하시지요. 하지만 절대 일각을 넘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어의는 걱정할 필요 없소. 멀리 가고 싶어도 짐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으니까. 망월대의 높은 곳에 올라가 개경 시내만 잠깐 보고 곧바로 돌아올 것이오."

    잠시 후 올해로 보령 9세인 어리디 어린 충목왕이 이자겸의 난 때 척준경이 본궐을 불태우면서 새로이 본궐로 지정된 연경궁(延慶宮)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의와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신이 쭉 지내던 연경궁을 벗어난 충목왕이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을 지나 회경문마저 빠르게 통과한 후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겨 높이가 비교적 더 높은 창합문(會慶門) 앞에 이르렀다.

    "전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어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충목왕이 창합문 옆의 계단을 이용해 돌벽 위로 올라갔다. 마음이 급한지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예를 본채 만채 지나친 충목왕이 서둘러 돌벽 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개경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밤이 깊어져 불이 환한 곳은 많지 않았지만 아직도 화톳불을 밝혀 영업을 하고 있는 주막과 객잔 등이 보였고 초롱을 앞세운 사람들이 돌로 된 다리를 건나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충목왕이 어의에게 물었다.

    "저기 보이는 다리가 혹시 선지교(善地橋 : 지금의 선죽교)이오? 돌로 지어 만든 아름답기로 유명한 다리 말이오."

    충목왕의 말에 어의가 고개를 내빼어 살펴보더니 대답했다.

    "아니 옵니다. 선지교는 이곳에서 보이질 않습니다. 전하께서 보신 다리는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만부교(萬夫橋)라고 하는 다리이옵니다. 달리는 탁타교(橐駝橋)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달리 탁타교라고 부른다고? 다리치고는 이름이 굉장히 특이하오만 그 이유가 있소?"

    "발해라는 나라를 잘 아실 것입니다. 고려와 같은 민족이 세웠던 나라이지요. 고려를 건국하신 태조 25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이 고려에 화평을 맺자며 사신과 선물을 보내왔었습니다. 하지만 태조께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무도한 나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곱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거란이 보내온 사신 30명을 취조한 결과 그들이 화친을 핑계로 고려를 탐색하러 왔다는 것을 알아내고선 사신들을 모조리 바다 섬에 귀양을 보내고 그들이 선물로 보내온 낙타 50마리를 만부교의 돌다리 아래에 묶어 모조리 굶겨 죽이셨지요. 그 이후로 만부교를 백성들이 탁타교 또는 낙타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옵니다."

    "아... 거란족이라고 하면 요(遼)나라가 아니오? 강성한 무력을 자랑하던 그런 자들이 보낸 사신을 귀양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굶겨 죽인 태조의 그 강인함과 용기가 부럽소이다."

    "물론 그 보복으로 그 이후에 거란족이 고려를 자그마치 두 번이나 침공해 왔지요. 하지만 고려는 서희, 양규, 강감찬 장군 등의 활약으로 거란의 군대를 모두 물리쳤습니다. 고려를 침공하느라 힘이 빠진 요나라는 결국 금과 송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지요. 위대한 고려를 얕잡아본 결과일 것입니다."

    "그건 짐도 잘 알고 있소이다. 짐이 다스리고 있는 이 나라가 그렇게 대단한 나라임을 짐이 어찌 모르겠소? 어의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소."

    "전하. 말씀만 하시지요."

    "짐에게 마지막이 찾아오거든 어의가 책임지고 짐을 태조께서 숨을 거두신 곳으로 옮겨 주시구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짐도 태조와 같은 인물이 될 터이니까."

    "알겠사옵니다. 전하. 소인이 책임지고 그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 콜록. 콜록...

    그 순간 충목왕의 입에서 오늘 하루 잠잠하던 기침이 돌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각혈(咯血)을 하기 시작했다. 입가에 피가 잔뜩 묻은 충목왕이 몸을 휘청거리자 어의가 충목왕의 몸을 황급히 붙잡으며 다급히 뒤에 서있는 궁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전하를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거라."

    "알겠사옵니다. 연경전으로 전하를 모시겠사옵니다."

    그 순간 충목왕을 부둥켜 앉고 있던 어의가 다급히 진맥을 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연경궁이 아니라 신덕전(神德殿)으로 모시도록 하거라. 태조께서 붕어하시며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던 곳이 그곳이니까."

    서기 1345년 11월 14일

    이날 새벽 충목왕이 본인이 지내던 연경전이 아니라 신덕전으로 모셔진 후 보령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지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비틀려 본래의 역사보다 3년 빠른 죽음이었다. 결국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충목왕이 붕어하자 고려가 그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대혼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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