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 산동(山東)의 벽력가(霹靂家)를 방문하다 - 3 >
단숨에 나선형의 계단을 날아서 내려간 왕기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을 인위적으로 깎아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기나긴 복도였다. 한눈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복도 양쪽에는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많은 석실들이 줄지어 서있었으며, 그 석실의 윗부분에는 내부에 보관하고 있는 재료들의 이름이 각각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유황(硫黃)]. [목탄(木炭)], [초석(硝石)]처럼 화약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재료들의 이름들과 [발연제(發煙劑)], [발화제(發火劑) - 음(陰)], [발화제(發火劑) - 양(陽)], [가은(假銀)], [변뇌체(變雷體)] 등의 처음 들어보는 재료들까지 보관하고 있는 마치 거대한 군사물자 창고와도 같은 복도를 보며 '심봤다'를 외치고 싶은 심마니의 심정이 된 왕기가 복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찰칵'하는 기계음과 함께 복도 입구의 바닥에서 제단처럼 생긴 석탁(石卓) 하나가 튀어 올라왔고, 그 위에는 돌로 제작된 보관함이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왕기가 떨리는 손으로 석함(石函)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뇌전벽력수를 창안한 일대종사이자 벽력가의 초대 가주이며 멸망한 서하의 마지막 왕족이었던 이선봉의 자선전 한 권과 연구 개발일지에 해당하는 두꺼운 책자 세 권이 들어 있었다. 왕기가 떨리는 손으로 자서전부터 펼쳐보았다.
[벽력가의 초대 가주인 이선봉이 적는다. 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타고난 천재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세상 만물의 이치에 관심이 많았다.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는 왜 발생하는지 사람들이 누는 소변에서는 왜 냄새가 나는지 등등을 궁금해했었고, 이를 밝혀내기를 간절히 소망했었다. 그런 나는 장차 내가 다스리게 될 서하의 백성들을 위해 많은 것들을 스스로 공부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은 서역에서 발전된 학문인 연금술과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던 연단술이었다......]
연구 일지에 해당하는 복잡한 내용들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자서전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빠르게 책장을 넘기며 읽어가고 있던 왕기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자신이 과거로 넘어오면서 고민하던 많은 문제들의 해답이 책자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기가 정신없이 책을 읽느라 자신의 뒤를 쫓아온 벽력가의 무인들이 창고 앞쪽을 서성이며 외치는 소리와 왕녀가 명령을 내리는 소리조차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 왕녀님. 창고가 있지만 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 아마도 시험대와 같은 방식으로 열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것도 손대지 말거라. 오로지 벽력가의 가주만이 열수 있는 것들이니까.
왕기가 들고 있는 책자의 책장들이 얇아지며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하의 멸망에 한을 품은 나는 부싯돌이나 횃불 따위가 필요 없는 사용이 간편하면서도 위력이 강력한 벽력탄의 완성을 위해 칭기즈칸이 나를 살려줄 때 챙겨준 서하의 재물을 이용해 막대한 양의 재료들을 벽력가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경쟁자가 따로 없었고 사람들이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재료들이라 모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벽력탄 수백만 개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양의 재료들이었다. 난 그걸 이용해 중원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 손으로 직접 불태워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원나라도 저절로 멸망할 테니까 말이다. 뇌전벽력수를 극성으로 익힌 나의 무공은 강력했으니 그 누구도 날 가로막을 수가 없었고, 그럴만한 도구도 내 손에 이미 들어와 있었으니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인육 장사를 하며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목표를 실천하는 것뿐이었다...]
'뇌전벽력수를 창안한 자가 중원에서 대규모 살육을 저질렀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왕기가 책자의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그런 나를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부처였다. 사흘 연속 꿈속에서 나타나 나를 말린 것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아수라(阿修羅)의 길이기에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며, 설사 지옥에서 벗어나더라도 두 번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말렸지만 난 설득되지 않았다. 지옥에 가면 어떻고 죽은 후 축생이나 벌레로 다시 태어나면 어떤가? 내 손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난 두렵지 않았다. 내가 개발한 벽력탄이 항주의 성벽을 무너뜨릴 때 난 나로 인해 발생한 인세의 지옥도(地獄圖)를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항주가 몽골군에 점령당한 후 몽골군에 의해 수많은 한족들이 죽어나갔고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한족들이 자신들이 세운 송나라의 멸망에 안타까워하며 몽골족의 지배를 거부해 항주 시내를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물 위에 떠오른 시체가 물고기의 숫자보다 더 많을 정도였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한 광경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단지 숫자가 좀 더 많아졌을 뿐 서하가 멸망할 때 익히 봤던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동족을 스스럼없이 학살하는 사람이라는 족속에게 환멸을 느낀 내가 결정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사흘째 되던 날 부처가 날 설득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말 때문이었다...]
'왜 자꾸 부처와 엮이는 거지? 난 분명히 천제(天帝) 환인(桓因) 때문에 과거로 넘어온 사람인데 말이야.'
고개를 갸우뚱한 왕기가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내가 죽은 후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할 구원자가 나타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이 세계에 구현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개발하고 발견한 것들을 그 누구보다 잘 활용할 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자가 서하를 다시 재건해 줄 거라는 말도 하였다. 설마 부처가 거짓을 말하랴는 생각에 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벽력가에 처박혀 후세에 올 구원자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며 미진했던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해 하나둘씩 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 이 책을 보고 있는 자는 부처가 말한 이 세상의 구원자이며 아마도 미륵의 환생일 것이다. 부디 내가 남긴 것들을 잘 활용하여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 같은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길 바란다.]
'이게 뭔 개소리야? 조만간 대규모 정복전쟁을 일으킬 나에게 세상에서 전쟁이 없어지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부처가 말했다는 극락정토는 또 뭔 헛소리야? 난 단지 고려를 부흥시키기 위해 과거로 끌려온 것뿐이라고.'
잠시 복잡한 심경을 정리한 왕기가 세 권에 달하는 초대 가주의 연구 일지를 들고서 제단에 앉아 탐독하기 시작했다.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그리고 빠르게 사흘이 흘렀다.
서기 1345년 11월 13일
지난 사흘간 연구 일지에 매달려 안에 있는 내용들을 파악하고 거기에 따른 재료들을 창고에서 꺼내어 일일이 직접 실험을 해보던 왕기가 온몸에 가죽 주머니를 주렁주렁 맨 채 왕녀를 찾아갔다.
"가주. 떠나시려는 것이옵니까?"
"그렇소.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이만 떠나야만 하겠소. 왕녀께서 날 가주로 인정하신다면 내 명령을 따르시오."
"당연히 가주의 명령을 따라야지요.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지하에 보관되어 있는 창고로 가는 입구는 나만이 열 수 있소이다. 창고 또한 마찬가지이고. 도난이나 약탈의 우려가 없으니 왕녀는 이곳을 지킬 몇 명의 무인만을 남겨두고 세가의 식솔들을 이끌고 벽력가의 거처를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시오."
"어디로 옮기면 되는 것이옵니까?"
"대도에 가면 이전에 하북 팽가가 있던 자리에 심왕부가 있소이다. 내가 써준 서찰을 들고 사람들을 이끌고 그리로 찾아가시오. 심왕부는 넓으니 사람들이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이외다. 조만간 내가 고려의 왕으로 올라서면 심왕부의 모든 인원들은 고려로 넘어가게 될 것이오. 그대들 또한 마찬가지이고."
"그리하겠사옵니다. 가주."
벽력가를 통째로 심왕부로 이전하라고 지시를 내린 왕기가 떠돌이 보따리 장사치처럼 주렁주렁 가죽 주머니를 매단 채 다시 고려 땅을 향해 날아갔다.
[벽란도에 위치한 최무선의 집무실]
야근을 하는지 밤이 으슥한 시간에도 집무실에 남아 있는 최무선을 찾아간 왕기가 그간의 진행사항을 물었다.
"현재 국방과학연구소가 들어설 대지의 매입은 끝났습니다. 사람들을 동원해 전하께서 말씀하신 연구소를 짓고 있는 중이지요. 물론 대장간과 함께 쇠를 녹이는 용광로도 건설 중에 있고요."
"벌써 말이오? 내가 떠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지금의 고려는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입니다. 자고로 '매귀추마(買鬼推磨)'라고 하였지요. 귀신에게 맷돌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 재물인데 땅 사는 것이 힘들 것이 있겠사옵니까?"
"어디에 짓고 있는 것이오?"
"향도들과 신라면이 말하는 성지(聖地)에 짓고 있는 중이지요."
"성지?"
"네. 전하. 향도들이 미륵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는 전하께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천마산 일대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박격포와 대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근처에 물이 있어야 할 것이고 폭음이 시도 때도 없이 들릴 것인데 천마산에 있는 박연 폭포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줄 것이라 생각되어서 저도 찬성을 하였습니다. 자세한 진행 사항은 여기에..."
최무선이 내미는 책자의 겉표지에는 한글로 또렷하게 '연구일지'라고 적혀 있었다.
"영리한 자는 하루 만에 익힐 수 있다는 전하의 말씀이 맞더군요. 저와 신라면은 하루 만에 훈민정음을 다 떼었습니다. 평상시에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던 것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되니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지요. 혹시 뜻이 헷갈릴 것들은 자세히 주석을 달았고요. 훈민정음은 미륵불의 선물이며 이것을 배워야만 미륵에 의해 구제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향도들도 열심히 공부 중에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이미 훈민정음을 다 익힌 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중이지요. 놀라운 일입니다. 까막눈인 자들이 단 며칠 만에 고려어를 줄줄 글로 써서 서로 간에 필담을 나눌 정도이니까요."
빠르게 연구일지를 훑어본 왕기가 치하를 하며 가죽 주머니를 풀기 시작했다.
"수고가 많았소. 본인도 그동안 놀고 있지 않았소이다. 그대가 원하는 재료들을 구해왔으니 살펴보시길 바라오. 최상급의 유황과 목탄 그리고 초석이외다. 그리고 이건 발화제를 만드는 재료들이오."
"발화제라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공기와 접촉하면 스스로 열을 내어 불꽃이 피어나는 물질을 말하는 것이오. 난 그것을 '백린(白燐)'이라고 따로 부르고 있소이다.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사람의 소변에서 나온 것이지."
"놔두면 저절로 불이 나는 것이 사람의 소변에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맞소이다. 사람의 소변을 대량으로 끓이게 되면 밤에도 빛을 내는 형광물질이 남게 되오. 그것을 난 '인(P)'이라고 부르고 있소이다. 그러한 인을 재료로 하여 뛰어난 연단술사가 개발한 것이 발화제라오. 그냥 보관하면 불이 나기에 보통 때에는 발화제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로 분리되어 나누어져 보관되어 있소이다. 그 두 가지와 물을 적절한 비율로 섞은 후 하루를 재어두면 발화제가 될 것이오. 단 그때는 사전에 단단히 밀봉을 해야만 할 것이오. 그냥 놔뒀다가는 저절로 불이 붙고 말 테니까 말이오. 자세한 것은 내가 건네주는 책자를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오."
왕기가 건네주는 책자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최무선이 빛나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그럼 문제 하나는 해결이 된 셈이로군요. 주변에 불씨가 없어도 발사되는 포탄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오. 다른 방법도 구상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 백린이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 이제 남은 것은..."
"내부에서의 폭발을 견딜 강인한 포신의 개발이지요. 그것마저 갖춰지면 전하께서 원하시는 박격포와 장거리 포격용 대포를 얼마든지 제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건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소. 설명을 해준다고 해도 만들 수 있는 자가 없을 테니까 말이오. 그러니 경험이 많고 기술력이 뛰어난 철장(鐵匠) 몇 명을 구해서 연구소에 데리고 오시오. 단 너무 많은 숫자는 곤란하오. 그런 철장들은 나라의 재산이니 조정에서 문제를 삼을 테니까."
"알겠사옵니다. 전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고려 땅에서 가장 뛰어난 철장들을 데려다 놓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왔을 때는 천마산에 지어져 있는 국방과학연구소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구려."
왕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최무선이 큰 절을 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이 최무선과 신라면이 목숨을 걸고 반드시 만들어 놓겠습니다."
벽란도를 떠난 왕기가 대도로 방향을 정하여 날아갈 때 세상이 급변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적자로 선정된 천마교주 갈중악과 이시카가 막부의 후계자인 이시카가 요시아키라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제대로 각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려에 있는 충목왕의 병세가 겨울이 깊어지자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