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67화 (67/171)
  • #67. < 산동(山東)의 벽력가(霹靂家)를 방문하다 - 2 >

    왕기가 전력을 끌어올렸는지 전신에서 튀던 스파크가 점점 강렬해지더니 허공에서 번개처럼 작렬했고, 온몸에서 튀어나온 그러한 번개들이 하나로 엮이며 마치 새장처럼 왕기의 전신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장 안의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전자와 양전자를 가진 이온으로 분리되어 플라스마 상태로 바뀌면서 왕기의 신형이 조금씩 공중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녀가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초대가주께서 기록해 놓으신 뇌전벽력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발생한다는 뇌전부공(雷電浮空)의 경지."

    '뇌전벽력신공에 의해 부상 현상을 언급해 놨다는 것을 봐서는 초대가주란 자가 달성한 경지가 나 못지않았던 모양이로군. 하긴 본인이 직접 창안한 무공이니까.'

    속으로 뇌까리며 자신이 뇌전벽력수를 완벽하게 익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왕기가 내공을 거두며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본인의 말을 이제 믿을 수 있겠소? 나를 시험대라는 곳으로 데려다주시오."

    "알겠습니다. 사람들을 소집하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왕녀가 방 한구석에 놓인 나팔과도 같은 가늘고 길쭉한 관 형태의 악기 쪽으로 걸어갔다.

    "이건 '둥첸'이라고 부르는 악기입니다. 큰 관이라는 뜻이며 길이가 무려 1장이 넘어가는 악기로 바깥에까지 이어져 있지요. 서하 시절 양을 치느라 사방에 널리 퍼져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불던 악기입니다."

    - 부우우웅...

    알프스 지방에서 사용되던 알프혼(Alphorn)처럼 저음의 둥첸 소리가 산동벽력가 전체에 울려 퍼질 때 현대의 TV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둥첸이 티베트 등지에서 불교 행사 때 주로 사용되는 악기라는 것을 알아챈 왕기가 물었다.

    "서하의 국교가 혹시 불교였소?"

    "당연하지요. 강족(羌族)의 발원지는 서장(西藏)이니까요. 목축을 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다가 본거지를 감숙(甘肅)쪽으로 옮겨 결국 서하라는 나라를 건국하긴 했지만 그 뿌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는 서장(西藏)에 있습니다. 벽력가에서 둥첸이 울리는 경우는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지요. 초대 조사께서 만든 시험대에 도전할 자가 나타났을 경우입니다. 시험대를 작동시키기 위해 뇌전공(雷電功)을 익힌 모든 무인들이 집결할 겁니다."

    최근 불교와 관련된 자들이 자신과 자꾸 엮이는 것에 의구심을 가진 왕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뇌전공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초대 가주께서 남기신 뇌전벽력수는 불가해무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이치가 너무나 어려워 여태껏 익힌 자가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제 앞에 계시는 고려검황이 처음이지요. 하지만 본 세가에서는 그나마 손쉽게 익힐 수 있는 뇌전공이라는 것이 따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벽력가가 오대세가에 든 것은 오래되지 않았지요. 서하가 멸망한 것이 불과 118년 전이니까요. 하지만 재고로 남아있던 벽력탄과 뇌전공을 익힌 무인들이 버티고 있기에 오대세가에 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뇌전공이라는 것은 뇌전벽력수의 다운그레이드 버전 같은 것이로군. 뇌전지기를 익힌 병사들을 대량으로 육성하기에 딱이겠어.'

    왕기가 속으로 뇌까릴 때 둥첸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방 밖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고 왕기와 왕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감각을 끌어올려 한곳에 집결한 100여 명의 벽력가 무인들을 살펴본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뇌전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나에 비하면 그 경지가 미비하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무인들이라기보다 차라리 인간 배터리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겠어. 생각보다 써먹을 데가 많겠는걸.'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단전에 제각기 뇌전지기를 품고 있는 무인들과 함께 왕녀의 안내를 받은 왕기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험대가 있다는 곳으로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며 왕기가 물었다.

    "오대세가치고는 무인들의 숫자가 적은 편인 것 같소이다?"

    "서하의 재건을 꿈꾸며 멸망한 왕실의 후예인 절 따르는 강족들 중에서도 충성심이 강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들로만 제자를 뽑으니까요. 뇌전공이 비록 뇌전벽력수보다는 쉽다고 하나 강호에 널리 퍼져 있는 무공들과 그 궤를 달리하기에 익히는 것이 결코 만만한 무공이 아닙니다. 재능이 있는 자들 중에서도 열에 한 명꼴로 익히는 데 성공하다 보니 그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구려."

    그 순간 왕기의 머릿속에는 뇌전공과 벽력가의 무인들을 활용할 다양한 방법들이 샘솟듯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런 왕기의 눈앞에 초대 가주가 만들었다는 시험대가 들어왔다. 그건 돌로 제작된 석실에 놓여 있는 단순한 바위 덩어리였다. 단지 그 크기가 집채만 하다는 것을 빼고는 평범한 노산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직사각형의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석실 정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석실의 양쪽 벽에는 자동차 핸들 같은 둥그런 손잡이들 수십 개가 줄지어 설치되어 있었다.

    "전해져 내려오기로 이 시험대는 지금은 멸문한 제갈세가의 가주와 초대 가주가 머리를 맞대고 설계해서 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갈세가의 십면매복진(十面埋伏陳)에 들어갈 벽력탄을 대가로 주고서 말이지요. 다들 손잡이를 돌려라."

    왕녀의 말에 지하실까지 따라온 무인들이 벽에 붙어있는 손잡이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힘차게 돌리기 시작했다.

    - 끼익. 끼이익...

    내공을 지닌 백여 명에 무인에 의해 수십 개의 손잡이들이 일제히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바닥에서 솟아올라 조금씩 천장 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천장이 자신의 집인 양 직사각형의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높이 솟아오르자 왕기의 눈에 새롭게 몇 가지가 들어왔다. 하나는 바위 덩어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뒤쪽 벽에 초대 가주가 새겨놓은 글귀였다.

    - 난 벽력가를 세운 초대 가주 이선봉이라고 한다. 여기에 설치된 시험을 통과한 자는 세가의 주인이 될 것이니라. 본인이 힘들게 모은 재물과 벽력탄 제작에 필요한 각종 재료들을 모두 가질 것이며, 가주로 등극하여 벽력가를 통솔하게 될 것이다. 이는 초대 가주의 유훈이니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음이라. 시험방법은 간단하다. 글귀가 새겨져 있는 벽 아래의 네모난 구역에 내공을 흘려 넣어 3장(10m) 뒤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의 자물쇠를 해제하면 되는 것이며 주어진 시각은 일각에 불과하다.

    글귀를 빠르게 읽은 왕기가 뒤쪽 벽에 새겨져 있는 네모난 형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위 덩어리가 올라간 바닥에 새겨져 있는 발자국 모양의 형상도 발견했다.

    '저기에 서서 벽에 손을 대고 내공을 주입해 자물쇠를 해제하라는 건가 보군,'

    그때 왕기의 눈에 오래되어 색이 바래긴 했지만 발자국 주위에 흩어져 있는 붉은색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자 왕기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천장으로 올라간 바위의 밑부분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바위에 의해 마치 쥐포처럼 짓눌려 형체도 없이 바스러져서 달라붙어있었지만 그건 분명 살아있던 사람이 피떡이 된 흔적이었다.

    "으음..."

    왕기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올 때 옆에 있던 왕녀가 설명을 해주었다.

    "벽력가 출신의 도전자들이 몇 번의 도전을 한 결과 알아낸 것들입니다. 발자국 위에 서서 네모난 형태로 얕게 파여져 있는 벽의 손바닥 모양이 새겨져 있는 곳에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일각이 되면 천장에 있는 바위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지요. 그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 세가에서 네모난 형태의 벽을 파보려고 시도했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일정 이상으로 파고 들어가면 이 일대에 묻혀있는 벽력탄이 일제히 터져 노산이 붕괴될 것이라는 초대 가주의 기록이 남겨져 있기에 포기를 하였습니다."

    그 순간 왕기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의 내공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무려 7갑자가 넘어가는 내공을 가지고 있지만 '격산타우(隔山打牛 : 산을 사이에 두고 소를 때린다는 뜻)'의 수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격공장(隔空掌)의 한계는 잘해야 1장이다. 그 이상은 아무리 나라도 무리야. 이건 뛰어난 내공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뇌전벽력수의 창시자답게 전기의 특성을 이용한 시험인 것이지.'

    왕기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문제는 두 가지이구려. 하나는 일각이라는 주어진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여 계속 집중을 할 수 있느냐는 것과 벽에 진기를 흘려보내 3장 뒤의 자물쇠를 과연 풀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겠지. 근데 본인이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물어보시지요."

    "뒤쪽 벽의 재질도 혹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소? 그 정도 조사는 벽력가에서 해봤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말이오."

    "벽의 두께는 두껍지만 재질 자체는 사암(沙巖)으로 되어 있습니다. 파내기 딱 좋으니 어디 한번 파보라는 듯이 말입니다.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지요. 벽력가 출신이 아니라면 벽력탄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멋모르고 파내다가 노산의 붕괴와 함께 모조리 산 채로 매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초대 가주께서 벽력탄의 위험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었기에 취한 조치라고 생각됩니다. 벽력가 출신이 아닌 자의 손에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재물과 재료들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때였다.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의 왕기가 성큼성큼 걸어가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틀림없다. 이건 반도체(半導體)의 특성을 이용한 시험이야."

    바닥에 새겨져 있는 발바닥 모양에 발을 가져다 댄 왕기가 벽 쪽으로 팔을 쭉 뻗으며 빠르게 뇌까렸다.

    '화강암은 전기가 흐르지 않는 부도체이다.  아주 얇은 두께라면 몰라도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전기를 통전시킬 수는 없어. 하지만 사암은 이야기가 다르다. 주 성분이 규소(Si)이니까. 규소는 현대에서 사용되는 반도체의 주재료라고. 가해진 전압에 따라 부도체에서 도체로 바뀌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불순물이 들어가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초대 가주가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찾아냈을 것이 분명해. 여기에 설치되어 있는 벽은 그러한 연구의 결과물일 것이다. 만약 내 예상이 틀린다면... 난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벽에 내공을 전력으로 쏟아부으면서 떨어지는 바위 덩어리를 막아낼 수는 없어. 간신히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나와 벽력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장이 날 것이야.'

    "흐흡..."

    심호흡을 한 왕기의 표정과 눈빛이 차분해졌다. 그리고는 손을 쭉 뻗어 벽에 가져다 붙였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여왕이 사형집행자의 선고처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사험을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일각의 시간을 재겠습니다."

    - 탁.

    누군가가 들고 온 모래시계가 뒤집히는 소리와 함께 뇌전벽력신공에 의해 발생된 막대한 양의 전기가 벽 속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전기가 사암 안으로 침투를 하지 못하자 왕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척무관이 그토록 강조한 명경지수의 마음을 곧바로 다시 되찾으며 안정됐다.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서 있는 왕기의 몸 주변에서 끊임없이 벼락이 치기 시작했고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내공을 보충하기 위해 선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반각이 지났습니다."

    다급한 왕녀의 외침 속에 마침내 사암 속으로 조금씩 전기가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복잡한 미로를 통과하듯 사암 속으로 파고든 뇌전지기가 자신의 특성에 따라 최단거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갈지자를 그리며 사암 내부를 떠돌아다니던 뇌전지기가 삼장에 달하는 벽을 통과하기 위해 열심히 내달릴 때였다.

    "반에 반각입니다. 곧 바위 덩어리가 떨어질 것입니다!"

    숨이 넘어갈 듯한 왕녀의 외침이 들리는 순간 왕기는 사암을 완전히 관통한 자신의 뇌전지가가 뭔가를 강하게 때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 찰칵.

    전등 스위치를 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왕기가 손을 대고 있던 벽 전체가 마치 자동문이 열리듯 천천히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왕기의 눈에 캄캄한 암흑 속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의 계단이 보였다.

    그 순간 왕녀의 우렁찬 목소리로 석실에 울려 퍼졌다.

    "고려검황께서 초대 가주가 만든 시험대를 무사히 통과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고려검황께서는 벽력가의 가주가 되실 것이며 본녀를 포함한 세가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왕녀의 외침을 깔끔히 무시한 왕기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나선형의 계단을 향해 홀린 듯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시험을 통과하면서 벽력가의 초대 가주가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인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보물섬을 발견한 사람처럼 두근거리는 심정의 왕기가 어두컴컴한 지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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