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66화 (66/171)
  • #66. < 산동(山東)의 벽력가(霹靂家)를 방문하다 - 1 >

    산동반도(山東半島).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산동이라고 부르는 이 반도는 아득한 과거에는 대륙이 아니라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황하의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이는 바람에 바다가 습지대로 변하면서 대륙과 연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넓은 습지대를 바탕으로 양산박(梁山泊)이 활약했던 전설이 머물고 있는 이 산동반도에는 유명한 산이 2개가 있으니, 그중 하나가 각종 시조에서 허구한 날 등장하는 높은 산의 대명사 격인 태산(泰山)이다. 하지만 실제로 태산의 높이는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다. 습지대가 마르면서 생긴 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높아 보이는 착각을 일으킬 뿐이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산이 있으니 예로부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노산(崂山)이다. 근대에 독일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바람에 물맛이 좋은 이곳에 맥주 공장이 들어섰고, 그 결과 현대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칭다오 맥주가 탄생하게 된 청도(靑島)에 위치해 있는 이 노산에 오대세가 중에 하나인 산동벽력가가 위치해 있었다.

    개경을 떠난 왕기가 청도에 도착한 것은 불과 일식경(一食頃)만이었다. 청도에 도착한 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벽력가를 찾아온 왕기가 노산 중턱에 각종 전각들이 대규모로 들어서 있는 벽력가를 보고서 처음 느낀 건 이질감이었다. 위력이 뛰어난 화약을 이용한 벽력탄의 제조와 초대 가주가 창안한 뇌전벽력수의 전설이 서려있는 벽력가의 모습이 무림의 세가라기보다는 마치 특정 종교를 따르며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폐쇄적인 사원(寺院)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중에서 잠시 산동벽력가를 감상하고 있던 왕기가 중얼거렸다.

    "자고로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으니 최대한 정중하게 방문을 해야겠지?"

    최무선에게 전해줄 벽력탄과 초석 또는 뛰어난 화약 제조법이 반드시 필요한 왕기가 벽력가의 정문 앞으로 조용히 낙하했다. 그런 왕기의 눈에 거대한 정문 양쪽 기둥에 붙어있는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한자로 적은 산동벽력가(山東霹靂家)였고, 다른 하나는 왕기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문자로 쓰여 있었다.

    '한자와 비슷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 한자는 아니다. 그럼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여긴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 순간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이 달려와 하늘에서 떨어진 왕기에게 자신들의 무기를 들이대며 물었다.

    "어디서 온 누구이냐? 정체를 밝히거라."

    다행히 말이 통하자 한시름 놓은 왕기가 입을 열었다.

    "본인은 고려인으로 벽력가에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그 순간 무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본 세가는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썩 돌아가거라. 고려 오랑캐 따위가 와서 하는 부탁을 들어줄 것 같으..."

    - 쉬이웅.

    그 순간 파공음과 함께 순식간에 검집을 벗어난 칠칠이가 대장의 목을 단숨에 자르고 지나갔다. 칠칠이를 머리 위 허공에 둥실 띄워 무사들을 겨냥한 왕기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호 무림에서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같은 뜻이지. 본 검황의 철칙을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 본인은 고려인이며 벽력가에 부탁을 할 것이 있어서 찾아온 고려검황이라고 한다."

    그러자 무인들이 호들갑을 떨며 정문에 걸려있는 비상종을 두들기며 외쳐대기 시작했다.

    - 뎅.뎅.뎅...

    - 일황인 고려검황이 나타났다.

    - 고려검황이 대장의 목을 잘라버렸어.

    - 어서 빨리 왕녀(王女)에게 보고해야만 한다.

    그리고는 무인들 중 몇 명이 벽력가 안으로 다급히 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주가 아니라 왕녀에게 알린다고?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더니 갈수록 의문이 쌓이는군. 뭐 수틀리면 핵심 인물들만 빼고 다 죽여놓은 다음에 부탁을 해도 되겠지.'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정문이 활짝 열리며 한 여인을 필두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하게 한판 드잡이질을 할 생각에 왕기가 삼삼이마저 공중에 둥실 띄울 때 선두에 있던 여인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천하제일 고수이신 고려검황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벽력가의 무인들은 다들 무기를 거두고 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벽력가의 여왕전(女王殿)]

    - 후루룩.

    강호에서 명성이 가지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 절감하며 상대방이 내온 차를 들이마신 왕기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여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태생적으로 추위에 약한지 귀한 담비 가죽으로 제작된 털 모자를 쓰고 화려한 장신구들을 온몸에 걸치고 있는 구릿빛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벽력가의 무인을 죽인 건 미안하외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벽력가의 무인들이 무림에 자주 나가지는 않지만 고려검황의 철칙을 모를 정도로 정보에 어둡지는 않으니까요."

    "이해해 주니 감사하오. 보아하니 벽력가는 한족이 세운 세가가 아닌 것으로 보이오. 내가 본 것이 맞는 것이오?"

    "맞아요. 벽력가는 강족(羌族)이 세운 가문이니까요."

    "강족?"

    "그렇습니다. 뇌전벽력수를 창안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이선봉(李先鋒) 초대 벽력가주께서는 서하(西夏)의 마지막 왕족이셨습니다. 당(唐)나라 시절 황실(皇室)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下賜) 받은 이계천(李繼遷)의 직계 후손이셨지요. 전 그분의 후예인 이정민(李貞民)이라고 하오며 당대의 벽력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벽력가는 대대로 여인이 가주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요."

    "이제 보니 서하의 정통 후예인 왕족이셨군. 정문 앞에 걸려 있는 편액에 적혀있는 것은 서하문자였고. 서하는 몽골군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독자적인 나라를 세워 지내다가 7대째인 양종(襄宗) 때 칭기즈칸에 의해 서하가 멸망했지요. 이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秘史)이지만 고려검황께는 특별히 말씀드리지요. 칭기즈칸이 서하를 멸망시키며 초대가주이자 마지막 왕족인 이선봉을 살려둔 것은 두 사람의 협약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칭기즈칸과 초대가주 사이에 협약이 있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초대가주는 아직 뇌전벽력수를 익히시지는 못하셨지만 화약 연구에 관심이 많은 뛰어난 고수이셨습니다. 몽골족의 군대를 맞이해 엄청난 활약을 하셨지요. 하지만 무인 하나가 전쟁의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지요.  칭기즈칸은 영리한 자이며 전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자입니다. 초대가주의 재능과 화약 연구의 효용성을 알아차린 칭기즈칸이 초대가주를 살려주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지요. 서하의 후예들이 자신들만의 가문을 중원 어디에도 세워도 좋고 안전도 보장하겠지만 화약 연구가 끝나면 그 결과물을 황실에 제공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검황께서는 혹시 항주에 가보신 적이 있사옵니까?"

    "근처까지 가본 적은 있소이다."

    "항주의 성벽은 높고도 두텁습니다. 성벽 위로 마차 두 대가 자유롭게 지나갈 정도로 말이지요. 몽골족에게는 남송의 근거지이자 한족 최후의 보루였던 항주의 두터운 성벽을 무너뜨릴 방법이 없었지요. 그래서 남송이 막강한 몽골족 군사들에게 오랜 시간 버틸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성벽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대량의 벽력탄이었지요. 칭기즈칸의 손에서 살아남은 초대가주께서 이곳에 터를 잡은 후 개발하신 것입니다. 벽력탄을 한꺼번에 터뜨려 항주의 성벽 일부를 무너뜨린 몽골족의 군사들이 항주를 점령하고 남송을 무너뜨린 후 중원을 완벽하게 일통했습니다. 그 보답으로 벽력가는 원나라 황실로부터 지속적인 안전과 자유로운 강호 활동을 보장받았고요. 이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저희 세가가 한족의 보복을 받을 테니까요. 검황께서는 고려인이시기에 특별히 알려드린 것입니다."

    "비밀은 당연히 지켜드릴 것이오. 근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서하의 후예가 이 먼 산동에 가문을 세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대륙을 가로질러 왔을 터인데 머나먼 이곳 청도까지 그것도 노산 중턱에 세가를 일군 이유가 무엇이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성능이 우수한 화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물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물을 찾기 위해 초대가주께서 인육 장사를 하시며 대륙을 전전하다가 이곳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노산의 물맛이 좋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물맛이 좋은 곳이 대륙 전체에 한두 군데가 아니잖소?"

    "물맛이 좋은 이유는 노산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노산에서 나는 물은 광천수(鑛泉水)라는 것이옵니다. 초대가주의 기록에 따르면 광천수에 담겨 있는 것들이 화약의 위력을 증대시킨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물을 찾기 위해 대륙을 떠돌아다녔던 것이지요."

    그 순간 왕기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광천수에는 무기염류(無機鹽類)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염화나트륨, 질산칼슘, 황산아연, 나트륨염, 마그네슘염, 칼륨염, 칼슘염, 암모늄염 등이 말이지. 그러한 것들을 정제해서 사용해 화약의 위력을 한층 증대시킨 모양이로군.'

    벽력탄의 위력이 왜 뛰어난지 뇌전벽력수를 창안한 벽력가의 가주가 왜 서하에서 머나먼 산동까지 와서 세가를 세웠는지를 알게 된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부탁을 좀 하고자 하오. 여기까지 온 김에 벽력탄을 몇 개만 사고 싶소.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라는 것도 같이 구매를 하고자 하오."

    왕기의 말에 이정민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 여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반적인 화약과 초산은 재고가 있으니 판매가 가능합니다. 하지민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해 초를 기점으로 벽력탄의 재고는 완전히 바닥이 났습니다. 팔고 싶어도 팔 물건이 없는 것이지요."

    "노산의 물이 마른 것도 아닐 테니 새로 만들면 될 것이 아니오? 설마 제조법을 모르는 것이오?"

    "제조법도 잘 정리되어 있고 만드는 기구들도 잘 보관되어 있지요. 하지만 벽력탄 제조에 꼭 필요한 재료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벽력가주가 발견한 꺼지지 않는 불이 다 소진되었기 때문이지요."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초대가주께서 노산의 광천수를 이용해 만든 가루이옵니다. 그 가루에 불을 붙이면 물로도 끌 수가 없다고 기록이 되어 있지요. 문제는 지금 노산의 물로는 초대가주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조를 해도 그 가루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의 조성이 많이 바뀐 걸로 생각됩니다."

    "그럼 벽력탄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초대 가주께서는 살아생전에 벽력탄을 만들 재료들을 엄청나게 많이 모아놓으셨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작은 동산만 한 각종 재료들을 세가의 아래에 있는 지하 창고에 보관해 두셨다고 되어 있지요. 그 창고만 열수 있다면 벽력탄 따위는 천 개, 만 개라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럼 그 창고를 열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 창고는 오직 뇌전벽력수를 제대로 익힌 자만이 열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내공 또한 초대가주 못지않은 절대지경의 고수가 말이지요. 그렇지 못한 자가 창고를 열려고 시도를 하다가는 모두 죽게 되어 있습니다. 본 세가에서도 몇 명이 도전했지만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지요. 세가 내에서는 창고 앞에 설치되어 있는 시험대를 사형대(死刑臺)라고 부를 정도이니까요. 한때는 세가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서 창고 쪽으로 접근을 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만 기록을 찾아보고는 깨끗이 포기하였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오?"

    "초대 가주께서 창고 주변 일대에 벽력탄을 촘촘히 깔아놨기 때문입니다. 도난이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정식으로 열지 않고 가까이 접근했다가는 벽력탄이 일제히 터져 노산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정민의 말에 왕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그 시험대에 데려가 주시오. 내가 그 창고를 열어드릴 테니 말이오."

    "제가 한 말을 못 들었습니까? 불가해무공이라는 뇌전벽력수를 제대로 익힌 자만이 열수가 있는 곳입니다."

    "걱정 마시오. 본 검황은 뇌전벽력수을 이미 완벽하게 익힌 상태이니까."

    경악에 찬 여왕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없는데..."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숨겨진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있는 법이오. 뇌전벽력수를 익히며 다른 무공과 결합을 시켰기에 강호인들은 잘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본인은 분명히 뇌전벽력수를 익혔소이다."

    - 파지지직...

    말을 하고 있는 왕기의 전신에서 갑자기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