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65화 (65/171)
  • #65. < 고려 시대의 실존 인물들을 만나다 - 2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을 든 병사 하나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뉘시오? 여기는 벽란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청이오. 무역이나 세금과 관련된 곳은 항구 쪽에 설치되어 있소이다."

    그러자 왕기가 문을 힘차게 밀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난 벽란도에 무역을 하러 온 상인이 아니오. 이곳에 최무선이라는 자가 있다고 하여 찾아왔소이다."

    왕기와 그 옆에 서있는 편조대사의 기세나 행색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병사가 공손하게 물었다.

    "최무선이라는 자를 왜 찾는 것이옵니까?"

    "그자가 화약에 관심이 많다고 하여 찾아왔소이다. 같이 이야기를 한번 나눠볼까 해서 말이오."

    그 순간 병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중얼거렸다.

    "제길... 또 자리를 비우고 땡땡이를 치겠군. 화약이라고 하면 환장을 하는 놈이니까."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등을 돌리며 턱짓을 하는 병사 쪽으로 따라붙으며 왕기가 물었다.

    "최무선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모양이오? 그자가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에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이제 갓 스물이 넘은 말단 서기(書記) 놈이 중요한 일을 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단지 이곳 벽란도에는 아라비아를 비롯한 외국 상선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한 번씩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면 그 용도를 몰라 품목을 뭐라고 적을지, 적절한 세율은 얼마인지를 매기기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최무선을 불러 감정을 시키는 경우가 왕왕 있지요. 그자가 그런 쪽으로는 제법 지식이 뛰어나니까요. 자리를 비운만큼 밤늦게까지라도 자신이 할 일을 하는 놈이니 제가 화를 낼 일은 아닙니다. 단지 오늘처럼 자꾸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부러워서 그러는 것이지요."

    "그렇구려."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보아하니 최무선은 단순히 화약에만 관심이 있는 자가 아니라 지식과 진리에 대한 갈구가 심한 과학자 타입이야. 성실함과 책임감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직접 지켜본 주변 사람의 평가만큼 정확한 것이 없지.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중요한 일을 맡겨도 되겠어.'

    [최무선의 집무실]

    벽란도를 드나드는 상선들의 이름과 출입기록 그리고 거기에 실린 화물 목록 등을 정리해놓은 서적과 두루마리가 잔뜩 쌓여 있는 최무선의 집무실로 찾아간 왕기가 입을 열었다.

    "난 강릉부원대군이며 심왕인 왕기라고 한다. 혹시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러자 최무선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대꾸했다.

    "벽란도에서 근무하는 소인이 어찌 심왕 전하를 모르겠사옵니까? 소인이 중국 말을 좀 할 줄 알아 벽란도를 드나드는 원나라 선원들로부터 고려검황의 위명을 귀에 닳도록 들었사옵니다. 도왕을 단칼에 죽이시고 바얀 승상의 목을 자르신 분이 아니십니까?"

    "날 알고 있다니 다행이로군. 최무선 너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본 왕이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 이 일은 네게도 좋은 일일 것이야. 네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화약과 관련된 일이니까."

    왕기의 말에 별빛처럼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한 이제 막 21살이 된 청년 최무선이 고개를 발딱 치켜들어 왕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 화약과 관련하여 제게 시키실 일이란 것이 무엇이옵니까?"

    그러자 왕기가 뒤에 서있는 편조대사를 보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편조대사는 자리를 비켜주시오. 이건 우리 둘만이 알아야 하는 비밀이니까."

    - 털썩.

    갑작스러운 추방령에 무릎을 꿇은 편조대사가 읍소를 하기 시작했다.

    "전하. 소승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소승은 전하의 신하가 되어 이 나라 고려를 이상적인 국도로 만드는 것이 꿈이옵니다. 부디 소승을 전하의 신하로 거두어 주시옵소서."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가 어땠는지, 그 마지막이 어떤 비극(悲劇)으로 끝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왕기가 매서운 눈빛으로 답했다.

    "그대를 거두어달라? 그대와 난 오늘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더냐? 그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이 중요하겠사옵니까? 전하께서 미륵의 환생이라는 것을 부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승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야 되겠느냐? 네놈의 인생이 걸려있는 일인데 말이야. 이 자리에 최무선도 있으니 겸사겸사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도록 하마. 내게는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다. 한 여인은 나의 영혼의 동반자이며 조만간 고려의 왕비(王妃)가 될 여인이며, 다른 여인은 나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으니 정실이 아닐지라도 나의 빈(嬪)이 될 여인이다. 그리고 받아들인 신하 또한 이미 여러 명이야. 그중에 둘은 그대처럼 승려 출신이지. 그러니 그대는 내 질문에 대답을 잘 하여야만 할 것이야. 그래야만 나의 신하가 될 수 있을 것이니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내가 적들과 전쟁을 하다가 그만 부상을 당해서 적들에게 사로잡혔다고 가정을 해보거라. 나의 신하들 가운데 척 무관이란 자가 있다. 성격이 아주 침착하고 신중한 편이지. 그놈은 아마도 그 소식을 들으면 나를 구출하기 위해 사방에서 군사를 박박 끌어모을 것이야. 시다발이라는 놈은 머리가 아주 비상하다. 그놈은 날 구출할 묘책을 세우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쥐어짤 테지. 무장이라는 놈은 성격이 급하고 단순해 불문곡직하고 날 구하기 위해 적들의 기지로 내달릴 놈이다. 앙리라는 놈은 날 구하기 위해 재물을 이용해 적들과 협상을 하려들 것이고. 지금 들은 것처럼 각자의 개성들이 아주 뚜렷할 뿐만 아니라 능력 또한 뛰어난 신하들이다. 그럼 그 소식을 들은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의 필요성을 어디 한번 내게 증명해 보거라."

    잠시 머리를 굴린 편조대사가 입을 열었다.

    "소승이라면 전하의 비빈 두 분을 모시고 안전하게 도망갈 길을 찾겠습니다. 당서(唐書의 배도전(裵度傳)에 나오기를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常事)'라고 하였사옵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법이지요. 전하께서 적들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은 그 전쟁을 이미 졌다는 뜻과 다름이 없습지요. 누군가는 훗날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소승은 그런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소승의 잘 생긴 외모는 절 처음 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가지게 하고 의심을 덜 사게 만듭니다. 게다가 소승은 언변 또한 제법 뛰어난 편이지요. 위험지역에서 전하의 비빈들을 그 누구보다 안전하게 빼낼 자신이 있습니다."

    편조대사의 말에 왕기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적들과 싸워보지도 않고 날 구출하려고도 들지 않고 나의 부인들을 데리고 냅다 도망부터 가겠다라. 비상시를 대비해 그런 신하가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좋다. 그대를 나의 신하로 받아들이도록 하마. 그대는 파계를 하여 머리를 기르고 속세로 돌아와야 할 것이야. 승려 출신인 나의 다른 신하들이 그리했듯이 말이다."

    그러자 편조대사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말했다.

    - 쿵. 쿵. 쿵...

    "주군을 뵙사옵니다. 주군의 말씀처럼 환속을 하겠사오니 소승에게 세속명을 지어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세속에서 사용할 이름이라. 서역의 속담에 개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도 반드시 좋은 이름으로 지어주라고 하였다. 나쁜 이름을 지어줬다가는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개의 목을 매달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말이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지. 그대의 성을 매울 신(辛)이라고 하거라. 그리고 이름은 그대의 잘난 얼굴을 대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비단 라(羅)에 얼굴 면(面)을 하면 되겠구나."

    "신씨 성에 비단처럼 매끈하고 잘 생긴 얼굴이라는 뜻의 신라면(辛羅面)이라. 참으로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편조대사가 잘 생긴 얼굴 가득 미소를 띨 때 왕기가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신하가 되는 자들에게는 보통 두 가지만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첫째는 어떠한 경우에도 날 속이지 말 것이고, 둘째는 절대로 날 배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특별히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하겠다. 나의 여인들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말거라. 그대의 얼굴이 워낙 잘 생겼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야. 만약 내 말을 어겼다가는 그대의 양물을 잘라 입에 처넣어서 똥이 되어 나오는 것을 지켜보게 할 것이야. 난 부처처럼 자비를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니라. 내가 말한 세 가지만 지킨다면 넌 나의 신하가 되어 나와 함께 죽기 전까지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내가 한 경고를 반드시 명심하거라."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스럽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최무선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그럼 소인은 그 상황이 되면..."

    그 순간 왕기가 최무선의 말을 잘랐다.

    "되었다. 그대에게는 방금과 같은 시험 따위는 없을 테니까. 내가 맡긴 일 그 자체가 그대의 시험이 될 것이야.'

    - 촤르륵.

    탁자 위에 몇 장의 설계도면이 연달아 펼쳐지자 최무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 이것이 다 무엇이옵니까?"

    "화약을 이용해 포탄을 발사하는 대포들이다. 하나는 '육군용 고려 대포 제1식'이지. 줄여서 간단히 박격포라고 부르는 물건이다. 다른 하나는 '해군용 고려 대포 제2식'이다. 배에 실어서 사용하는 장거리 대포이니라. 마지막은 '공군용 고려 대포 제3식'이다. 비행선이라는 물건에 실어 하늘에서 땅으로 폭격을 가하는 물건인 것이야. 시간을 충분히 줄 터이니 차분히 검토를 해보고 그대의 의견을 한번 말해보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눈에 불을 켜고 설계도면을 이잡듯이 뒤져가며 한참을 살펴보던 최무선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참으로 대범한 생각이며 뛰어난 무기들이옵니다. 전하. 소인도 대포라는 것의 소문을 들어봤고 관련된 책들을 힘들게 구해 여러 권 읽어보았습니다만 전하께서 구상하신 것들과 몇 가지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더냐? 잘 말해야 할 것이야. 내가 기대하는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오늘의 만남은 없었던 일로 될 터이니까."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킨 최무선이 입을 열었다.

    "무릇 대포라 함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을 이용해 돌멩이나 철환을 날려 적의 성벽을 파괴하기 위한 무기입니다. 하지만 그런 철환을 멀리 날려보내기 위해서는 대포의 포신 안에 사람의 힘으로 화약 가루를 잔뜩 밀어 넣어야만 하지요. 그러다가 대포가 터져버리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설계도에 따르면 화약 가루는 사람의 눈에 단 한 톨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모든 화약들이 포탄 안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놀라운 개념입니다."

    대답이 맘에 드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왕기가 물었다.

    "그럼 어떤 장점이 있느냐?"

    "화약은 위험한 물건이고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습니다. 화약 가루가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폭발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뿐이더냐?"

    "다른 장점도 있사옵니다. 날아간 포탄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 재차 폭발을 일으켜 적들에게 보다 큰 피해를 줄 수가 있게 돼옵니다."

    "머리가 나쁘지 않군. 계속 말해보거라."

    "전하께서 설계하신 대포들에는 불을 붙이는 심지와 도화선 같은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즉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불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오로지 충격만으로 포탄이라는 것을 발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군용 고려 대포 제1식'을 보면 포탄 꼬리 부분에 구멍이 나 있어서 포신 아래에 위치한 송곳처럼 뾰쪽하게 튀어나온 공이란 것에 딱 들어맞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포탄을 포신에 밀어 넣으면 자연스럽게 낙하하며 송곳에 찔리게 되어 폭발을 일으켜 포탄을 발사하게 되어 있지요. 아주 간단한 형태이지만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는 아주 뛰어난 격발 방식입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화약과 심지, 도화선, 불까지 필요 없는 안전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자 하는 것이야. 그래야만 보관과 운송이 편리해 전장으로의 대량 보급이 원활해진다. 하지만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이 있다. 불꽃도 없이 포탄이 낙하하여 송곳에 찔리는 힘만으로 화약이 폭발하여 포탄을 멀리까지 날려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 가능하겠느냐?"

    왕기의 말에 최무선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직 화약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못해서요."

    "화약이 뭔지 모르느냐? 유황과 목탄 그리고 초석을 섞어놓은 것에 불과해."

    "소인이 그걸 모를 리가 있겠사옵니까? 중요한 것은 그 세 가지의 조합 비율입니다. 조합 비율이 달라지면 화약의 위력 또한 천차만별이 되지요. 소인이 원나라 상인들이 들어올 때마다 붙잡고 물어보는 것이 바로 그 비율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려주지를 않고 있지요. 사실은 그들조차도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원나라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 네가 직접 시험을 해보면 될 것이 아니냐? 종류가 세 가지 뿐이니 몇 번 시험을 해보면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자 최무선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 고려 땅에는 초석이 나지를 않습니다. 원나라에서 수입을 해야만 하는데 그 가격이 싸지 않으며 잘 팔지도 않고 있지요. 그러니 소인이 시험을 해보고 싶어도 시험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순간 왕기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벽력탄이라고 들어보았느냐?"

    "네. 들어보았습니다. 원나라에 위치한 산동 벽력가에서 만드는 폭탄이지요. 소문으로는 대단한 위력을 지녔다고 하더군요."

    "내가 그 벽력탄과 고려에서 구할 수가 없다는 초석을 대량으로 구해서 가져다주면 내가 설계한 것들을 만들 자신이 있느냐?"

    "그렇게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맡겨만 주시지요."

    '벽력탄이야 벽력가를 찾아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난 불가해무공인 뇌전벽력수(雷電霹靂手)를 해석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들의 은인인 사람이라고. 초석이야 원나라에서 구입해서 들고 오면 될 것이고, 정 안되면 내가 직접 남아메리카 칠레 북부에 있는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으로 날아가서 구해오면 된다. 그곳에는 칠레 초석이 노천에 늘려있으니까.'

    속으로 삐르게 중얼거린 왕기가 울러매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 입구를 풀어서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쏟아붓자 온갖 보석과 고려에서도 통용이 되는 원나라에서 발행하는 지폐인 중통보초(中統寶鈔) 묶음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재물의 양에 최무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전... 전하. 이... 이것이 다 무엇이옵니까?"

    "너에게 주는 연구 자금이다. 넌 이 재물을 가지고 개경 외곽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넓은 땅을 구입해서 내가 설계한 대포를 개발할 연구소를 지어라. 이런 중요한 것들을 원나라 땅에서 개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잘못하다가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니까. 연구소의 이름은 '국방과학연구소(國防科學硏究所)'로 하고 그대가 초대 연구원장을 맡아라. 그리고..."

    왕기가 고개를 돌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재물을 바라보고 있는 신라면에게 말했다.

    "그대의 무력이 제법 뛰어나고 향도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 최무선을 옆에서 경호하면서 이 재물로 사람을 부려 그의 일을 도우거라. 만약 최무선의 신상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의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그대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야. 알겠느냐?'

    "잘 알겠사옵니다. 전하."

    "신라면은 지금 본 재물에 욕심을 가지지 말거라. 만약 일이 잘 진행되면 저 정도 재물쯤은 아무것도 아닐 만큼 엄청난 양의 재물을 그대에게 내려줄 테니까. 네가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이 몸은 제법 부자이니라. 내가 종종 고려로 넘어와서 감시를 할 것이고 진행사항들을 확인할 것이야. 그러니 반드시 차질 없이 일을 진행시키도록 해. 이 일에 고려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또 한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왕기가 품에서 책자를 한권 꺼내어 던지며 말했다.

    "내가 만든 문자인 훈민정음이라는 것을 적어놓은 책이다. 장차 고려의 문자로 사용될 것이지. 둘다 이것을 보고 익혀 매일같이 연구기록과 진행상황을 고려 문자로 일지에 적도록 해."

    그러자 최무선이 반박했다.

    "전하. 자고로 문자를 배우다는 것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옵니다. 언제 그걸 배워 고려 문자로 기록을 한다는 것이옵니까?"

    "걱정말거라. 뛰어난 자는 내일 아침이면 사용이 가능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이니까. 직접 공부해보면 훈민정음의 위대함을 알게 될 것이야. 이건 명령이다."

    세종대왕께서 하신 말씀을 태연하게 내뱉은 왕기가 신라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익혀보고 내 말이 맞으면 그대를 따르는 향도들에게 알려줘도 상관없다. 그대가 날 미륵의 화신이라고 믿는다면 이건 미륵이 고려 땅의 백성들에게 내리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니까."

    "잘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두 사람에게 국방과학연구소 설립과 대포 개발에 관련된 내용들을 자세하게 일러준 왕기가 최무선의 집무실을 나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방문을 미뤄두었던 벽력가가 위치해 있다는 산동 쪽으로 방향을 잡은 후 한줄기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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