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64화 (64/171)
  • #64. < 고려 시대의 실존 인물들을 만나다 - 1 >

    서기 1345년 11월 10일

    마음속으로 원나라의 대도에서 고려의 개경까지 일직선의 항로를 그은 후 번개처럼 하늘을 날아가고 있던 왕기가 중국 대륙과 한반도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는 요동반도(遼東半島) 위에 도착한 건 대도를 출발한 지 불과 이다경(二茶頃 : 30분)도 채 되기 전이었다.

    호신강기를 두른 채 음속을 뛰어넘는 스피드로 날아가던 왕기가 아득한 상공에서 자신의 발밑으로 스쳐 지나가는 대도시가 현세의 중국에서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대련(大連)이라는 걸 직감하고서는 속으로 뇌까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동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하루하루 내공이 더 늘어나고 자기부상신법이 점점 더 숙달이 되어가니 무리도 아니지. 일전에 척무관이 내게 한 말이 현실이 되었어.'

    - 저하께서는 아침은 개경에서 드시고, 점심은 대도에서, 저녁은 항주에서 드실 수 있는 경공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저하의 믿기지 않는 기동력이라면 원나라의 심왕이면서도 고려의 왕위를 잘 수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척무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도 왕기의 신형은 대련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나쳐 거침없이 황해(黃海) 위를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왕기의 마음은 소풍 전날의 어린아이처럼 몹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왕궁에서만 자랐고, 채 철이 들기도 전에 볼모의 몸으로 원나라에 끌려가 다시 자신의 고국인 고려로 돌아와 이 시대의 고려인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직접 보게 되는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도를 떠난 지 불과 반시간 만에 황해를 단숨에 건너 한반도로 들어선 왕기가 개경의 서북방향으로 진입하자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며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게 되는 고국의 산천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 쏴아악...

    온몸을 감싸고 있던 호신강기를 거두고 속도를 늦추며 지상 가까이 접근하자 초겨울의 칼바람이 왕기의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비록 화경에 접어들어 한서불침(寒暑不侵)의 신체를 지니고 있어서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개경의 겨울이 몹시도 추울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될 정도였다.

    '그럴 만도 하지. 개경은 서울보다 훨씬 더 북쪽에 위치해 있으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던 왕기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천마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여러 산봉우리들을 연이은 산성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왕기가 강릉부원대군의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개경 북쪽을 지키고 있다는 대흥산성(大興山城)이로군. 천마산, 청량봉, 인달봉, 성거산 등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석성이지.'

    천마산 가까이로 다가간 왕기의 귓속으로 갑자기 여러 가지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왕기의 눈에는 초겨울 깊은 산중에서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발견되었다.

    - 콰과과과...

    10장(30m)이 넘어가는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들이 내는 소리의 정체는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장관이로구나. 저것이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린다고 하는 그 유명한 송도삼절(松都三絶) 중에 하나인 박연폭포(朴淵瀑布)로군.'

    박연폭포를 발견한 왕기의 귓속으로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변발에 호복을 입은 이십여 명의 장정들이 맨 앞에 서있는 승복 차림의 젊은 남자의 구령에 맞추어 아름드리 통나무를 어깨에 울러 맨 채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뒤에는 십여 명의 아녀자들이 따라가며 손에 들려있는 꽹과리와 징을 연신 두들겨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 영차. 영차...

    - 괭. 괭. 괭...

    - 징. 징. 징...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솜옷을 입지 않고 고려 시대에 임금부터 일반 백성까지 남녀의 구별 없이 입었다는 모시로 만든 흰색 겉옷인 백저포(白紵袍)를 걸치고, 쪽을 찐 머리의 뒤쪽에 붙여 길게 늘어뜨린 도투락댕기에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인 몽수(蒙首)를 쓰고 있는 그들 일행의 맨 뒤에 서있는 아녀자 뒤로 소리도 없이 낙하한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다들 이 추운 날씨에 모시로 된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문익점(文益漸)이 아직 목화씨를 구해오지 않았구나. 목화로 만든 솜옷도 좋지만 돌아가는 대로 오리털 파카를 제작해봐야 하겠어.'

    새로이 또 개발해야 할 상품이 늘어난 것을 기뻐하던 왕기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맨 끝에 서있는 아녀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툭. 툭.

    화들짝 놀란 아녀자가 뒤로 돌아보더니 왕기를 발견하고서는 대낮에 귀신을 발견한 듯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에그머니나. 누... 누구세요?"

    "개경에 놀러 온 김에 박연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천마산을 올라가고 있던 과객이라오. 해치지 않을 테니 너무 놀라지 마시구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니 뭐 좀 물어보리다. 이 깊은 산중에서 당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이오?"

    그녀가 빠르게 왕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값비싼 비단 의복에 양쪽에 차고 있는 검을 보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한 듯 공손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나리. 지금 저희들은 매향(埋香)을 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매향을 하고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향나무를 땅에 묻는 것이지요."

    "향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고 땅에 묻는다는 말이오?"

    왕기가 자신들의 풍습을 잘 모르는 듯하자 그녀가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사옵니다. 매향은 본래 귀한 향이나 약재로 쓰이는 침향(沈香)을 만들기 위하여 향나무,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을 오랫동안 갯벌에 묻어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는 저희 향도들이 행하는 일종의 종교의식과 같은 것이옵니다. 나리. 향도가 뭔지는 아시는지요?"

    강릉부원대군의 기억을 더듬은 왕기가 대답했다.

    "알고 있소이다. 불교신앙을 가진 고려 백성들이 모인 일종의 공동체 조직이 아니오?"

    "맞습니다. 저희 향도들이 미륵을 만나 구원을 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향나무를 땅에 묻는 것이 바로 매향이지요. 먹고살기 힘든 이 고려 땅에 빨리 미륵불께서 환생하시라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저 장정들이 들고 가고 있는 것이 향나무이고 그대들은 매향을 하고 있는 중이었군. 근데 왜 갯벌이 아니라 이 천마산 깊은 산중에 향나무를 묻으려고 하는 것이오?"

    "그건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인 '편조대사(遍照大師)'의 말에 따른 것이지요. 오늘 새벽에 편조대사깨서 부처님의 현몽(現夢)을 꾸셨다고 하옵니다. 천마산 박연폭포 근처에 매향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미륵불의 화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시면서 저희 향도들에게 아침부터 매향 작업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지요."

    아녀자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편조대사라는 자가 누구란 말이오?"

    그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꽹과리 소리와 향나무를 옮기던 장정들의 영차하는 기합소리가 뚝 끊겼고,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돌아 왕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일행의 맨 앞에서 인도를 하고 있던 승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바람처럼 움직여 왕기를 향해 비호처럼 허공을 날아오며 천마산이 떠나갈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는 누구인가?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매향 작업을 방해하고 있는 그대의 정체를 썩 밝히거라."

    이 시대의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키에 맨손으로 소라도 때려잡을 듯한 다부진 체격 그리고 아주 곱상하게 생긴 외모의 승려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척 무관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일신에 지닌 무공이 제법이로군. 어지간한 무인들은 가볍게 때려눕힐 정도야. 그건 그렇고... 참으로 잘생긴 얼굴이로군. 머리를 빡빡 밀은 정우성을 보는 듯한 기분이야. 여신도들에게 인기가 많겠어.'

    승려가 손에 들고 있던 주장자(拄杖子: 수행승들이 지니고 있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며 자신을 단매에 때려죽일 듯 날아오자 왕기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오색찬란한 호신강기가 그 빛을 사방으로 폭발시키며 왕기의 전면에 나타났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에서는 감탄성이 터져 나올 때 호신강기에 부딪친 주장자가 폭음과 함께 튕겨나갔다.

    - 콰앙!

    그 순간 왕기의 입에서 산중 대군이라는 호랑이의 포효 같은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 강릉부원대원군이자 심왕인 왕기라고 한다. 고려의 지존이신 충목왕 전하의 숙부가 되는 자가 바로 나이니라."

    깜짝 놀란 향도들이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절을 올릴 때 편조대사라는 자가 말을 보태었다.

    "모든 향도들은 들어라. 본 대사가 오늘 아침에 말했던 미륵불의 화신께서 부처님의 약속대로 천마산 박연폭포에 직접 나타나셨다. 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만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분이시니 모두들 경배 또 경배하거라."

    그러자 박연폭포 아래에서 때아닌 대소동이 벌어졌다. 수십 명의 향도들이 무릎걸음으로 왕기에게 다가와 왕기를 바지 자락을 붙들고 읍소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 전하. 만 백성을 배불리 먹게 해주시옵소서.

    - 미륵불의 화신이시여. 경배 또 경배 드리옵니다.

    - 아이고. 전하. 부디 도탄에 빠진 고려를 구해주시옵소서.

    잠시 후 향도들을 도와 향나무를 박연 폭포 인근에 묻은 왕기가 편조대사라는 자와 같이 경공을 시전해 천마산을 빠르게 내려오며 말했다.

    "그대가 이끄는 향도들에게 말해서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도록 하시오. 원나라 대도에 있어야 할 내가 고려 땅 개경에 와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승이 예연한 것처럼 미륵의 화신이 박연폭포에 나타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전하. 소승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미륵불의 화신이 확실하다는 소문이 개경의 백성들 사이에서 퍼지면 다음 왕위에 올라가실 때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만 백성들이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냥 놔두심이 어떠할지요?"

    "그딴 소문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소, 내가 맘을 먹으면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난 미륵의 화신이 아니외다. 그딴 거짓된 소문으로 백성들을 속일 수는 없어."

    그러자 편조대사란 자가 펄쩍 뛰며 대꾸했다.

    "거짓된 소문이라니요. 전하.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승이 분명히 부처님의 현몽을 받았습니다. 미륵의 화신이 박연폭포에 나타날 것이라고요. 아니 그랬다면 소승이 이 넓은 고려 땅에서 전하를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왕기가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현몽을 받았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오?"

    그러자 편조대사가 마치 절세미인이 웃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소승의 말이 거짓이라면 제 양물을 자르셔도 좋습니다."

    그 순간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타고난 요승(妖僧)이로구나. 남자의 웃음이 저렇게 아름답다니. 마치 김용의 무협소설에서 등장하는 규화보전(葵花寶典)을 익혔다는 동방불패(東方不敗)를 보는듯해.'

    "그대는 정체는 무엇이오? 보아하니 예사 승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외다."

    "소승은 본디 영산(靈山) 사람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계성현(현재의 창녕) 화왕산 옥천사의 여종이었지요. 아버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태어난 소승은 사찰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중들 틈에도 끼지 못하고, 그저 산방으로 겉도는 신세로 어린 시절을 지내다가 기연으로 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지요...."

    설명을 듣고 있던 왕기가 마침내 편조대사의 정체를 깨닫고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자가 바로 고려 말기의 요승이라고 불리던 신돈(辛旽)이로군. 아니 어쩌면 신들이 안배한 나의 대적자일지도 모르지. 부처가 직접 현몽을 했다는 것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아. 조심해야 하겠어.'

    편조대사가 설명을 듣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왕기를 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떤 연유로 갑자기 고려 땅으로 오시게 된 것이옵니까?"

    "최무선이라는 자를 찾아왔소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시킬 일이 좀 있어서 말이오"

    "아... 화약에 미쳐있다는 그 젊은이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대가 최무선을 알고 있소이까?"

    "모를 리가 있겠사옵니까? 폭죽에 사용되는 화약을 개발하겠다며 원나라에서 건너온 자만 있으면 자신이 근무지인 벽란도(碧瀾渡 : 황해도 예성강 하류에 있던 고려 시대의 국제 무역항)를 벗어나 개경까지 직접 찾아와서 질문을 퍼부어대는 것으로 유명한 자이지요. 저잣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그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그리하지요."

    [고려 시대의 최고 무역 항구인 벽란도]

    - 탕. 탕. 탕.

    잠시 후 바람처럼 내달린 왕기와 편조대사가 최무선이 근무하고 있다는 벽란도의 관청에 도착한 후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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