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보자 - 1 >
[심왕부 가주전]
어느새 대도해 위치해있는 가주전에 도착하자 승의공주가 왕기의 품에서 벗어나 침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오빠가 몽골족 병사들을 뽑을 때 미혼인 자들로 뽑은 이유는 알겠어요. 그들을 고려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가족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요. 근데 수영이 가능한 자들로 뽑은 이유는 뭐죠?"
"너라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텐데?
"어느 정도는요. 현대를 살았던 한국인이라면 한민족의 영원한 숙적이 일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죠. 아마도 일본 정벌을 위해서겠지요?"
"맞아. 내 계획대로라면 고려를 최대한 빨리 안정시키고 곧바로 일본 정벌에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 후 일본 식민지를 바탕으로 국력을 길러서 중국을 잡아먹을 작정이었지. 그다음에는 전 세계를 정복하는 거고. 그래서 위왕이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때 동참했던 병사들로 뽑으려고 했었어. 하지만 그런 자들은..."
"오래전 일이라 그들은 이미 다 노쇠했죠. 10대의 나이 때 참가했어도 지금쯤 못해도 환갑이 훌쩍 지났을 테니까요."
"그래서 수영을 할 줄 아는 자들로 뽑은 거야. 일본 원정군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지. 몽골족 병사들을 중국과의 전투에 사용할 수는 없어. 자신들의 동족과 싸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꺼려 할 거란 말이지. 내가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고, 그들 중에서 배신자 또한 속출할 수도 있어. 그래서 철저하게 대 일본전 군사로 써먹을 생각으로 뽑은 거야."
"무슨 말이지는 알겠어요. 근데 일본 원정이 많이 힘드나요? 오빠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반발력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현대식 총이나 대포와 비행기 같은 것들을 잔뜩 만들어서 가볍게 밀어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승의공주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현대식 무기들은 작동 원리를 안다고 해서 당장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런 무기들은 뛰어난 재료기술과 정밀한 가공 기술들이 결합된 현대 과학문명의 결정체라고. 일본과의 전쟁은 바다에서의 함대전 양상으로 진행될 게 분명해. 반드시 대포가 필요하다는 소리야. 성능이 뛰어난 대포만 있다면 일본 놈들의 배를 깨부수고 본토로 단숨에 무혈 상륙이 가능할 테지. 하지만 지금 당장 대포를 모양만 비슷하게 만들어봐야 포신이 폭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뻥뻥 깨어져 나갈 거야. 이 시대에는 그런 충격을 버틸만한 포신을 만들 기술이 없다고."
말을 하는 도중 왕기의 목소리가 조금씩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다르지. 난 전공이 금속공학인 공돌이라고. 이 시대에서도 대포의 포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머리에 담겨 있어. 이전에는 망설였지만 세상의 반발력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지금이라면 나의 지식을 아낄 필요가 없지.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보자고."
- 촤아악.
말을 끝내자마자 탁자 위에 종이를 여러 장 펼친 왕기가 빠르게 설계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당장 현대식 총을 만드는 것은 무리다. 부품의 숫자가 많고 크기가 작을수록 가공이 힘들기 때문에 제작이 어려워진다. 게다가 총의 위력을 제대로 보려면 일정 이상의 개수가 필요해. 최소한 연대 병력을 무장시켜야 그 효과를 볼 거라고. 지금 당장은 그럴만한 제반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남은 건 대포밖에 없어. 대포 중에서도 부품 수가 가장 적고 강선 같은 특별한 가공 기술이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포신에 가해지는 압력이 가장 낮은 대포를 우선적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견인포나 자주포처럼 특별한 수송수단이 필요하지 않아서 보병이 들고 다니며 사용이 가능하지만 위력은 뛰어난 대포를 말이야. 박격포(迫擊砲)를 만들면 되는 것이야.'
- 쓱. 쓰슥. 쓱쓱.
왕기의 손에서 군 복무 도중 지겹도록 봐서 익숙할 대로 익숙한 60mm 박격포의 설계도가 거침없이 작성되고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경고의 메시지가 연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띠리링. 경고합니다. 지금 만들고자 하는 박격포는 세상의 반발력을 강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누적된 반발력의 합계가 임곗값을 넘어가 대적자가 한 명 탄생하였습니다.]
메시지를 깔끔하게 무시한 왕기의 눈앞에 포탄이 발사하는 충격을 흡수해 지면으로 전달하는 동그란 포판과 포탄을 발사하는 포신 그리고 포신을 지지하는 양각대 그리고 발사각을 조절하는 전륜기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심플한 박격포 설계도면이 완성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추진 작약이 담겨 있는 꼬리 부분에 날개가 달려있고 내부에는 화약이 담겨 있으며 앞부분에는 신관이 설치되어 있는 박격포 포탄의 설계도가 완성되어 있었다.
자신이 완성한 설계도를 보며 왕기가 뇌까렸다.
'총기 몇 천정을 만들어 연대 병력을 운용하는 것보다 박격포 100문을 만들어 포병 중대를 운용하는 것이 더 쉽고 전장에서의 제압 효과도 뛰어나다. 대포답게 위력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운용하는 인력 자체가 적게 들어가기 때문이지. 4인 1조로 구성한 박격포병 400명이면 충분하니까. 그만큼 대외적으로 비밀 유지가 쉽다는 뜻이기도 해. 총기를 몇 천정이나 만들었다가는 금방 적들의 손에 넘어갈 테고 복제품이 만들어지게 될 거다. 그만큼 세상의 반발력이 더 증가하게 될 거야. 이왕이면 반발력이 적은 쪽이 좋겠지. 문제는 박격포의 포신을 만드는 재료이다. 박격포가 대포 중에서는 내부 압력이 가장 적게 발생하는 대포이긴 하지만 이 시대에서 사용하는 가단주철 따위로는 감당이 안 돼. 몇 발 쏘지도 않고 포신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갈 거라고. 그렇다고 포신의 두께를 무작정 두껍게 만드는 것은 무게를 증가시켜 박격포의 효용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포신용 튼튼한 강철 재료를 개발해야만 한다는 거야. 물론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현대에서 사용하는 인코넬(Inconel) 합금 같은 것을 만들지는 못해. 비행기용 두랄루민(Duralumin) 합금이나 제트 엔진에 들어가는 슈퍼 알로이(Superalloy) 같은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고. 하지만 튼튼한 강철 재료 정도는 내가 가직 능력을 활용하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가 있다.'
"후우..."
왕기가 갑자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빌어먹을... 튼튼한 강철을 만들려면 내가 직접 노가다를 뛰어야만 해. 누굴 시켜서 될 일이 아니라고. 박격포 제작과 시험 운용도 내가 직접 관리를 해야 할 테고. 일복이 터져나는군.'
한편 그 시각, 십만대산에서는 메시지가 알려준 대로 왕기의 대적자 한 명이 탄생하고 있었다.
[마교주의 연공실]
자신의 연공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무쌍천마 갈중악이 눈을 꼭 감고 명상에 잠겼다.
'천하제일 무공이라는 천마신공은 그 성취에 따라 크게 4단계로 나뉜다. 하늘에 있는 천마와 소통이 시작된다는 '천마교신(天魔交神)', 인간들 중에서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는 '천마무적(天魔無敵)', 세상을 정복하게 될 힘을 가지게 된다는 '천마군림(天魔君臨)'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마 그 자체가 되어 신의 경지에 접어들게 된다는 '천마입신(天魔入神)'이다. 역대 교주들이 중원 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그 누구도 천마입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갈중악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우... 몇 십 년을 파고들어도 마지막 단계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교주가 천마 그 자체가 되어 온몸이 안개로 화해 그 어떤 무기로도 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사람의 몸이 어떻게 안개로 변한다는 거야? 천마입신의 경지에 달했을 때 시전하는 '천마무산(天魔霧散)'이라는 초식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시전이 불가능해 보인단 말이지."
고민에 빠진 갈중악이 괴로워할 때 머릿속으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띠리링. 귀하는 대적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천마라고 불리는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의 신성력(神聖力)이 부여됩니다.]
메시지의 내용에 깜짝 놀란 갈중악의 눈이 번쩍 떠졌고, 양쪽으로 매섭게 치켜져 올라가 있던 뱀눈이 왕방울처럼 휘둥그레졌다.
다시 심왕부의 가주전. 왕기가 고려군을 박격포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막강한 위력을 지닌 무기들로 무장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개발해나가야 할 것들의 설계도들을 하나씩 작성해 나가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말이다. 그러자 또 한 번의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띠리링. 반발력이 임곗값을 넘어가 대적자가 또 한 명 탄생하였습니다.]
'대적자가 벌써 2명이나 탄생했군. 괜찮아. 몇 백 명씩 한꺼번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해 해볼 만하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그 시각 바다 건너 일본의 교토.
[하나노고쇼(花の御所)]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따른 부수적인 피해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賴朝)'가 세웠던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 시대가 저물고,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막부인 이시카가(足利) 막부의 지배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머물고 있는 공관인 교토의 '하나노고쇼'에서는 이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가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버렸다. 꿈에서 일본 천황가의 황조신(皇祖神)인 '이자나기(伊邪那岐命)'의 쌍둥이 남매이자 누나이며 이자나기와 결혼해 일본을 창조했다는 '이자나미(伊邪那美)'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벌떡 일어난 이시카가 요시아키라의 머릿속으로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리링. 귀하는 대적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명부(冥府)를 다스리는 이자나미의 신성력인 '죽음을 관장하는 힘'이 부여됩니다.]
서기 1345년 11월 10일
우여곡절이 많았던 하루가 지나가고 새로운 아침이 밝아왔다. 가주전 방문 앞에서 척무관이 보고를 올렸다.
"전하. 모산파에서 표국을 통해 보낸 화물들이 잔뜩 도착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뜬눈으로 밤을 새운 왕기가 자신이 작성한 설계도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때마침 잘 도착했군. 모산파에서 보낸 화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화물을 실은 수레들을 창고 앞에 모두 세워뒀습니다."
"나와 함께 거기로 가자꾸나."
이윽고 창고 앞에 세워져 있는 수레에 잔뜩 실려 있는 화물들에서 주석과 납이라는 표찰이 붙어 있는 화물들의 껍데기를 뜯어내며 왕기가 척무관에게 물었다.
"척무관은 전쟁에서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느냐?"
"병력의 양과 질이겠지요."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난 그것보다는 빠른 정보 전달과 적절한 보급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시험용으로 보내진 주석괴를 집어 든 왕기가 강기를 이용해 주석괴가 얇은 판이 될 때까지 꾹꾹 눌러버렸다. 그리고는 명령을 받은 병사가 들고 온 얇은 철판을 붙잡고서 얇은 주석판으로 감싼 다음 롤러처럼 생긴 두 개의 수강 사이로 강하게 밀어서 압착시켜 버렸다.
"얇은 철판 앞뒤를 주석으로 감싼 걸 '양철(FER-BLANC)'이라고 부르지. 주석을 녹여서 입히거나 도금(鍍金)을 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렇게 압연(壓延)을 해버려도 내가 목적하는 성능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무게만 더 무거워질 뿐이니까. 그리고 이 양철판을 이런 식으로 찍어누르면..."
주먹에 동그란 강기를 씌운 왕기가 양철판을 힘차게 꾹 누르자 얇은 앙철판이 원통형으로 움푹하게 밀려 들어갔다.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모양이 되지. 그런 다음..."
모산파에서 보내온 화물들 중에서 납을 손에든 왕기가 뇌전벽력신공을 일으켜 윗부분의 뚜껑 모양을 빙둘러 납땜을 해버렸다.
"이렇게 밀봉해 버리는 것을 '통조림'이라고 부른다."
"소관은 처음 보는 것입니다. 이 통조림이라는 것을 어디에 쓰는 것이옵니까?"
"식량을 장기간 보존하는 데 사용되지. 이 상태에서 펄펄 끓는 물에 끓여내면 몇 년을 놔둬도 음식이 썩거나 상하지를 않아. 철판을 주석으로 감쌌기 때문에 안팎으로 녹도 슬지 않아 음식도 변질되지 않는다. 보관도 간편하고 병사 개개인이 들고 다니기에도 편해. 이것을 이용하면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에게 빠르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통조림 안에 담긴 미리 조리되어 있는 식량을 그냥 먹으면 되니 병사들이 따로 조리를 할 필요도 없어. 이른바 '전투식량'이라는 것이다."
"대단하군요."
"조만간 전투식량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 것이야. 그전에 척무관이 해줄 것이 있어."
"무엇이옵니까?"
"대도에서 가장 솜씨가 뛰어난 숙수를 데려와라. 통조림 안에 이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보관해야 전선에서 먹는 병사들도 입이 즐거울 것이 아닌가? 그리고..."
왕기가 설계도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시범적으로 심왕부에 있는 대장간에서 이대로 10개 정도만 만들어보라고 해. 철장들의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으니까."
설계도면을 받아든 척무관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통조림 따개의 설계도이다. 따개가 있어야 통조림을 따서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대나무로 소쿠리를 만드는 장인도 구해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곧바로 제작을 지시해 놓고 대나무 장인도 구해오겠습니다."
척무관이 다급히 뛰어가자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발달되어 있는 유리를 이용한 병조림을 생각했지만 주석이 있는 시대이니 깨지기 쉬운 병조림보다는 통조림이 더 나을 거야. 내가 생각한 대로만 진행되면 빠르고 적절한 보급 시스템은 생각보다 쉽게 구축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남은 건 빠른 정보 전달 시스템의 구축이야. 그것만 완성되면... 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로 무장한 병력들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내가 죽기 전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어디 한번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