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60화 (60/171)

#60. < 성혼(成婚) 그리고 내란(內亂)의 조짐 - 1 >

서기 1345년 11월 7일

원나라 황족이며 왕위를 가지고 있는 위왕의 딸이자 현대에서 자신의 연인이었던 이유나를 왕기가 납치하다시피 해서 심왕부로 데려온 지도 벌써 사흘이 흘렀다.

둘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기황후가 힘을 쓴 것인지 두 사람의 결혼과 관련된 황실의 허락이 바로 떨어졌고, 그 다음날 왕기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된 위왕의 딸은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심왕부의 가주전]

지난 사흘간 다시 만난 현대의 연인과 꿀같은 시간을 보낸 왕기가 승의공주에게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대의 아버지인 위왕은 일 년의 대부분을 대초원에서 보낸다는 거지? 결혼 승낙을 받으려면 내가 거기로 가야만 하고."

"맞아요. 카라코룸(Karakorum)에서 부하들과 함께 사냥을 하고 마유주를 드시면서 지내세요. 몽골 제일주의자이자 몽골족의 근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근본주의자이기 때문이지요. 왜요? 긴장되세요?"

"장차 나의 장인어른이 될 사람에게 찾아가 딸을 내놓으라고 부탁해야 되는 남자가 긴장이 안될 리가 있겠어? 나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러자 승의공주가 왕기의 품에 안기며 다둑거렸다.

"오빠에게 힘든 일을 시켜 죄송해요. 하지만 이 몸에는 이유나의 기억만 있는 게 아니라서요. 위왕의 딸로서의 기억도 함께 있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 몽골식의 결혼 풍습을 따르고 싶어요.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오빠의 능력이라면 모든 일을 손쉽게 처리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어느 남자나 자신의 여자 앞에서는 호기를 부리듯 왕기가 승의공주를 꼭 끌어안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걱정 말라고. 명색이 고려검황이라고 불리는 당대 제일의 고수가 바로 나니까. 결혼 승낙 따위를 받아내는 건 일도 아니야. 그럼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거야? 몽골족의 결혼 관습을 잘 몰라서..."

"신랑이 청혼을 위해 신부 집을 찾아가서 장인이 내는 시험을 상공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것이 몽골족의 결혼 풍습이에요. 그런 다음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지불하는 '신부값'과 신부가 결혼할 때 친정에서 들고 가는 '지참금' 문제를 협의하셔야만 해요. 위왕은 평생을 전쟁터를 떠돌아다녔던 사람이에요. 부하들을 이끌고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도 참여하셨던 분이시죠.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내는 시험이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일단 삶은 양의 대가리를 준비하셔야 하겠지요."

"삶은 양의 대가리는 어디다 쓰게?"

"거의 모든 신랑들에게 주어지는 공통적인 시험 문제가 있어요. 일종의 기출문제 같은 거지요. 오빠도 연습을 한번 해보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삶은 양의 대가리를 준비한 다음에......"

승의공주의 설명을 다 들은 왕기가 밖에 있는 척무관을 불러 삶은 양을 몇마리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서기 1345년 11월 9일

승의공주를 품에 안은 왕기가 호신강기를 두른 채 허공을 가르며 검은 자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몽골제국 초기의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동속도가 정말 빠르네요?"

"이건 약과라고. 그대가 힘들까 봐 천천히 가고 있는 거야."

자신의 능력을 뽐내며 자랑하던 왕기의 눈에 끝도 없이 펼쳐진 더 넓은 대초원 한가운데에 유럽풍의 큰 성이 하나 보였다. 성의 첨탑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올라가 있었고, 그 성 주위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파오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주위를 성벽과 물이 흐르고 있는 해자가 둘러싸고 있었다.

"대초원 한가운데에 난데없이 유럽풍의 성에 해자라니.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많이 다른데?"

"카라코룸의 성은 건물을 잘 짓지 못하는 유목민들을 위해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어게데이칸'이 유럽 건축가들을 시켜 지은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곳에는 '오르혼강'이 흐르고 있어서 물을 구하기도 쉽죠. 성내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여러 개 있기에 대도시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대초원 한가운데 지어진 성벽을 단숨에 뛰어넘은 왕기가 승의공주가 알려주는 거대한 파오 쪽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파오 안에서 위왕과 왕기의 면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인인 심왕께서 내 딸을 신부로 데려가겠다고?"

거대한 사발에 담긴 마유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신 위왕이 덥수룩하게 난 턱수염에 묻은 마유주를 닦으며 묻는 말에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손에 칼만 쥐여주면 강도와 다를 바가 없는 형색이로군. 전형적인 마초남이야. 장인어른으로 모시기에 피곤한 인물 같은데...'

속마음과 달리 왕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미 황실의 허락도 받았기에 위왕 전하의 승낙만 받으면 됩니다."

"좋네. 중원에서 고려검황이라고 불리는 심왕의 명성은 나도 익히 들어보았으니 내가 낸 시험을 통과하면 딸을 주도록 하겠네. 하지만 그냥은 곤란하지. 소중한 내 딸을 데려가려면 양들을 많이 내놓아야 할 것이야."

"재물이라면 저도 넉넉하게 있으니 원하시는 양의 숫자를 말씀하시지요. 단 양 세 마리에 병사 한 명을 따님의 지참금으로 주셔야 합니다."

"양 셋에 병사 하나라. 너무 과한 거 아닌가?"

"그 정도는 되어야 저도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부인을 맞이하기 위해 재물을 너무 많이 쓰면 여인의 미모에 홀렸다는 등 여색을 밝힌다는 등 좋지 않은 소문이 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소문은 따님을 위해서도 좋지가 않지요."

잠시 후 줄다리기를 하던 지루한 협상이 끝나자 위왕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양 천 마리를 내놓겠다라. 제법 손이 크군. 일단은 그렇게 합의를 보세. 하지만 내 딸을 데려가려면 일단 내가 낸 두 가지 시험부터 통과해야만 할 것이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자신도 있고요."

위왕이 파오 안에 앉아있던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가서 삶은 양을 가져오거라."

막 삶은 듯 뜨거운 열기가 후끈후끈 피어오르는 통째로 삶은 양이 사람들의 손에 들려 파오 안으로 들어오자 위왕이 말했다.

"자고로 남자는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가축과 사냥감을 잘 잡고 도축을 잘 해야만 하는 법이지. 칼을 쓰지 말고 손가락으로 삶은 양의 목 부분을 찢어 살과 뼈를 제대로 분리해 보게나."

"알겠습니다. 제가 승의공주에게 듣기로는 칼만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맞네. 칼을 사용한다면 어린아이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니까 말이야."

그 순간 오색찬란한 강기가 왕기의 손에서 피어났다. 왕기가 수강에 뒤덮인 손을 휘둘러 삶은 양의 목을 단숨에 베어냈다.

- 동강.

잘린 양의 목을 집어 들어 공중으로 던진 왕기가 일전에 비무를 할 때 삼수사비가 손을 떨듯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 투둑. 투두둑...

삽시간에 뼈와 분리된 살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자 위왕이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심왕의 무공이 뛰어남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려인이 그것도 왕족이라는 자가 도축을 이리 잘 할 줄은 미처 몰랐군. 미리 연습을 하고 온 것인가?"

"당연하지요. 위왕 전하의 소중한 딸을 데려가려고 하는데 이 정도 연습도 안 하고 오면 사위 될 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지난 이틀간 죽어라 연습했습니다."

"그래? 그 정성이 갸륵하군. 하하하..."

왕기가 맘에 드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위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왕기와 승의공주를 데리고 파오 밖으로 나섰다.

[성 밖의 대초원]

심왕이 위왕의 딸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성 밖의 대초원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말에 올라타 있는 승의공주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위왕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양 세 마리에 용맹한 나의 병사 한 명이니 지참금으로 병사 333명을 내어주면 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위왕."

"좋네. 양 천 마리라면 나도 다른 사람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아. 지금 해가 지평선 가까이 떨어지고 있으니 마지막 시험을 내도록 하겠네. 몽골족 전통의 '신부 잡기'라는 것이야. 내 딸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 지도를 받아서 말을 아주 잘 탄다네. 당연하지 않겠나? 말위에서 태어나 말위에서 죽는 것이 몽골족이니까 말이야. 내 딸이 출발한 후 마유주 3대접을 마시게나. 그런 후 말을 타고 가서 그녀를 산 채로 잡아오게. 단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여야만 할 것이야. 그럼 내 딸을 주지. 단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잡아와야만 할 걸세. 그리고 말에서 내려 경공술을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되네. 이건 자네의 승마술을 시험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위왕의 말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흥미롭다는 듯 마구 고함을 내지를 때 왕기가 물었다.

"빨리 잡아오면 그에 따른 혜택같은 건 없습니까?"

왕기의 말에 위왕이 해의 위치를 한번 가늠한 다음 말했다.

"혜택이라. 좋네. 해가 양의 어깨에 걸릴 때까지 잡아오면 양 세 마리당 병사 둘을 내어주지. 양의 뿔 위에 걸려 있을 때 잡아오면 양 하나당 병사 하나를 주지. 단 좀 전에도 말했듯이 자네가 말에서 내려서는 절대 안 될 것이야."

선심 쓰듯 위왕이 말을 내뱉자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저 고려인은 위왕 전하의 딸이 말을 얼마나 잘 타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 게다가 위왕 전하의 딸이 타고 있는 말은 카라코룸에서 제일 빠른 말이라고.

-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잡아오는 것도 힘들 텐데 말이야. 위왕 전하가 딸을 주기 싫은 모양이야.

구경꾼들의 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한 왕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다.

"그리하지요. 단 반드시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말을 끝마친 왕기가 마유주가 가득 담겨있는 가죽 주머니 쪽으로 걸어가자 위왕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백인장(百人長) 중에서 가장 말을 빨리 달리는 게리와 차오는 앞으로 나서라. 너희 둘은 내 딸이 말의 속도를 고의로 늦추지 않는지 같이 내달리며 감시를 하도록 해. 사랑에 빠진 내 딸이 뭔 짓을 할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말이야. 좀 전에 들었듯이 내 딸이 빨리 잡힐수록 너희들 중에 많은 숫자가 지참금으로 팔려가게 될 것이야. 그러니 절대 사정을 봐주지 말도록."

- 알겠습니다.

- 끼랴. 끼랴...

백인장 둘의 호위를 받으며 승의공주가 탄 말이 질풍처럼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할 때 왕기가 거대한 대접에 마유주를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배가 터지도록 마유주 세 잔을 다 들이켠 왕기가 자신에게 부여된 말 쪽으로 다가가며 승의공주 일행이 달려간 지평선 쪽을 바라보았지만 너무 멀리 도망을 갔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 휘익.

말의 안장에 올라타며 왕기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양 천 마리에 용맹한 몽골 병사 천명을 구할 수 있으면 남는 장사이지. 최대한 빨리 잡아와야만 한다.'

- 끼럇.

힘차게 말의 배를 걷어차자 왕기가 탄 말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왕기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말이 늙어빠진 노마(老馬)라는 것을 말이다. 달리는 속도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왕이 겉모습과 달리 제법 잔꾀를 쓰는군. 하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아.'

그 순간 왕기의 양쪽 옆구리에 걸려있던 쌍검이 90도 각도로 치켜올라가며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웠다.

- 철컹. 철컹.

쌍검을 마치 비행기의 날개처럼 활짝 펼친 왕기가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의 네 다리에 박혀있는 쇠로 된 편자에 자기장을 강력하게 걸었다. 그러자 힘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던 말이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허공을 땅처럼 밟으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난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가수스(Pegasus)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승의공주 일행을 무서운 속도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 히이잉.

잠시 후 승의공주를 품에 안은 왕기가 위왕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하늘을 훨훨 날아서 말이다.

"약속대로 해가 아직 양의 뿔 위에 걸려 있으니 병사 천명을 제게 주셔야 합니다. 전 분명히 말에서 내린 적이 없습니다."

말을 탄 채 땅에 착륙한 왕기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대단하다며 감탄성과 환호성을 연신 내질렀고, 그에 반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초원의 사나이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일단 다시 파오로 들어감세. 나의 사위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