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9화 (59/171)

#59. < 양자택일(兩者擇一) - 2 >

"그 이야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지요. 그건 그렇고... 축하해요."

자신이 절대 물러시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한 듯 기황후가 화제를 돌리며 밑도 끝도 없이 축하한다는 말을 하자 왕기가 물었다.

"뭘 축하한단 말이십니까?"

"이런... 심왕부의 정보력이 아직 황실에 비해 많이 뒤처지는 모양이로군요. 한 달 전 심왕께서 춘향각을 나선 후 춘향각주가 왕성하게 진두지휘를 하며 당대 최고수라는 고려검황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서 '고려객잔'을 대륙 곳곳에 세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돈이 안 되는 원나라와 고려의 국경지역과 저 멀리 서역으로 가는 비단 길 입구 쪽에 중점적으로 말이지요. 아마도 심왕께서 그렇게 지시를 한 것이겠지요. 고려와 서역 쪽의 정보를 빠르게 얻기 위해서 말이에요."

"맞습니다. 대륙의 정세와 정보에 어두운 고려를 위해서 제가 그렇게 지시를 하였습니다. 언제까지 원나라에서 오는 사신 일행에게서 정보를 구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활발하게 토지를 매입하여 고려객잔 건설을 지휘하던 춘향각주가 일주일 전 대도로 돌아와 두문불출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의원이 춘향각으로 비밀리에 불려갔지요."

눈을 부릅뜬 왕기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맞아요. 춘향각주가 임신을 한 것이지요. 심왕과 합방을 한지 한 달이 다 돼가니 본인 스스로가 여인의 직감으로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에요. 예정된 달거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급하게 대도로 돌아와서 의원에게 진맥을 받은 것이겠지요."

그 순간 왕기의 머릿속으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공민왕과 결혼을 했던 노국공주가 무려 16년 동안 아기를 출산하지 못했던 것이 자신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다시 재회를 하기도 전에 벌써 다른 여인과의 관계에서 아기를 본 자신을 현대에서 사귀었던 연인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걱정이었다.

"그래서 축하드린다는 거예요. 아마도 이 정보를 심왕부쪽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에요. 춘향각에서 꽁꽁 숨기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심왕께서 생각보다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심왕부의 정보력을 폄하하며 뭐라 떠들어 대는 기황후의 말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왕기의 머릿속으로는 의대를 다닐 때 배웠던 임신과 관련된 의학 지식들이 빠르게 검색되고 있었다.

'불임의 경우 통계적으로 40프로 정도는 남자의 결함에서 발생한다. 무정자증 같은 정자 형성 장애나 정관 폐쇄 같은 정자 통과 장애가 대표적이지. 하지만 춘향각주가 이틀간의 관계만에 임신을 한 것으로 보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문제야. 그럼 노국공주의 신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여성 불임의 대부분은 난소의 배란 장애와 나팔관이라고 불리는 난관 기능의 장애 그리고 자궁의 장애이다. 하지만 노국공주는 완전한 불임의 신체는 아니야. 공민왕과의 사이에서 두 번이나 임신을 한 것으로 역사에 나와 있으니까. 16년 동안 중간에 딸을 한번 유산하고 마지막에 아들을 낳는 과정에서 난산(難産)으로 인해 아들과 함께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지. 단지 임신이 어려운 체질인 것뿐이야. 결국 난관 기능의 장애일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건 직접 진단을 해봐야 하겠지만 태생적으로 나팔관이 좁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 그걸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 만약 없다면 나와 그녀는 또다시 지옥을 맞이하게 될 것이야. 고려 조정의 대신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부부를 들들 볶아대겠지. 그렇다고 그들을 다 쳐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지. 수틀리면 다 쳐죽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내가 왕이라고. 절대군주인 고려의 왕.'

과격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왕기가 아직도 춘향각주를 언급하며 떠들어 대고 있는 기황후를 보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시지요. 춘향각주가 낳은 아이는 춘향각의 뒤를 이를뿐 고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왕씨를 성으로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고요. 제가 궁금한 것은 황후마마를 보고 저처럼 김태희를 닮았다고 말한 여인입니다. 지금 당장 그 여인을 만나게 해주시지요. 그게 아니라면 전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한 왕기의 태도에 기황후가 고용보를 보며 말했다.

"내전에 거처하고 있는 위왕(魏王)의 딸을 이리로 데려오거라."

"네. 황후마마."

- 드르륵.

방문을 열고 나가는 고용보를 보며 왕기가 뇌까렸다.

'위왕의 딸이라는 것을 보니 노국공주가 맞는 모양이로군. 그날 나와 같이 과거로 넘어온 것이 분명해.'

왕기의 뇌리 속으로 자신이 과거로 넘어오던 그날 그녀와 마지막으로 데이트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전시회를 맞아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천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전시되어 있는 앞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델처럼 늘씬하고 아리따운 여인이 왕기의 팔짱을 낀 채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후우...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뭘 알았다는 거야?"

"오빠가 용산에서 보자고 하길래 핸드폰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봤지. 아니나 다를까 공민왕의 천산대렵도를 특별 전시 중이라고 떡하니 나와있더라고.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이 그림만 전시하면 여기로 오고 있잖아. 이 그림이 그렇게 좋아?"

"그래. 난 이 그림이 좋다. 볼 때마다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의 호쾌함이 느껴져.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놀러 와서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었어."

"오빠가 왕(王)씨라서 그런 건 아니고? 만약 이(李)씨였다면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광화문 쪽으로 매번 데이트를 갔을지도 모르지. 그림이 좋은 거야 아니면 공민왕이 좋은 거야?"

"그림도 좋지만 공민왕이라는 사람이 좋다."

"어떤 면에서? 오빠 때문에 나도 좀 알아봤는데 실패한 군주에 가깝던데? 결국 자신들의 신하에 의해서 숙청을 당한 군주였잖아."

"그건 결과론적인 평가이지. 공민왕은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고려의 자주독립을 추진하고,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광활한 대륙을 본거지로 삼았던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며 더 넓은 요동으로까지 진출한 마지막 정복 군주였다고. 원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고려 말기에 그런 일을 추진한 그 기상이 남다르잖아? 그리고 노국공주와의 지극한 로맨스도 아름답고. 자신이 사랑하던 노국공주가 죽은 후 하루 종일 그녀의 초상화만 바라보며 정무를 완전히 내팽개쳤다잖아. 뭐랄까? 같은 남자로서 그 웅대한 포부와 자신의 여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본받고 싶다고나 할까?"

"그러신 분이 오늘도 빈손으로 나온 거야?"

"빈손이라니?"

"남자가 프러포즈를 하려면 꽃도 사들고 오고 하다못해 은반지라도 담긴 상자라도 들고 와야 할거 아니야? 오래간만에 데이트를 신청하길래 기대를 잔뜩 하고 나왔더니..."

팔짱을 더욱 강하게 끼며 하는 유나의 말에 몸을 움찔한 왕기가 주저하며 물었다.

"내가 하면... 받아줄 건가?"

"10년 가까이 사귄 여자에게 그건 좀 비겁한 질문 같은데? 오빠는 날 책임질 생각도 없으면서 여태까지 나랑 사귀었던 거야?"

"처음 사귈 때랑 내가 입장이 많이 다르잖아? 그때는..."

왕기의 말을 유나가 단숨에 잘랐다.

"그때는 미래에 고수익이 보장되는 의대생이었는데 지금은 공돌이라 프러포즈를 못하겠다고? 그건 나를 상당히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내가 오빠의 수익을 보고 사귄 줄 알아? 돈이야 결혼해서 둘이 같이 맞벌이를 하면서 벌면 되는 거지. 난 으리으리한 큰 집도, 강남의 비싼 아파트도 필요 없어. 둘이 같이 벌며 조금씩 장만해 나가는 게 부부가 사는 재미잖아? 난 단지 오빠라는 사람이 좋아서 사귄 거라고. 돈도 아니고 의사라는 직업도 아니고 단지 사람 그 자체가 좋아서 말이야. 공돌이가 되면 사람이 기계나 로봇으로 바뀌기라도 하나? 안 그렇잖아? 그러니... 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다음에 만날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란 말이야. 나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힘들어. 주변에서 들이대는 놈들도 많고 집에서 빨리 시집가라는 압박도 심하다고. 그런 날 오빠가 구해줘야 할 거 아니야?"

감동을 먹었는지 왕기가 팔짱을 꽉 낀 유나의 손을 꼭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반드시 프러포즈를 하마. 남자로서 약속한다."

왕기가 고개를 돌려 연인인 유나의 입술을 덮치자 유나가 기다렸다는 듯 왕기의 목을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그렇데 두 사람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할 때 왕기의 머릿속으로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리링. 축하드립니다. 귀하께서는 과거로 넘어갈 자로 선택되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왕기는 자신의 몸이 순식간에 한줄기 연기처럼 변하며 천산대렵도 속으로 강하게 빨려 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상념을 끝마친 왕기가 뇌까렸다.

'분명 유나도 그때 과거로 끌려왔을 가능성이 높아. 둘이 한 몸처럼 얽혀있었으니까.'

- 드르륵.

문이 열리며 곱게 단장한 늘씬한 체형을 지닌 위왕의 딸이 기황후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침을 꿀꺽 삼킨 왕기가 물었다.

"그대가 황후마마를 보며 김태희와 닮았다고 말한 여인이오?"

그러자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맞아요. 황후마마께 그렇게 말했더니 저와 똑같은 말을 한 자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분이 심왕 전하라고 들었습니다. 심왕 전하께서는 고려인이라고 알고 있어요. 고려인이라면 단군 신화를 모르시지 않겠지요?"

"당연히 알고 있소이다."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이 하늘에서 비, 바람, 구름을 거느리고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하지요. 그중에서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자신이 현대에서 넘어온 자가 맞는지 테스트한다는 것을 직감한 왕기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비가 떠오르지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가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뭔 뜻인지를 몰라 기황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을 때 왕기가 처음 보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서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나와 결혼을 해주시지 않겠소이까?"

그러자 위왕의 딸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에 고려검황이라고 불리는 심왕은 약속을 잘 지킨다고 하더니... 좋아요. 그대의 청혼을 수락하지요."

너무나 빠른 진도에 기황후와 고용보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 위왕의 딸을 품에 안은 왕기가 방문을 열고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라갔다.

[심왕부의 가주전]

마치 보쌈을 하듯 위왕의 딸을 데리고 심왕부로 돌아온 왕기가 과거로 넘어와 처음으로 짓는 편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 의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고려를 살리고 조선을 역사 속에서 지워도 되는 건지, 원나라를 살리고 명나라를 지워버려도 되는 건지 고민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 아니 그전에 물어보자. 유나 넌 어떻게 과거로 넘어오게 된 거야?"

왕기의 말에 위왕의 딸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빠가 갑자기 연기처럼 변하며 그림 속으로 빨려갈 때 내가 그 연기의 끝자락을 다급한 마음에 손을 휘둘러 붙잡는 시늉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머릿속에서 갑자기 메시지가 들려오는 거예요."

"뭐라고 말이야?"

"지금 그 손을 놓지 않으면 오빠와 함께 알 수 없는 과거로 끌려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요."

"그럼 손을 놓지 그랬어?"

"그럼 두 번 다시 오빠를 보지 못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놓지 않고 버티니까 나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눈을 뜨니 원나라 위왕의 딸이었어요. 자세한 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그보다... 고려와 조선을 두고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전 굳이 조선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조선이 등장한다는 것은 임진왜란과 을사늑약이 결국 일어나게 될 거라는 뜻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세종대왕과 이순신 같은 조선 시대의 훌륭한 인물들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끝이 너무 안 좋아. 유나도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인데?"

"오빠가 이 시대로 오면 무얼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봤으니까요."

"그럼 원나라와 명나라는 어떻게 생각해?"

"굳이 둘을 두고 고민을 해야 하나요? 대륙 전체를 고려가 다 먹어버리면 되지 않겠어요? 소문으로 들은 오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당장은 가능할 거야. 단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말이지. 너나 나나 과거로 오긴 했지만 영생을 부여받은 건 아니라고. 언제가 우리도 죽는다. 내가 죽고 나면 고려가 뒷감당을 못 할 거야. 오히려 보복을 당해 고려가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인 인구 숫자가 너무 딸리니까. "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죠."

"어떻게 말이야?"

"중국을 하나로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잘게 쪼개버리는 거예요. 중국에는 열다섯 개가 넘어가는 소수민족들이 자신들의 터전에서 살고 있다고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나라를 세우게 뒤에서 조종을 하는 거죠. 그 옛날 오호십육국이나 춘추전국시대처럼. 그럼 오빠가 죽은 뒤에도 고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순간 과거로 넘어와 중국과 조선의 처리를 두고 오랜 고민을 하던 왕기는 자신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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