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8화 (58/171)

#58. < 양자택일(兩者擇一) - 1 >

- 지금 즉시 황후마마의 침실로 오시길 바랍니다.

서찰을 읽어본 왕기의 표정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물들어갔다. 잠시 후면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사귀었던 자신의 연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자신으로 인해 그녀까지 덩달아 과거로 끌려왔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이 교차했기 때문이었다.

- 드르륵.

가주전을 문을 열고 황궁에 있는 기황후의 침실로 가기 위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왕기의 머릿속으로 과거로 끌려왔던 그날 하루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서기 2020년 8월 1일

[서울대학교 신소재 공동연구소]

코로나로 인해 대한민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여름 방학을 맞은 대학가도 썰렁해져 평상시라면 서울대생들로 북적거렸을 연구소 인근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금속, 무기, 유기 및 이들을 조합한 신소재 분야의 기초연구 활성화와 고급 연구인력의 양성과 훈련 및 산학연 공동연구개발이라는 기치 아래 서울대학교와 민간기업이 손을 잡고 세운 국내 최초의 재료 분야에 특화된 연구소에서는 석사와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대학원생들이 방학기간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나와 열심히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신소재 공동연구소에 있는 철강연구센터 소속의 한 실험실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왕기가 요 며칠 밤을 새워가며 실험한 고망강간의 인장강도와 피로강도의 시험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일정한 패턴은 분명히 있는데 말이야. 살짝씩 튀는 데이터들이 있어. 이대로 논문을 써도 될지 모르겠군. 교수님께 여쭤봐야 하겠는걸."

잠시 후 왕기는 자신의 지도교수 방에서 석사 논문과 관련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 자동차용 고망간강의 열처리에 따른 석출경화와 그에 따른 물성 변화.

왕기가 쓰고 있는 가제의 석사 논문을 읽어보고 있던 지도교수가 물었다.

"마지막 인장강도 실험에서 튀는 데이터가 있었다고?"

"네. 인장강도 값 3개 정도가 예상 그래프의 오차 범위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냥 무시해. 그 결괏값은 없애버리고 그래프로 정리해서 논문을 완성하도록 하라고. 박사 논문도 아닌데 큰 상관없어."

"그래도 되겠습니까? 포스코(POSCO)에서 산학연으로 내어준 프로젝트의 일환인 실험인데요? 실제로 자동차에 적용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 대학교에서 하는 실험들은 대학원생들을 이용한 일종의 노가다 같은 거라고. 포스코에 딸린 연구소가 없어서 서울대에 프로젝트를 준게 아니란 말이지. 잘 알면서 왜 그러나? 정부가 예산으로 책정한 연구자금을 따내기 위해서는 산학연이라는 명분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서울대가 들어가 있는 거야. 고망간강을 상품화할 거면 포스코 쪽에서 다시 정밀하게 실험을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이 정도면 석사 논문으로 충분히 훌륭하니까 이대로 정리해서 논문 마무리 짓도록 해. 지도교수인 내가 'OK'하고 도장을 찍어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듣고 있던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반대로 아무리 잘 쓴 논문이라고 해도 지도교수가 'NO'하면 학위를 못 받게 되지. 그런 이유로 대학원생들이 교수들의 현대판 노예가 되는 것이야.'

- 툭.

가제의 논문을 책상 위로 던진 지도교수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자네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잘 왔어. 포스코 쪽에서 연구원을 뽑는다고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더군. 왕기 자네를 추천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나?"

"저를 말입니까?"

"그래. 의대에서 금속공학과로 전과를 했다고 해서 걱정을 했었는데 다른 학생들보다 공학적인 지식과 분석력이 더 뛰어나더군. 수학도 아주 잘 하고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기 때문에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어봤고 그런 쪽으로 공부도 많이 했었습니다. 서울대 의대는 뭐랄까. 갈 성적이 되었기 때문에 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결국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지만요."

"특히 자네는 대학원 생활에 아주 잘 적응을 하더군. 내가 따로 시키는 일들도 아주 야무지게 잘 처리하고 말이야."

"다른 대학원생들과 달리 전 이미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상명하복의 조직 생활에 익숙한 편이라서 그럴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박사 과정을 밟지 않겠나? 이왕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공학도가 된 이상 박사 학위도 따봐야지."

"박사 과정을 말입니까? 교수님. 전 다른 대학원생들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의대 예과 2년에 본과 1년을 다녔고, 금속공학과로 전과를 해서 2학년부터 다시 3년을 더 다녔습니다. 거기에 군대도 현역으로 다녀왔고 석사 과정 2년까지 합치면 10년입니다. 나이가 벌써 서른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는 박사과정을 다니기에는..."

그 순간 지도교수가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쫙 폈다.

"앞으로 5년. 딱 5년만 더 다니게. 그럼 내가 책임지고 박사 학위를 내어주지. 회사를 다니면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는 산학연구생이라는 제도가 있으니까 말이야."

"산학연구생 말입니까?"

"맞네. 돈도 벌면서 박사 학위도 딸 수 있는 과정이야. 물론 박사 과정 입학시험인 영어와 전공시험은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쳐야만 하겠지. 전공이야 같은 금속공학과 교수가 채점을 하니 낙제를 받을 일이 없겠지만 영어는 영문과 교수들이 채점을 하기 때문에 낙제를 하면 끝이야. 내가 받아주고 싶어도 받아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자네라면 그 정도는 가뿐히 통과할 테지. 수업을 받아 학점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따야만 할 테고 말이야. 회사를 다니며 논문을 쓸 시간이 부족할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걸세. 포스코 쪽에 내가 말을 잘 해줄 테니 시간 빼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걸세."

그 순간 왕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날 5년간 더 노예로 부려먹겠다는 소리로군. 그것도 포항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이야.'

그 순간 왕기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교수님. 혹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포스코 연구원으로 추천을 받으려면 박사 과정을 밟아야만 하고, 그걸 포기하면 추천도 날아가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않겠나? 이런 좋은 취업자리를 아무에게나 그냥 덜컥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요즘처럼 취업이 힘든 시기에는 더욱 그렇지. 세상이 자네 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나이가 충분히 되지 않았나? 자네가 포기하면 박사 과정을 밟을 다른 학생을 추천할 걸세."

"시간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분간은 신소재연구소로 나오지 않아도 되니 집에서 며칠 푹 쉬면서 생각해보게. 논문을 쓴다고 몇 달간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하지 않았나? 어차피 이제는 논문용 실험도 다 끝났으니 집에서 컴퓨터로 워드 작업만 하면 될 테니까 말이야."

"잘 알겠습니다. 교수님."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 집에서 논문 작업을 할 파일이 담긴 USB 하나만을 챙긴 왕기가 인천으로 출발하기 위해 연구소 앞을 지나가는 2번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인천에 위치한 한 철공소]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의 철공소는 점심 무렵이 되니 찜통을 방불케 하고 있었고, 그런 철공소 안에서 코로나 예방을 위해 마스크까지 착용한 직원들이 다양한 작업들이 진행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전기로에서 녹인 쇳물을 도가니로 퍼서 요즘 한창 인기라는 무쇠솥 형틀에 부어 넣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택의 대문으로 사용될 철문을 주문한 치수에 맞춰 철판을 재단 및 용접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맞춤 주문한 식칼을 제작하기 위해 모루 위에 올려진 벌겋게 달아오는 쇠를 한창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런 철공소 한쪽 편에 위치해 있는 컨테이너 사무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만 돌아가고 있는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온 왕기가 물었다.

"아버지. 철공소에서 만드는 제품의 종류가 많이 늘어난 것 같은데요?"

"코로나 때문에 지금 경기가 어떤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주물, 절단, 용접, 열처리 등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다 받고 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야. 근데... 논문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더니 오늘 어떻게 온 거냐? 그것도 훤한 대낮에 말이야."

"바쁜 일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이젠 틈나는 대로 철공소 일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너 없어도 잘 돌아가니 아서라. 네 일이나 알아서 잘 해. 네 여자친구인 유나랑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냐? 너 덕에 의사 며느리를 보나 했는데 말이야."

"유나가 인턴 끝나고 펠로우 하느라 워낙 바빠서 요 근래 통 못 봤어요. 특히 전공이 감염내과 쪽이라 코로나 터지고 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더라고요."

"둘이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네가 군대 갔을 때도 별말 없이 기다려준 앤데 빨리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냐?"

"결혼요? 글쎄요. 유나가 나랑 사귄 이유가 같은 의대생이라는 이유가 컸을 텐데 공돌이가 된 저와 결혼을 해줄지 의문이네요."

"직접 물어보기나 했냐? 유나가 그렇게 속물적인 아이는 아닌 것 같아 보이던데 말이야. 사랑은 때로는 모든 걸 극복하게 해주는 법이지."

"안 그래도 오늘 시간이 나서 전화를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얼굴 한번 보자고 말했어요."

"잘 했다. 데이트하면서 잘 꼬셔봐. 어차피 결혼은 남자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야. 여자가 그러기로 마음을 먹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란다."

그 순간 자신의 발밑에 보이는 홍성궁의 앞뜰을 발견한 왕기가 회상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유령처럼 소리 없이 지상으로 내려가 기황후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는 고용보에게 말했다.

"내가 왔다고 고해주게나."

고개를 끄덕인 고용보가 기황후의 침실 쪽을 향해 고했다.

"황후마마. 심왕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 하시게."

- 드르륵.

오래간만에 다시 찾은 기황후의 침실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새로운 게 있다면 기황후가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의 초상화였다. 혹시나 현대를 살던 자신의 연인이었던 유나의 초상화일까 봐 왕기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마마. 누구의 초상화를 보고 계시는 것이옵니까?"

- 빙글.

기황후가 초상화를 말없이 반대쪽으로 돌려주자 왕기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춘향각주의 초상화가 아닙니까?"

"맞아요. 심왕께서 이 여인과 이틀씩이나 합방을 한 적이 있다고 하길래 초상화를 구해와서 보았지요."

"그건 사랑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춘향각주가 제 이상형도 아니고요."

"사랑? 이상형? 왕족의 결혼에 그딴 것이 왜 필요한가요? 서로 살 부딪치며 정붙이고 살아가는 것이 왕족의 결혼입니다. 중요한 것은 심왕께서 이 여인과 함께 합방을 성공적으로 했다는 것이지요. 배우자의 외모가 이 정도만 되면 심왕께서 충분히 발기가 된다는 것만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또다시 종마(種馬)라도 된듯한 기분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왕기가 물었다.

"그래서 그 정도 외모의 여인을 찾으셨습니까? 제 배우자를 찾는 연회를 오늘 아침에 갑자기 중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심왕께서 평상시보다 많이 성급하시군요? 마음속으로 신경 쓰이는 여인이 있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지요. 연판장에 대한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이미 들었습니다. 황후마마와의 약속은 깨진 것이지요.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황후마마를 생각해 고려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있는 기씨 일족을 살려드리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만 그들이 절 배척하기로 결정한 이상 저 또한 그리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이지요."

"자고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였지요. 미우나 고우나 그들은 제 오라비이며 친족들입니다. 양자택일을 하시지요. 고려에 있는 제 친족들을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본인이 나서서 심왕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공주를 배우자로 적극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를 결코 찾지 못하실 뿐만이 아니라 절 적으로 돌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매번 선택을 강요받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나는지 왕기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활활 피어올랐다. 이를 악문 왕기가 단정적인 어조로 내뱉었다.

"싫습니다. 제가 황후마마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제 능력이 모자라서 그녀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절 잘못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수틀리면 지금 당장 고용보를 고문해 그녀가 누군지 찾아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이 자리에서 황후마마를 납치해 갈 수도 있지요. 검황이라고까지 불리는 저의 행사를 막을 자가 있겠습니까? 생살을 얇게 저며 포를 뜨는 고문을 황후마마께서 견뎌내실 수 있으실지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정히 기씨 일족을 살리고 싶으시면 고려에서의 모든 권력과 재물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지금 당장 원나라로 넘어오라고 하시지요.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제가 봐줄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자들이니까요. 황후마마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전 한다고 말하면 정말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으으음..."

단호한 왕기의 태도에 신음성을 흘리던 기황후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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