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7화 (57/171)
  • #57. < 대계(大計)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다 - 3 >

    '내가 갑자기 과거로 넘어와 공민왕의 몸으로 빙의를 해서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기도 했었지만 비교적 빠르게 적응을 한 편이다. 내가 살던 현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낸 적이 거의 없어. 김태희라는 현대의 인물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건 바로 기황후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였지.'

    왕기의 뇌리로 지난 10월 4일 홍성궁의 앞뜰에서 일어났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척무관에 의해 죽은 쾌검청랑(快劒靑狼)의 제자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 때였었다.

    "사부께서는 평생을 쾌(快) 하나에 바치셨다. 하지만 쾌검은 일종의 편법이야. 그러는 바람에 쾌검의 속도를 감당하는 자를 만나면 속절없이 지게 되는 약점이 있으셨지. 그렇지만 난 다르다. 편법을 버리고 난 정통 검법을 택하였으니까."

    쾌검청랑의 제자가 목검을 들어 올리자 같이 목검을 들어 올리며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던 왕기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익힌 것이 화산파의 매화검법인 것인가?"

    순간적으로 움찔한 상대방이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인가?"

    "나 역시 매화검법을 익혔으니까. 빤히 보고서도 모르면 내가 바보지."

    그때였다. 최고조로 끌어올린 왕기의 감각에 가까운 전각에서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서는 것이 잡혔고, 원나라 병사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일제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색으로 도배한 황자의 손을 잡고 나온 기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방금 전 보고를 받았어요. 정림방의 당주가 대련을 하다가 중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아무쪼록 피를 보지 말고 대련을 하라고 명했거늘..."

    당겨진 실처럼 팽팽했던 분위기가 기황후의 등장으로 깨지자 검을 내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선 왕기가 기황후 쪽으로 몸을 틀며 부지불식간에 내뱉었다.

    "김태희?"

    빠르게 회상을 끝마친 왕기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단 한 번이었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억을 더듬다가 갑자기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의 왕기가 뇌까렸다.

    '기황후가 그걸 용케 기억해 내서 서찰에 적어 보냈다는 것은 나 말고도 기황후를 보며 김태희를 닮았다고 말한 자를 만났다는 뜻일 것이다. 김태희를 알고 있는 자가 이 시대에 나 말고도 존재한다는 것이야. 이 고려 말엽의 아득한 과거에 말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딱 하나뿐이야. 설마 그녀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척무관을 보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고용보에게 사람을 보내거라. 내가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이 최대한 빨리 황후마마와 독대를 하고 싶다고 말이야. 반드시 확답을 받아서 들고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전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척무관을 보며 왕기가 덧붙였다.

    "그리고 간부급들을 모두 들어오라고 해라. 긴급회의를 해야 하겠다."

    "네. 전하."

    잠시 후 가주전에서 척무관과 박별감 그리고 무지와 무장이 앉아 있는 가운데 왕기가 척무관의 입을 통해 고려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받고 있었다.

    "...황후마마의 뜻을 거역한 기철 승상이 주도한 부원배들이 고려에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고 하옵니다. 그걸 무마하기 위해서 황후마마가 직접 전하의 배필을 정하겠다고 움직인 것이고요."

    "연판장이라. 고려의 부원배들이 뜻을 모으든 연판장을 작성하든 별로 중요치 않다. 어차피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었던 자들이니까. 척무관은 지금 즉시 고려로 사람을 보내어 날 차기 왕으로 추대하기로 약조한 척가와 최가에게 최대한 빨리 명단을 작성해서 내게 보내라고 하거라."

    왕기의 말에 척무관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하. 연판장에 서명을 한 자들의 명단은 입수하기가 어렵습니다. 누구인지 대략 짐작은 가나 정확힌 명단은 연판장을 입수해야만 가능하지요. 하지만 기철 승상이 철통같은 호위 속에서 깊숙한 곳에 보관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척씨와 최씨 가문의 힘으로는 입수하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내가 언제 연판장에 서명한 자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보내라고 했느냐?"

    "그럼 무엇을..."

    "살생부(殺生簿)를 작성해서 보내라는 것이다. 기황후와의 약속은 연판장으로 인해 이미 깨졌다. 내가 고려를 좀먹고 있는 기씨 일족을 살려줘야 할 의무가 사라진 것이지. 그러니 고려 조정의 녹을 먹고 있는 자들 중에서 죽일 자와 살릴 자의 명부를 작성해서 내게 보내라는 것이니라. 단 두 가문이 서로 의논을 해서는 안 될 것이야. 그럼 교차 검증하는 의미가 사라져 버릴 테니까. 차후에 내가 반드시 검증을 할 테니 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전하거라. 친하다고 봐주는 것도 안 되고, 억하심정이 있다고 해서 집어넣는 것도 허락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내 손에 그 두 가문의 피를 묻힐 것이야. 내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 척무관이 단단히 경고를 해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하. 소관이 미리 엄중하게 경고를 해두겠습니다."

    "한 상단의 수장이 되어도 누군가를 해고하지 않으면 진정한 수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칼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어야만 진정한 권력자라는 뜻이지.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고려 조정에서 녹을 먹고 있는 신하들의 생살여탈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만 백성에게 천명해야 할 필요가 있어. 내가 고려의 왕이 되려면 한바탕 신명나는 칼춤을 춰야만 할 것이야. 연판장 건은 그 정도로 넘어가고... 새로운 작물과 관련된 건은 누가 맡고 있느냐?"

    왕기의 물음에 박태환 별감이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하. 척무관의 명을 받아 소인이 맡아서 일을 진행하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지시하신 것처럼 새로운 품종들의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심왕부 직할지의 넓은 경작지를 준비해 놓았고, 농사를 잘 짓기로 소문난 농부들을 대거 뽑아서 대기시켜 놓은 상태입니다. 본인들의 농사를 포기하는 대신 심왕부에서 수고비를 넉넉하게 주기로 말해뒀으니 내년 가을에 대량의 종자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고려 전역으로 옮겨서 심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박태환 별감의 말에 왕기가 종자와 묘목이 가득든 꾸러미들과 함께 책 한 권을 꺼내어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각 종자와 나무들의 사육방법과 특징 등을 틈나는 대로 적어놓은 책이다. 이걸 참고해서 오늘 당장 심왕부 직할지로 말을 타고 가서 경작지에 심도록 하거라. 박별감이 맡은 이번 일에 고려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야. 이 일만 잘 해낸다면 조만간 고려에서는 배곯는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 역대 그 어떤 왕도 못해낸 일을 박별감의 손으로 해낼 수 있다는 뜻이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될 것이야.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네. 전하.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경작지 주위에 경비도 확실하게 세우도록 해. 힘들게 구한 종자를 다른 자들이 훔쳐가거나 경작지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내가 직접 박별감의 목을 칠 것이야."

    "알겠사옵니다. 저하. 소인의 목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심왕부 소속의 군사들을 부려서 확실하게 경비를 서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해. 그리고 이번 일에 방해를 가하는 자는 별도의 보고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상관없다. 그러한 행사에 항의를 하는 자들은 있으면 내 이름을 팔아도 좋아. 고려검황이든 심왕이든 강릉부원대군이든 그 어떤 이름이라도 상관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방해를 하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보고해. 내가 직접 날아가서 모조리 다 쳐 죽여줄 테니까. 설사 당사자가 원나라 황제라고 해도 죽여버릴 것이니라. 그만큼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야."

    "무슨 말씀인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결의에 가득 찬 눈빛의 박별감이 꾸러미를 잔뜩 앉고서 가주전을 나가자 왕기가 무지를 보며 물었다.

    "시다발이는 내가 적어준 것들을 공부 좀 하였느냐?"

    "네. 전하. 전하께서 서찰에 적어주신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것과 '고려 부호'라는 것을 공부하였습니다."

    "공부해보니 어떠하더냐?"

    "전하께서 창안하신 훈민정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14개의 자음과 12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조합하여 소리를 내는 법칙만 깨달으면 누구라도 자신의 말을 곧바로 글로 쓸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단 26개의 글자만 외우면 가능한 일이지요. 글자 하나하나마다 뜻을 가지고 있는 한자(漢字)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자문을 외워도 경전 하나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내가 고려의 왕이 되면 정식으로 고려의 문자로 지정될 훈민정음은 비록 내가 창안하기는 했지만 참으로 대단한 보물 중에 보물이니라. 훈민정음은 사용법에 미숙하여 설사 몇 자 틀리게 적더라도 읽는 사람이 다 이해가 가능한 문자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뜻이 아니라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이기 때문에 발음이 비슷하기만 하면 평상시에 익숙하게 사용하던 말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저절로 해석이 될 것이니까. 한 글자만 잘못 적어도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한자와는 차원이 달라. 무지 넌 심왕부에 모인 천 명의 장정들에게 훈민정음을 다 익히게 만들어야만 한다.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도 익힐 정도로 쉬운 문자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야. 훈민정음을 익히지 못한 자는 병사로 임명하지 않을 것이고, 녹봉 또한 주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 압박을 가하거라. 그럼 눈에 불을 켜고 배울 테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종대왕이 창시한 훈민정음을 마치 자신이 만든 것처럼 내세우며 낯 두껍게 말을 하던 왕기가 갑자기 무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장 너도 반드시 익혀야만 한다. 그래야 장차 고려어로 능숙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 고려의 장수가 고려어로 문서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러자 무장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소승도... 아니 소인도 훈민정음을 벌써 다 익혔습니다. 아무리 제 머리가 사형만 못해도 26글자를 못 외울 정도로 석두는 아니지요.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요. 부여부에 남아있던 발해국의 후손들이 모여살던 마을에서는 고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려의 말에는 이미 익숙하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좋아. 한 달 뒤에 본 왕이 직접 검사를 하겠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천명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게 할 것이야. 그 시험에서 탈락한 자는 경을 치게 될 것이니 다들 열심히 공부하거라."

    - 네. 알겠습니다.

    가주실에 있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칠 때 무지가 손을 들어 물었다.

    "전하. 고려 부호는 어디에 사용하는 것입니까? 자음과 모음을 각각 장단(長短)으로 표시하는 것을 보아 전장에서 사용하는 깃발 신호나 봉화처럼 통신에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정확한 사용법을 모르겠습니다. 깃발이나 봉화로 전달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구조라서요."

    모스 부호(Morse code)를 고려 문자에 맞게 만들어서 적어준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느니라. 본 왕이 생각하는 특별한 통신 수단이 있다. 그것이 개발되면 병사들의 전진과 후퇴, 화살을 쏘라는 등의 간단한 몇 가지 신호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만들어 통째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야. 만약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대도에서 개경까지 일각 안에 고려어로 작성된 몇 백자의 명령문도 손쉽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니라.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이 고려어로 말을 하고 고려 부호로 통신을 주고받는 날이 올 것이야. 내가 반드시 그리 만들 것이니까."

    주먹을 불끈 쥐고 격정적으로 말을 하던 왕기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무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지 네가 맡은 통신대들은 고려 부호를 달달 외어야만 할 것이야. 잠을 자다가도 툭 치면 고려 부호로 줄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무지 네가 맡은 책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만큼 본왕이 널 믿고 있다는 뜻이니라."

    "알겠습니다. 전하. 소인이 전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병사들을 모두 그리 만들어 놓겠습니다."

    왕기가 이번에는 척무관을 보며 말했다.

    "척무관이 훈련시키는 근위대는 딱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전하."

    "근위대는 오로지 나의 명령만을 받는다는 것을 머릿속에 깊숙이 박아 넣어라. 근위대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니까."

    "알겠사옵니다. 저하."

    왕기가 무장을 보며 말했다.

    "돌격대를 훈련시키며 한 가지 생각을 주지시켜라. 충성. 목숨을 아끼지 않는 고려에 대한 충성심 말이다. 본디 애국심이란 자신의 조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야. 돌격대의 병사들에게 그걸 끊임없이 주입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전하. 죽으나 사나 오로지 고려만을 생각하는 용맹무쌍한 돌격대로 양성하겠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계몽주의자인 '볼테르(Voltaire)'의 명언을 인용한 왕기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일단 급한 안건들은 다 정리가 된 것 같은데... 앙리는 어떻게 되었느냐? 언제쯤 다시 돌아온다고 하던가?"

    척무관이 즉답했다.

    "본디라면 왕복에 1년 가까운 세월이 걸릴 여정이지만 앙리가 길을 잘 알고 있고, 100명이 넘는 심왕부 기마대의 호위를 받고 있어서 도적떼의 습격을 방지할 수 있으며, 전하께서 주신 참치를 이용할 수 있는 최고급 패를 가지고 떠났기에 빠르면 6개월 늦어도 8개월 안에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래? 빠르면 6개월이라. 고려에 있는 충목왕 전하께서 병으로 승하하시기 전에 돌아와야 내가 계획한 일들이 잘 진행될 텐데 말이야. 뭐 정 급하면 내가 유럽으로 직접 날아가든가 해야 하겠지."

    그때였다. 회의실 밖에 경비를 서고 있는 고려 병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고용보를 만나러 갔던 자가 서찰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 양 왕기가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그래? 서찰을 가지고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