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6화 (56/171)

#56. < 대계(大計)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다 - 2 >

서기 1345년 11월 4일

무지와 무장이 심왕부에 발을 들인지도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강소성(江蘇省) 구용현에 위치한 모산(茅山). 대도시인 남경(南京)과 항주(杭州)가 그렇게 멀지 않은 이 모산에는 연단술과 연금술이 뛰어나고 주문과 법술로도 유명한 모산파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산파의 태동전(太洞殿)]

모산파의 근간이라는 태동진경(太洞眞經)에서 이름을 딴 모산파 문주의 집무실에서 왕기가 당대의 모산파 문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온갖 물건들을 다 판다는 방물장수처럼 가죽 꾸러미 여러 개를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고, 바닥에 내려놓은 큼지막한 등짐에는 묘목(苗木)이라도 담겨있는지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삐쭉삐쭉 삐져나와 있었으며, 나무를 구하기 위해 심산이라도 헤매고 왔는지 입고 있는 옷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왕기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모산파의 문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당대의 제일 고수라는 고려검황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어디 먼 곳이라도 다녀오신 모양인데... 모산파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연단과 연금 쪽으로는 모산파가 천하제일 아니겠소이까? 그래서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이렇게 불시에 찾아왔소이다. 근데... 문파 내부가 많이 어수선해 보이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소이까?"

"있지요. 이곳 강소성뿐만이 아니라 강남 전체에 대대적으로 역질(疫疾)이 돌고 있어서요. 매일같이 대량으로 단약을 만들어서 강남 곳곳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지요."

"어떤 역질이 돌고 있단 말이오?"

"온역(溫疫)과 역리(疫痢) 그리고 호역(虎疫)까지 돌고 있는 실정이지요."

모산문주의 말에 왕리가 뇌까렸다.

'온역은 장티푸스이고, 역리는 이질이다. 호역은 콜레라를 뜻하는 것이고. 이 모든 병들은 수인성 전염병이고 사람들의 대변이나 소변 등을 통해 옮겨진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왕기가 물었다.

"이 시기에 역질이 그렇게 많이 돈단 말이오? 지금은 추수를 다 끝내고 겨울로 접어들어가는 시기잖소? 그리고 그러한 역질들은 보통 사람들이 한곳에 많이 모이거나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을 때 발생하는 병으로 알고 있는데..."

왕기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던 문주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어차피 고려검황께서 조금만 알아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니까. 지금 항주에는 대륙 곳곳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소이다. 소문으로는 마교가 위치한 저 멀리 십만대산 쪽에서도 사절단이 왔다고 하오. 그들이 병을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이오."

"항주에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모여든단 말이오?"

"요즘 강남의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흉흉하외다. 원이 들어서고 강남에서 걷어들인 세금으로 화북지역 사람들을 먹여살린 지가 백 년 가까이 되어가지요. 한족이 많은 강남 지역 사람들의 인내심이 이제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이오. 그리고 항주에는 강호 무림을 호령하는 정림방이 있지요. 정림방주인 팔비신장(八譬神掌)이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각종 세력들과 접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각 세력들의 답신을 들고 온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떼를 지어 항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역병이 널리 퍼짐과 함께 강남 백성들 사이에서 백련교(白蓮敎)와 미륵교(彌勒敎)가 급격하게 교세를 키우고 있소이다."

사뭇 심각해진 표정의 왕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주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주시오. 문주가 알다시피 난 몽골족도 아니고 한족도 아닌 고려인이 아니오? 가혹한 세금에 못 견뎌 강남 쪽에서 세력을 규합해 들고일어나 원을 전복하기라도 할 모양인 것이오?"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오."

"그 중심에는 정림방주인 팔비신장이 있고?"

"정림방주뿐만이 아니라 백련교회의 두령이며 미륵불의 환생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한산동(韓山童)도 있지요. 대도에 계시는 고려검황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하남(河南)과 안휘(安徽)에서는 한산동을 살아있는 부처라고 여기고 있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이며 그 세가 장난이 아니라오. 그게 다 원나라의 가혹한 수탈 때문이지요. 십만대산에서 사람이 왔다는 걸 보니 어쩌면 몇 십 년간 잠잠히 지내던 마교(魔敎)도 동참할지도 모르지요. 백련교와 마교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가 아니겠소이까? 조만간 뭔 일이 터져도 터질 것이 분명하외다."

모산문주의 설명에 왕기가 굳은 표정으로 뇌까렸다.

'이건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이 일어날 조짐이다. 한산동이 등장한 걸로 보아 틀림없어. 하지만 시기가 너무 빠르다. 역사에 나온 홍건적의 난은 1351년 대범람을 일으킨 황하강 유역의 수리를 위해 백성들을 대량으로 징발한 가운데 발생하는 난이야. 아직 6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고. 나로 인해 중국의 역사가 어느새 그만큼 많이 비틀린 것인가? 그렇다면 고려 쪽의 역사도 비틀렸을 것이 분명해. 빠르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왕기가 문주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나랑은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오. 내가 원나라에 있기는 하지만 난 고려인이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내가 온 목적을 물어보겠소."

"말씀하시지요. 어차피 숨길 것도 없소이다. 모산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절기들은 정림방 때문에 강호로 유출된 지 오래이니까요."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러한 무공 절기들이 아니오. 연금과 연단 쪽에 사용되는 물건들이라오."

"물어보시지요. 서역과 교류가 활발해진 덕분에 모산파가 지닌 연금술과 연단술이 많이 향상되었으니까요. 검황께서 원하시는 어지간한 물건들은 다 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좋소이다. 수은(水銀)을 구할 수 있소이까?"

"당연히 구할 수 있소이다. 과거에는 귀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손쉽게 구할 수 있지요."

"그럼 납(Pb)도 구할 수 있소?"

"가능하지요. 납을 금으로 바꾸려는 것이 연금술인데 납이 없다면 말이 안 되지요."

"황산(黃山)과 왕수(王水)도 있소이까? 쇠를 녹이고 금을 녹일 수 있는 물들 말이오."

"당연히 있지요. 왕수를 아시는 것을 보니 검황께서는 연금술 쪽으로 조예가 깊으신 것 같소이다?"

"기본적인 것들만 알고 있소. 그럼 구리(Cu)와 아연(Zn) 그리고 주석(Sn)도 구할 수 있소이까?"

"당연하지 않겠소이까? 철로 된 무기나 제품들이 생산되기 전에는 모든 것들을 구리로 만들었으니까요. 구리에 아연을 첨가하면 황동(黃銅 : brass)이 되고, 주석을 첨가하면 청동(靑銅 : bronze)이 되는데 그런 것들을 못 구할 리가 없지요. 어지간한 대장간에서도 다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안색이 밝아진 왕기가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백금(Pt)이나 알루미늄(Al), 마그네슘(Mg) 같은 것도 있소이까?"

모산문주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들은 첨 들어보오. 구할 수 있는 방법도 전혀 모르고 있소이다."

"그럼 크롬(Cr)이나 니켈(Ni)은?"

"그것들도 모르겠소이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라면 중원 어디를 가도 구하지 못할 것이오.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어째 너무 쉽게 구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내가 구상하는 그림을 충분히 그릴 수 있어.'

속으로 빠르게 중얼거린 왕기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소이다. 그래도 예상보다 많은 것들을 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흡족하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본인이 말한 것들을 조금씩 구매해서 가야겠소이다. 따로 대량으로 주문을 넣을 테니 그것들은 표국을 통해서 대도에 있는 심왕부로 보내주시오."

"가격만 맞는다면야 못 해드릴 것도 없지요. 모산파에서만 살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외다."

잠시 후 각종 재료들을 대량으로 발주한 왕기가 시제품으로 사용할 것들을 챙기는 바람에 온몸에 가죽 꾸러미들을 더욱 많이 매달은 채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하늘에 뜬 상태에서 잠시 고민을 하던 왕기가 뇌까렸다.

'모산파에 이어 폭죽을 제조한다는 벽력가를 들려 몇 가지를 더 챙길 생각이었는데 안되겠어. 비상시국이라 최대한 빨리 심왕부로 돌아가야 하겠다.'

마음을 굳혔는지 왕기가 대도가 있는 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대도의 심왕부]

허공에 떠있는 왕기의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심왕부의 거대한 연병장에서는 천여 명의 장정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고, 그들 주위로는 무지와 무장 그리고 고려의 무관과 병사들이 몽둥이를 들고서 그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자신이 명령한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왕기가 흡족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소리 없이 빠르게 자신의 집무실인 팽가의 가주전으로 향했다.

- 쿵. 쿵...

온몸에 주렁주렁 대달려 있던 꾸러미들을 방바닥에 내려놓는 소리를 들었는지 척무관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전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볼일은 잘 끝마치셨습니까?"

"그래. 예상보다 더 잘 끝났어. 내가 없는 사이에 특별한 일들이 있었나? 무지와 무장이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은 이미 보았다. 그들을 불러 모으기 전에 중요한 것들만 보고해 봐."

"알겠습니다. 전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두 가지지요. 고려에 계신 충목왕 전하의 병이 깊어져서 올겨울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옵니다. 또 하나는... 황후마마께서 전하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원나라 황실의 공주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다는 것입니다. 삼일 전부터 시작된 연회를 열흘간 열어 전하의 배필을 정할 계획으로 말입니다."

척 무관의 말에 목에 칼날이 날아들어도 변하지 않던 왕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로도 유명하지만 타락한 군주로도 유명해. 그 모든 것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때문이었지. 원나라 황실의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노국 공주는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 정치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친원파들이 공민왕을 죽이려 할 때에도 목숨을 걸고 방문 앞에 버티고 서서 공민왕을 끝까지 보호해 주었던 여인이었다. 문제는 노국 공주가 오랜 기간 회임을 하지 못하였다는 거야. 왕의 적통을 낳지 못하는 왕비는 신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마련이지. 결국 임신을 하긴 했지만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노국 공주는 사산을 하며 죽고 말았다.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공민왕은 그 후로 타락의 길을 걸었어. 개혁 정치에 뜻을 잃고 향락 생활을 일삼으며 고려를 엉망으로 만들었지. 고려의 부흥을 위해서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 나의 배우자는 내가 정할 것이야. 신체가 건강해서 임신도 잘되고 애도 순풍순풍 잘 낳는 여인으로 말이다.'

왕기가 마음속으로 공민왕의 혼인과 관련된 내용을 되짚고 있을 때 척무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더 중요한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열흘에 걸쳐 열릴 예정이었던 황후마마의 연회가 오늘 아침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끝났다는 것입니다. 불과 사흘 만에 말이죠."

"그 말인즉슨..."

"황후마마의 눈에 들어 전하의 배필로 점찍은 공주가 이미 탄생했다는 것이지요. 불과 사흘 만에 말입니다."

"그게 누구이더냐?"

"황실의 내원에서 일어난 일들이라 정확한 것은 소관도 모르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고용보가 다녀갔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전달해 달라며 서찰 하나를 남기고 말입니다."

"그 서찰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당장 가져오거라."

그러자 척무관이 품속에서 곱게 접힌 서찰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 쫘악.

빠르게 서찰의 윗부분을 뜯은 왕기가 서찰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황후마마가 직접 쓴 글인 듯 여인의 필치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 김태희.

왕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 순간 왕기의 머리가 무섭도록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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