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4화 (54/171)
  • #54. < 강호출두(江湖出頭) 소림편(少林編) - 8 >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대도를 붙잡고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무장을 보며 왕기가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몸뚱어리가 단단해서 회복이 빠른 것 같긴 하지만 지금 그 몸으로는 무리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붙어주마."

    "그러지 마시고 한번만 더 붙어주시지요. 주군. 그리고 좀 전의 대련처럼 소승의 수준에 일부러 맞춰주지 마시고 전력을 다한 주군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왕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전력을 다해달라고? 이 자리에서 죽여달라는 소리냐?"

    화들짝 놀란 무장이 손을 휘저으며 황급히 대꾸했다.

    "그런 뜻이 절대 아닙니다. 좀 전의 대련으로 소승이 뼈저리게 느꼈사옵니다. 주군께서 얼마나 강한지를 말입니다. 같은 내공을 사용하면 제 스승인 천왕전의 혜장(慧張)대사께서도 절 그렇게까지 쉽게 쓰러뜨리지는 못했을 것이니까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 스승이라고 해봐야 소림의 1대 제자에 불과해. 아직 강기도 사용하지 못할걸?"

    "그렇습니다. 주군. 그래서 부탁드리는 것이옵니다. 당대에 천하제일이라고 불리는 고수와 제가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나는지, 싸우는 방식은 어떻게 다른지, 제가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해나가야 할지를 알고 싶어서 드리는 부탁이옵니다."

    왕기가 무지를 슬쩍 흘겨보며 대꾸했다.

    "네 머리에서 나올만한 생각이 아니로구나. 보아하니 누군가가 충고를 해준 것 같은데..."

    "맞습니다. 무지 사형께서 알려주셨지요. 주군께서는 바쁘신 분이니 대련을 해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라고 충고해 줬습니다. 어떻게든 많이 붙어보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대련이 제 무공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좋다. 들어주도록 하마. 하지만 조심하여야 할 것이야. 아차 하면 목이 날아갈 테니까."

    "감사하옵니다. 주군."

    "나 정도 되는 고수가 하수를 때려잡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호신강기를 일으켜 하수의 공격을 다 맞아주면서 접근해 목을 날려버리는 것이지. 하지만 그래서는 네게 도움이 전혀 안 될 것이야. 그러니..."

    왕기가 검집을 들어 무장을 똑바로 겨누며 말했다.

    "진정한 고수와 네놈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내가 직접 보여주도록 하마. 이 검집을 한번 막아보거라."

    "알겠사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장이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무장답지 않게 지혜로운 정광이 눈 속에서 별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준비가 다 끝났느냐?"

    "네. 주군."

    그 순간 가볍게 땅을 박찬 왕기의 몸이 자기력을 이용해 빠르게 날아가며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기듯 쭉 늘어났다. 상상도 못할 가공할 속도로 자신의 목을 향해 들이닥치는 왕기의 검집을 막기 위해 무장이 대도를 마치 풍차처럼 회전을 시키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불영만상(佛影萬象)!"

    - 위잉.

    그때였다.

    - 툭. 툭.

    불영도법의 초식을 시전 한 대도가 몇 바퀴 채 돌기도 전에 무장의 등 뒤에서 유령처럼 솟아오른 왕기가 검집으로 무장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넌 이미 죽어있다."

    "허억!"

    기겁을 한 무장이 황급히 뒤로 돌아 왕기를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 소승의 뒤로... 이동을..."

    "네놈은 자신의 눈을 너무 믿고 있어. 당연한 일이겠지. 나도 네놈의 경지 때에는 그리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오감 중에 가장 믿지 못할 것이 시각(視覺)이라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착시(錯視)를 일으키고, 눈으로 미처 따라가지 못할 속도의 물체를 만나면 잔상(殘像)을 남겨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 바로 시각이니라."

    "아..."

    신음성을 흘리는 무장을 보며 왕기가 물었다.

    "느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목덜미 쪽으로 다가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냐고 묻는 것이다. 빠른 속도를 이용해 눈을 속일 수는 있지만 그런 본능적인 감각까지는 속일 수가 없다. 그걸 느끼지 못하면 진정한 고수를 만났을 때 단 1초 만에 목이 잘려 죽고 말 것이야."

    잠시 고민을 하던 무장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쯧... 아둔하고 미련한 놈 같으니. 그럴 만도 하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놈에게 뛰라고 주문을 하는 격이니까."

    왕기가 검집을 옆구리에 다시 차고 진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잘 들어라. 이런 식의 경험을 얻는 건 아주 어렵다. 보통은 경험을 함과 동시에 뒈져버리니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라. 진검으로 하면 위험하기는 하지만 좀 더 알아차리기가 쉬울 것이야.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본능이 집중력을 더욱 올려줄 테니까. 딱 한 번만 더 보여줄 테니 느껴보거라. 이번에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하다면... 넌 평생을 무지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게 될 것이야."

    그러자 무장이 황급히 말했다.

    "주군. 가르침을 주소서. 소승이 어떻게 해야 느낄 수가 있는 것이옵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묻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네가 익히고 있는 금강대력공은 네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소림의 오공(五功)인 대력과 금강을 합친 뛰어난 무공이다. 그 말인즉슨 오랜 세월 수많은 천재들이 갈고닦은 무공이라는 것이야. 그런 뛰어난 무공에 그 정도를 파악하는 무리(武理)가 담겨 있지 않을 리가 없다. 금강대력공에서 적과 대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설명되어 있느냐?"

    그 순간 무장이 넋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잘 알고 있구나.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호승심과 물러서지 않는 투지도 좋지만 네놈의 정체성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야. 소림의 무공은 근본적으로 불공(佛功)이다.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다는 구도자의 마음가짐으로 익혀야 하는 무공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공포에 초연해지거라. 목에 칼이 들이닥쳐도, 머리 위에서 도끼가 떨어져도 마음이 요동쳐서는 절대 아니 된다. 뭐 말처럼 쉽겠냐마는..."

    - 저벅. 저벅.

    걸음을 옮겨 다시 거리를 벌린 왕기가 서슬이 퍼런 진검(眞劍)을 들고서 무장의 목을 겨냥했다. 그리고는 전신에서 막대한 살기를 뭉클뭉클 피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힘 조절을 하지 않을 생각이야.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사이에 무지를 닮은 제법 맑고 투명해진 눈빛의 무장이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한의 살기 속에서도 비교적 평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각오하고 있사옵니다. 주군."

    "그럼 막아보거라."

    그 순간 왕기의 신형이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무시무시한 속도를 보이고 있는 왕기의 신영이 정면으로 들이닥칠 때, 대도를 든 무장의 목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급속히 돌아갔다.

    - 퍽.

    검극이 제법 깊게 파고든 무장의 목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할 때, 무장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왕기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느꼈느냐?"

    "희미하게... 희미하게나마 느꼈사옵니다. 주군."

    "그럼 왜 막지 않았느냐? 느꼈으면 당연히 대도로 막아야 할 것이 아니더냐?"

    "그것이..."

    무장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왕기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스스로의 판단에 자신감이 없었겠지. 고수와 하수와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니라. 고수는 자신이 내린 판단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설사 오판을 내려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확고한 자신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춰야만 고수의 반열에 올라설 수가 있는 것이야. 내공이 어떻고 검기가 어떻고 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니라.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 철컹.

    검을 검집에 꼽은 왕기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제법 상처가 깊으니 치료부터 하거라. 그래도 제법 가르칠 맛이 있는 것 같으니 다음에 또 대련을 해주도록 하마."

    핏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있는 목의 상처를 깔끔히 무시한 채 무장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주군."

    "너무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 또한 너 덕분에 새로운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말이다."

    말을 하며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방금 전 실전 대련을 하며 칠성검에서 천추(天樞)에 이은 천선(天旋)과 천기(天機)를 발견해 냈으니 요광(搖光)을 제외하면 남은 건 3가지 초식뿐이다. 3팩토리올이니 6가지 경우의 수만 남은 것이지. 남은 이틀 동안 완벽한 조합을 발견해 내어 완전무결한 칠성검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야.'

    빠르게 이틀이 흘렀다.

    서기 1345년 10월 25일

    [접객원의 특실]

    지난 이틀 동안 대환단을 마저 복용하여 7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가지게 되었고 칠성검의 수련까지 끝마친 왕기가 강호로 나가기 위해 각자의 짐을 꾸려온 무지와 무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나라를 경영하려면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필요하다. 근위대의 대장은 척무관에게 맡기면 충분해, 정보는 춘향각주를 통해서, 상업은 앙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군사로써 무지 이상으로 똑똑한 놈을 얻기가 힘들 것이야. 그리고 무장은 온몸에 창칼이 안 들어가고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는 놈이다. 일반 병사들에게는 사신(死神)과 같은 존재이지. 전쟁터에서 돌격대장으로 사용하기에 나무랄 데가 없는 놈이야. 남은 건 의료와 복지 쪽의 인재인데 말이야. 복지는 무시하더라도 툭하면 역병이 나돌아 사람들이 떼로 죽어나가는 이 야만의 시대에서는 의료계 쪽으로 뛰어난 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천년만년 강호를 떠돌며 인재만 구하러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야. 나도 의학 쪽으로는 제법 지식이 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고려의 부흥을 위한 대계(大計)를 시작할 때가 되었어.'

    마음의 정리를 끝낸 왕기가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무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희 둘은 이 서찰을 들고 대도에 있는 심왕부를 찾아가거라. 해동제일검이라고 불리는 척무관에게 서찰을 건네주면 너희들이 거차할 곳을 내어주고 할 일을 알려줄 것이다."

    무지가 공손하게 서찰을 받아들며 물었다.

    "주군께서는 저희와 같이 이동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래. 너희들과 난 이동속도가 너무 차이가 나서 말이야. 그리고 난 바다를 건너 먼 곳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와야 하겠다. 고려를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작물들을 가져와야 할 때가 되었어."

    "잘 알겠습니다. 주군."

    "소림에 와서 내공이 많이 늘었으니 아무리 늦어도 열흘 이내에 대도로 다시 돌아갈 것이야. 어떤 것들을 어디서 구해와야 하는지 머릿속에 다 정리가 되어 있으니까 헤맬 일도 없고. 그리고... 무지 너에게는 새로운 별호를 하나 지어줘야 하겠다. 내가 받은 소림의 정보에 무지 네가 올라가 있더구나. 소림 백년 이내의 최고 기재라고 말이야. 소림의 가장 뛰어난 기재가 내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굳이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머리가 길어질 때까지는 내가 지어준 별호를 사용하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주군."

    그 순간 옆에 있던 무장이 물었다.

    "주군. 저는요?"

    "너에게는 새로운 별호가 필요 없다. 사람들이 너에게는 주목하지 않고 있으니까."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무장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잘 알겠습니다. 주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기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걸렸다.

    "의외로 발끈하지 않는구나. 무장 네놈이 그 사이에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제법 터득했나 본데?"

    "그렇게 두들겨 맞고서도 발전이 없으면 개돼지나 다름없지요. 명경지수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군."

    "좋은 자세이다. 열흘 뒤 다시 볼 때까지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있겠다."

    그 순간 무지가 물었다.

    "주군. 그럼 저의 새로운 별호는 무엇이옵니까?"

    "일전에 무장에게 듣기를 시문(詩文)에 능통하고 다도(茶道)를 즐긴다고 들었다. 맞느냐?"

    "맞사옵니다. 주군."

    "거기에 특이하게도 2개의 발우(鉢盂)를 무기로 사용하고 있지. 따라서 별호를 시다발이(詩茶鉢二)라고 지었느니라."

    새로운 별호를 들은 무지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다발이라. 시경(詩經)의 한 구절 같은 별호로군요. 아주 마음에 드옵니다."

    "그래? 내가 지어준 별호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로구나. 그럼 이만 소림을 떠나자꾸나."

    잠시 후 봇짐을 챙긴 시다발이와 무장이 경공을 시전하며 소림사 아래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소림행을 끝낸 왕기가 늘어난 내공을 이용해 이전보다 더욱 빨라진 자기부상신법을 구사하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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