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3화 (53/171)
  • #53. < 강호출두(江湖出頭) 소림편(少林編) - 7 >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무장을 보며 왕기가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달려오던 무장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우뚝 멈춰 섰다. 그런 무장을 보며 반대쪽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뽑아들며 왕기가 설명해 주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검집으로 상대를 해주도록 하마. 약속을 했으니 네놈을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오른손에 든 검집을 아래로 늘어뜨린 왕기가 왼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움직였다.

    - 까딱. 까딱.

    "뭐 망설이느냐? 빨리 덤비지 않고? 네놈이 원하는 대련이다. 내공도 네놈과 똑같은 일갑자의 내공만 사용해 주겠다."

    무장이 순간적으로 눈을 빛내며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군. 정말로 소승과 동일한 내공만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래. 난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라."

    그러자 갑자기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표정을 지은 무장이 가슴 부위까지 치켜올린 대도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잡으며 말했다.

    "서로가 동일한 내공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소림의 무공을 갈고닦은 제가 주군에게 질리가 없지요."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놈은 소림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겠지?"

    "당연하지요. 천하제일은 소림입니다. 주군께서 주력으로 익히고 계시는 반야심공도 본디 소림의 것이 아니 옵니까?"

    "그래서 네놈이 틀려먹었다는 것이야. 나도 소림의 무공을 높이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니라. 하지만 넌 사람들이 왜 그리 소림의 무공을 칭송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어. 그런 놈이 소림의 무공을 제대로 익혔을 리가 없다. 어디 한번 있는 힘을 다해 덤벼보거라. 본 왕이 반야심공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그 순간 외공으로는 천하제일이라는 금강대력공(金剛大力功)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는지 살아서 꿈틀거리는 강철같은 근육들에 대량으로 피와 진기가 공급되면서 무장의 온몸이 마치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 무장의 몸이 순간적으로 2배는 커져 부처와 관련된 설화에 등장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처럼 보일 정도였다. 온몸에 힘을 잔뜩 준 무장이 자신감이 넘쳐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주군의 명에 따르지요. 하~압!"

    대도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태산압정의 자세를 취한 무장이 한 마리 코뿔소처럼 대도를 앞세운 채 땅을 박차고 다시 질주했다.

    - 두두두두...

    마치 성난 황소처럼 무장이 돌진해 오며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자, 왕기가 검집을 들어 자신의 몸 앞에 수직으로 세웠다. 반야심공 대신 방금 전에 익힌 칠성검의 천추세(天樞勢)를 취한 왕기가 왼쪽 발의 앞꿈치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힘차게 외쳤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으로 회오리를 돈다. 천선세(天旋勢)!"

    그 순간 왕기의 몸이 발뒤축을 중심 삼아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회오리바람에 순차적으로 온몸이 휘말려 가듯 가장 먼저 머리가 돌아갔고, 뒤를 이어 어깨, 허리, 골반, 무릎, 발목의 순서로 그림처럼 빙글 돌아갔다.

    360도 회전을 끝마친 왕기가 왼쪽 발의 앞꿈치를 땅에 대며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지는 대도를 맞받아쳐 갔다. 온몸의 회전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왕기의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이 일제히 회전을 하며 손아귀에서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검집이 대도의 옆면을 강타했다.

    - 깡!

    쇠와 쇠가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회전력에 휘말린 대도가 수직으로 낙하하던 궤도를 벗어나 왕기의 머리 한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사선으로 비스듬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 쿠왕!

    삼십 근은 족히 될 듯한 대도가 땅바닥을 거세게 내려찍을 때, 왕기가 왼발을 앞으로 쭉 미끄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절세미인이 귀 뒤로 머리를 넘기듯 왼손을 부드럽게 귀쪽에 가져다 대며 팔을 절반으로 접었다.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무지의 입에서 감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멋지구나! 태극권의 옥녀천주(玉女穿肘) 수법이야."

    그 순간 절반으로 접혀 앞으로 돌출되어 있던 왼팔의 팔꿈치가 무장의 명치에 강하게 틀어박혔다.

    - 쾅!

    "커헉..."

    맨살로 쇠로 된 날붙이를 막아내고 맨몸으로 검기를 견뎌낸다는 외공의 최고봉인 대력금강공을 익혀서 그런지 마치 망치로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순간적으로 숨통이 틀어막힌 무장의 입에서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때 접혀있던 왕기의 왼팔이 빠르게 펴지더니 손끝을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는 명치를 얻어맞아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무장의 얼굴 앞에서 마치 비파를 뜯듯 좌우로 가볍게 흔들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던 무지가 새된 신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이런 긴박한 순간에 저렇게 부드러운 '수휘비파(手揮琵琶)'라니. 주군의 태극권은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구나."

    - 찰싹. 찰싹...

    양쪽 뺨을 연신 두들겨 맞고 있는 무장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왕기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장 취약한 무공은 권법이다. 제대로 익힌 건 권법 중 가장 기본이라는 태극권밖에 없어. 그것 또한 내가 이전에 무당의 태극검을 익혔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하지만 경지가 일천하여 대도에 있는 내 수하가 보았다면 비웃음을 지을 수준밖에 안된다. 하지만 네놈은 그런 태극권 하나 막아내지를 못하는구나. 소림 무공의 기본은 자비(慈悲)와 인내(忍耐)이니라.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참고 또 참으며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 소림 무공의 정신인 것이야."

    - 찰싹. 찰싹...

    "소림 무공이 최고라는 자만심에 가득 차서 인내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이 소림의 무공을 제대로 익혔을 리가 있겠느냐? 이 어리석은 중생아."

    "이익..."

    수휘비파를 시전하는 손속에 사정을 두었는지 겨우 정신을 차린 무장이 이를 악물며 왕기의 손을 막기 위해 대도를 들어 올려 몸 앞에 세웠다.

    그 순간 왕기의 왼발이 한족장 미끄러지며 진각(震脚)을 강하게 밟았다. 그리고는 검집을 우에서 좌로 거칠게 휘두르며 외쳤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힘을 이용해 베틀을 짠다. 천기세(天機勢)!"

    - 쾅!

    "크으윽.."

    충격을 이기지 못해 신음성을 내뱉은 무장이 대도를 붙잡고 있는 양손을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나자, 왕기가 이번에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뻗으며 좌에서 우로 다시 검집을 휘둘렀다. 팔을 좌우로 연신 휘두르는 것이 마치 베틀에서 천을 짜기 위해 북을 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 쾅!

    - 휘이익.

    "컥..."

    연속적으로 가해진 막대한 충격을 이기지 못한 대도가 무장을 손을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졌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무장의 양팔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축 늘어져 버렸다. 충격으로 내부까지 진탕 되었는지 입 밖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무방비 상태로 서있는 무장을 향해 왕기가 빠르게 검집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퍽. 퍼벅. 퍽. 퍽...

    폭풍 같은 기세로 검집을 휘둘러 마치 복날 개잡듯 무장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며 왕기가 말했다.

    "너 같은 놈은 제대로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야. 대환단을 복용해서 내공이 갑자기 일갑자로 늘어나니 눈에 뵈는 게 없지? 세상이 다 네 것 같고 말이야. 네놈에게 자비가 무엇인지, 인내가 무엇인지 뼛속 깊숙이 새겨주마."

    "큭. 커헉. 켁. 크악. 꺼어억.."

    정신없이 두들겨 맞아 온몸에 피멍이 든 무장이 급기야 혼절을 했는지 긴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 쿠웅.

    그 모습을 본 무지가 황급히 달려오며 고함을 질렀다.

    "주군. 무장은 이미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만 하시..."

    - 홱

    왕기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오는 무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검집을 똑바로 세워 겨누었다.

    "무지 네놈이 더 나쁜 놈이야!"

    - 우뚝.

    다급히 멈춰 선 무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몰라서 묻는 것이더냐? 너처럼 머리가 좋고 걸어 다니는 소림 무공의 창고라는 장경각주의 제자라는 놈이 달마대사가 말한 대력공의 부작용이 뭔지를 모를 리가 없다."

    "대력공을 익힌 자는 경지가 올라갈수록 성격이 난폭해지지요. 그런 이유로 강호에서 한 번씩 소림 제자가 난동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머리가 되는 부작용과 고환이 위축되는 것은 어차피 출가한 승려에게 상관이 없다고 치더라도 욱하는 성격에 사람이 호전적이 된다. 갑자기 내공이 30년이나 늘어난 무장이 그걸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은 예측 가능한 사실이야. 하지만 옆에서 말려야 할 네놈이 오히려 무장을 더 부추기지 않았느냐? 내가 말한 것이 틀렸느냐?"

    무지가 순순히 시인을 했다.

    "맞습니다. 소승이 부추겼지요. 오늘이 아니면 무장 사제가 언제 또 주군과 대련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장은 세상 넓은 줄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전하를 보필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지요."

    그 순간 왕기가 들고 있는 검집에서 오색찬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사형이 되어 사제를 방치한 네놈의 죄가 더 무겁느니라. 네놈을 이 자리에서 징치할 것이야."

    왕기가 발을 재게 놀리며 무지의 목을 향해 검집을 거침없이 찔러가기 시작했다.

    "주... 주군!"

    다급히 허리춤에 있는 발우를 꺼내든 무지가 두 개의 발우를 겹쳐 자신의 목을 보호했다.

    - 푸우욱.

    검강에 휩싸인 검집이 마치 두부를 뚫고 가듯 쇠로 제작된 발우 두 개를 가볍게 관통해 계속해서 전진했다.

    "크윽..."

    자신의 목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검집을 지켜보던 무지가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길 잠시 왕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지는 그만 눈을 뜨거라."

    슬며시 눈을 뜬 무지가 자신의 목젖 바로 앞에서 빛을 뿌리고 있는 검집을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왕기가 춘풍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전 무얼 보았느냐?"

    "소... 소승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더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아쉽더냐?"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운 다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습니다."

    "역시... 타고난 품성이 좋아."

    강기를 거둬들인 왕기가 천천히 검집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소림에 갇혀 살면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구나라는 경험을 한 번도 못 겪어봤겠지?"

    "그렇사옵니다."

    "자고로 인간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본성을 관조하고 성찰하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지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야. 하지만 그러는 게 쉬울 리가 있겠느냐? 말처럼 쉽다면야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이미 부처가 되었겠지. 방금 전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떠올랐던 생각을 화두(話頭)로 붙잡고 또 붙잡거라. 그럼 반야심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야."

    - 툭. 툭.

    왕기가 기특하다는 듯 무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훗날을 생각해서 무장을 부추겼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네게 특별한 경험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연극을 한 것이니라. 그리고.. 내가 한마디만 더 해주마."

    "귀를 씻고 듣겠사옵니다. 주군."

    "사람이 천차만별이듯 개인이 깨닫는 지혜 또한 각양각색이니라. 반야심공은 육조 혜능이 깨달은 지혜를 풀어놓은 것일 뿐이야. 그가 깨달은 지혜가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다.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혜능이 말한 미력우향이 언제나 맞는 것이 아니니까. 혜능뿐만이 아니라 내가 반야심공을 익히면서 깨달은 지혜와 네가 깨달은 지혜가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당연하지 않겠느냐? 네놈은 나나 혜능과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내가 한 해석에만 매달리지 말고 너 자신의 깨달음을 찾아보거라. 난 그냥 단순한 안내자일 뿐이니까."

    "알겠사옵니다. 주군."

    "너를 중심으로 이 세상과 우주를 우뚝 세워라. 그런 후 고민을 해보거라. 내가 설명한 내용에만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랬다가는 때려죽여도 나를 뛰어넘지 못해. 네가 익히는 무공은 너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뜻이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그래. 이제 그만 무장을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거라."

    "네. 주군."

    그때였다. 바닥에 시체처럼 엎어져 있던 무장이 정신이 들었는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한 판 더! 한 번 더 붙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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