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52화 (52/171)
  • #52. < 강호출두(江湖出頭) 소림편(少林編) - 6 >

    보따리 상인이 잘 안 팔려서 재고로 남은 물건들을 떨이하듯 공심대사가 무지와 무장을 별다른 흥정도 없이 왕기에게 팔아넘기고 떠나버리자 두 제자가 벙찐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왕기가 자신의 행낭에서 꾸러미 하나를 꺼내어 던져주며 말했다.

    "둘 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 공심대사가 한 말을 들었잖느냐? 소림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라고 말이다. 너희들 입장에서도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답답한 소림을 떠나 천하를 주유하면서 나와 같이 큰일을 도모할 테니까 말이야."

    - 주물럭. 주물럭.

    차분한 표정의 무지가 꾸러미의 입구를 단단하게 결박해 놓은 끈을 풀며 대꾸했다.

    "소승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본디라면 소승은 죽을 때까지 소림을 떠나지 못했을 운명인데 이렇게 바깥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응? 왜 죽을 때까지 소림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더냐? 강호에서 활동하는 소림의 제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전 차기 장경각주로 내정되어 있는 신분입니다. 걸어 다니는 무공 비급 창고와 같은 것이지요. 예로부터 장경각과 관련된 제자들은 강호행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납치를 당해서 소림의 무공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나마 정림방의 등장으로 소림의 무공 비급들이 대부분 외부로 유출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공심대사조께서 선선히 허락을 해주신 것이지요. 안 그랬다면 전 소림에서 뼈를 묻었을 것입니다. 오호... 보기 드문 질 좋은 전녹(滇绿)이로군요. 어린 새순만을 따서 만든 최고급품으로 보입니다."

    "보기에는 듬직한 무인 같은데 어떨 때 보면 잔소리 많은 시어머니 같은 내 수하가 싸준 것이니라. 강호에 나가면 독살을 피하기 위해 남이 건네주는 차(茶)를 함부로 마셔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황실에서 마시는 것일 테니 아무래도 최고급이겠지. 차에 대해서도 잘 아는 모양이로구나?"

    옆에 있던 무장이 사형 자랑을 하려는 듯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무지 사형과 사형의 스승이신 혜민대사께서는 소림에서 차 귀신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다경(茶經)을 줄줄 외우고 하루 내내 차를 달고 사니까요. 무지 사형은 차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아주 뛰어나고 붓글씨 또한 일품이지요. 장경각주의 제자이다 보니 여러 나라의 문자에도 능통하고요."

    "그럼 넌?"

    무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 툭. 툭.

    "아시다시피 저야 뭐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어서요."

    "그렇겠지. 넌 오직 근!골!만 좋은 거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무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하께서는 사제인 무장이 아주 맘에 드시나 봅니다. 기회만 되면 자꾸 놀리시려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내 밑에 머리 좋은 놈은 무지 너 하나로 족하다. 나 또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니까. 자고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지. 그다음으로 중요한 인재는 내 명령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용맹한 놈들이다. 무장처럼 말이야. 잔머리를 굴리며 자신의 안위부터 챙기는 놈들보다는 무장 같은 수하가 백배 낫지."

    그러자 듣고 있던 무장이 입을 댓 발 내밀며 대꾸했다.

    "전 고려검황 전하의 말이라고 해서 위험한 불구덩이 속으로 냅다 뛰어들 맘이 전혀 없습니다."

    왕기가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밑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될 게다. 난 수하에게 인색한 사람이 아니며 상벌이 확실한 사람이다. 네놈이 주군으로 모시기에 모자람이 없는 그릇이라고 자부한다."

    - 쓰으윽.

    말을 하며 왕기가 목갑 하나를 무장 쪽으로 슬며시 밀어주자 어리둥절한 표정의 무장이 당황하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몰라서 묻는 것이더냐? 대환단이다. 반으로 갈라서 무지와 나눠먹거라. 제대로 일을 부려먹으려면 밥부터 든든히 먹여야 하는 법이지. 지금 네 무공의 경지로는 강호에 나가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목이 잘릴 것이야. 내 수하가 되려면 일단은 무조건 강해져야만 한다. 약한 자를 최측근으로 둘 정도로 내가 너그러운 성격은 아니니까."

    왕기의 말에 무지가 경탄스럽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렵게 구한 귀하디 귀한 대환단을 저희에게 주신다고요? 전하의 배포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걱정 말거라. 남은 한 알은 내가 챙겨 먹을 테니까. 당연히 주인이 종놈보다는 배불리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본디 전하의 것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근데...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일단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이틀을 더 소림에서 머물 것이다. 소림에 온 목적을 다 이뤘으니 맘 편하게 그동안 미뤄뒀던 새로운 무공이나 익히면서 말이야. 너희들은 이틀 뒤 나와 함께 소림을 떠날 차비를 하거라. 자신들의 짐을 챙기고, 스승이나 동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하겠지.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난 언젠가 이 천하를 내 손에 넣을 것이니라. 대고려제국(大高麗帝國)이라는 이름 아래 말이다. 당연히 시간은 걸리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30년 이내에는 가능할 것이야. 너희들은 내 뜻과 내 명령을 쫓아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이해했다는 듯 무지가 대환단을 반으로 조심스럽게 갈라 조금 더 큰 반쪽의 대환단을 무장에게 건네면서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아니 이제는 주군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군요. 주군께서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면 이 무지가 간뇌도지(肝腦塗地 : 간과 뇌를 땅에 쏟아낸다는 뜻으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섬긴다는 뜻)의 자세로 주군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무장을 불구덩이 속으로 보내기 전에 소승과 반드시 먼저 의논을 해달라는 것이옵니다."

    무지의 말에 대환단 반쪽을 들고 아무 생각 없이 희희낙락하고 있는 무장을 슬쩍 흘겨본 왕기가 대꾸했다.

    "너희 사제들의 두터운 정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힘들게 구한 인재를 헛되게 잃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으니 그리하마. 무장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은 시키지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

    그러자 무지가 공손히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바닥에 대며 절을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군. 모자란 사제는 제가 잘 이끌어 주군을 보필케 할 터이니 너무 염려 마시옵소서."

    왕기가 무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잘 부탁한다. 넌 나의 책사 겸 군사가 되어서 앞으로 천하를 주무르게 될 것이야. 나 또한 너희들의 주군으로써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 같이 힘을 모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자꾸나."

    - 쿵. 쿵. 쿵...

    머리를 아홉 번 방바닥에 찧고 일어난 무지를 보며 왕기가 물었다.

    "쌍으로 된 두 개의 발우(鉢盂)를 무기로 사용한다고?"

    "그렇습니다. 저하. 스승이신 혜민대사께서 창안하신 쌍발혈비(雙鉢血飛)라는 절기를 소승이 물려받았지요. 손에 낀 장갑처럼 근거리 무기이기도 하면서, 륜(輪)처럼 멀리 날릴 수도 있는 무기입니다."

    "나 또한 쌍검을 사용하고 있지. 반야심공의 연공이 어느 정도 끝나면 쌍으로 된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제대로 알려주마. 언젠가 강호 무림에 이기어발술(以氣馭鉢術)이 등장할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오늘부터 너희 둘은 머리를 기르도록 해라. 사람들에게 굳이 승려라는 것을 밝힐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리하겠사옵니다."

    "이제 그만 둘 다 대환단을 복용하고 운기에 들어가도록 해. 난 밖으로 나가 무공 수련을 하면서 방안으로 외인의 출입을 막아줄 테니까."

    각각 대환단 반쪽식을 복용하고 운기에 들어간 무지와 무장을 방에 남겨둔 채 밖으로 나온 왕기가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검을 한 자루 뽑아 들어 몸 앞에 꼿꼿이 세웠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신선지검(神仙之劒)이라는 칠성검은 여타 강호의 무공들처럼 기(氣)를 느껴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달리 신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야. 이건 도교의 도사들이 개발한 신성력(神聖力)과 관련된 무공이다.'

    양기가 일전에 본 칠성검의 구결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신신지신(信信之信), 당위신선(當爲神山), 여천추지(如天樞地), 양기합일(兩氣合一), 지기수신(地氣秀身), 신기강검(神氣降劍), 자강불식(自强不息)."

    한참을 그러던 왕기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밝은 표정으로 뇌까렸다.

    '내 예상이 들어맞았어. 이건 움직이면서 내공을 쌓는 동공(動功)의 일종이다. 단 비급의 첫 장에 나와있던 '간견적불일정시진실(看見的不一定是眞實)'을 잊어서는 안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은 아니라는 뜻이야. 짧은 구결이기는 하지만 예상대로 입문 구결의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이러한 입문 구결을 제대로 이해한 자는 비급에 나와 있는 동작들을 시전하면서 각각의 초식을 익히는 동시에 신성력을 축적하는 것이야. 하지만 초식의 순서 또한 입문 구결처럼 뒤죽박죽이다. 북두칠성의 국자 머리부터 차례로 천추(天樞), 천선(天旋), 천기(天機),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의 순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 입문 구결을 통과한 자가 몸으로 직접 익히면서 제대로 된 순서를 다시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건 어렵지 않아. 입문 구결에 나와있는 여천추지(如天樞地)에 들어가 있는 천추(天樞)를 제외하고 나면 남은 건 여섯 가지 자세뿐이니까.'

    살짝 흥분한 표정의 왕기가 칠성검에 나와있는 동작들을 시전해 보면서 중얼거렸다.

    " 6!(팩토리얼)은 720이다. 얼핏 보면 많아 보이지만 한두 개만 더 맞추고 나면 숫자가 확 줄어든다. 복잡한 퍼즐도 어느 정도 맞추고 난 후반에는 급격히 쉬워지듯이 말이야."

    비급에 나와있는 자세대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왕기가 갑자기 한곳을 바라보며 외쳤다.

    "소림에서는 타인이 무공을 익히는 모습을 훔쳐봐도 되는 모양이오? 그만 썩 나오시오."

    그러자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바람소리가 들리며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 휘리릭.

    "아미타불. 고려검황 전하의 연공을 훔쳐볼 생각은 없었소이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익숙한 자세에 잠시 바라봤을 뿐이니 용서하시구려."

    궁색한 공심대사의 변명에 왕기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시오? 뭐 큰 상관은 없소이다. 익히는 걸 본다고 따라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근데... 무당의 칠성검을 알고 계시오?"

    "모를 리가 있겠소이까? 200년 전 무당의 칠성진인(七星眞人)이 천하를 종횡하던 마교교주(魔敎敎主)를 참살한 무공인데 말이오. 칠성검의 비급이 강호에 풀렸는데 소림에서 연구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근데... 전하께서는 불가해무공이라던 칠성검의 비밀을 푸셨소이까?"

    "어느 정도는... 칠성검이 마교교주를 척살한 무공이었소?"

    "그렇소이다. 소림의 기록에 따르면 칠성검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터지면 천하에 당해낼 자가 없다고 들었소이다. 칠성검의 비밀을 본 승에게 알려줄 수 있겠소이까?"

    "욕심이 너무 많구려. 늙은 개에게는 새로운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는 말도 모르오? 소림의 반야심공도 충분히 강하니 남의 것을 탐하지 말길 바라오. 무장을 보니 알겠더군. 대력공이 창안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달마대사가 말한 약점을 보완하지 않고 있소이까? 그러니 강호에 한번씩 대력공을 익힌 혈승(血僧)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소?"

    "흠...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이다. 남의 것을 탐하기 전에 내 것부터 잘 챙기라는 뜻이구려."

    가볍게 고개를 숙인 공심이 떠나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왕기가 뇌까렸다.

    '이 시대 무인들이 간단한 트릭이 숨겨져 있는 칠성검을 풀지 못하는 것은 북두칠성이 하늘에서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지. 북두칠성에 속하는 별들은 지구에서의 거리가 각각 제멋대로인 별들이야. 멀리는 100광년, 가까이는 2광년의 거리에 있는 별들이지. 단지 지구에서 먼 거리에 있는 별은 밝기가 밝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별은 좀 더 어둡기 때문에 나란히 서있는 것처럼 사람들 눈에 보일뿐이야. 그런 고정관념을 깨지 않으면 칠성검을 절대 익힐 수가 없어. 고정관념이란 건 그렇게 무서운 법이지.'

    본인이 세운 가설이 맘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결정적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공심이 내게 중요한 힌트를 주고 갔다는 것이야. 칠성검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면 마교교주도 척살할 정도의 위력을 보인다고 말했다. 칠성검 최후의 초식이 요광(搖光)이라는 뜻과 진배없어. 천추가 시작이고 요광이 끝이라면 남은 건 다섯 개뿐이다. 5! = 120이지. 내가 제대로 된 순서를 하나만 더 발견해내면 4팩토리얼이 된다. 4! = 24에 불과해. 칠성검을 완벽하게 익히는 것은 시간문제야."

    희망에 가득 찬 왕기가 칠성검의 제대로 된 초식의 배열을 찾기 위해 몰두할 때였다.

    - 쾅.

    거칠게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장이 방을 나서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무장이 주군에게 비무를 청하는 바이오. 어디 한판 붙어봅시다. 단 사형이 말한 대로 생사결은 절대 아니 되오."

    대환단을 복용한 효과로 근육질의 거대한 몸이 한결 더 커진 무장을 보며 왕기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대환단의 효과를 제대로 봐서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모양이로군. 저것 또한 대력공의 부작용이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자고로 말 안 듣는 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했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눌러줘야 하겠군.'

    왕기가 검을 들어 무장을 향해 까닥거리며 말했다.

    "어디 한번 덤벼보거라. 약속하마. 널 죽이지는 않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내공도 무장 너와 비슷한 수준으로만 사용하겠다고 약속하지."

    - 촤아앙.

    등에 메고 있던 대도를 뽑아든 무장이 한 마리 거대한 곰이 덤벼들듯 빠른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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