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 강호출두(江湖出頭) 소림편(少林編) - 4 >
서기 1345년 10월 23일
[소림사 접객원 특실]
- 쫘자작...
아직 채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 등잔불도 밝히지 않은 캄캄한 방 안에서 화경에 들어 밤을 낮같이 환하게 볼 수 있는 왕기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열심히 그리고 있던 설계도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있었다. 지난 사흘간 지겹도록 들어서 어느새 익숙해진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다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띠리링. 증기 엔진 기술은 다른 민족의 회귀자가 사용하여 자신의 민족을 크게 부흥시켰던 아이템입니다. 이 시대에서 사용할 경우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사흘간 무공에 대한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고려의 부흥을 위한 아이템과 새로운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던 왕기가 자신의 주변에 잔뜩 흩뜨려져 있는 종이 쪼가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뭐 좀 개발하려고 하면 걸리는 게 왜 이렇게 많아?"
그러자 목소리에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인공지능이 말하는 듯한 메시지가 다시 들려왔다.
[띠리링. 그건 여러 민족들의 신에 의한 협약에 따른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바꾼 중요한 발명들은 회귀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정해진 것이므로 양해 바랍니다.]
"하지만 내가 무공을 익히면서 전기라는 개념을 이용하였고,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지동설을 강의할 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아?"
그 순간 인공지능이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 대답했다.
[띠리링. 전기라는 개념은 회귀자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이 호박을 문지르다 발견한 것입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 회귀자는 여태껏 없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개념이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지동설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15세기의 사람이라고."
[띠리링. 엄밀히 말하면 지구가 구형이며 회전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나왔던 주장입니다.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에라토스테네스에 의해서 말이지요.]
그 순간 왕기의 머릿속으로 과학사에서 유명한 한 실험이 떠올랐다. 무려 기원전 200년이라는 아득한 과거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가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실험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남쪽에 있는 시에네의 지면에 수직으로 판 우물에서 하지 정오에 태양 광선이 수직으로 입사한다는 사실과, 같은 시간에 알렉산드리아의 땅 위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기에는 7도 각도의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였다. 그는 두 개의 가정을 사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였는데, 지구는 구형이며 태양 광선은 두 지점에 평행하게 도달한다는 가정이었다. 에라토스테네스 구한 지구 둘레의 계산 값은 현대의 과학자들이 계산한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
그때였다. 왕기의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들려주는 어떤 패턴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된 과거에 개발된 기술이거나, 중세나 근세에 개발된 기술이지만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던 기술, 아니면 2020년 가까운 시기에 개발된 기술들은 오히려 협약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야. 회귀자들이 사용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지.'
자신감에 가득 찬 왕기가 새로운 설계도를 거침없이 그려나가며 물었다.
"이건 어때? 이 기술은 사용해도 반발력을 불러일으키지 않겠자?"
[띠리링. 컴퓨터의 제작은 협약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기술이며 반발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서 컴퓨터를 제작해서 사용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까?]
- 쫘자작...
또다시 미련 없이 설계도를 찢어버리며 왕기가 중얼거렸다.
"당연히 제작이 불가능하지. 난 금속공학을 전공한 공돌이이지 전자공학과 출신이 아니라고. 설사 전자공학과 출신이 회귀했어도 못 만들걸? 이 시대에서는 반도체 칩 하나 제작 못할 테니까. 근데... 너. 방금 날 비웃었지?"
[띠리링. 전 절대 비웃은 적이 없습니다. 감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단지 반발력과 관련하여 정해진 조건에 따른 답변만 해드릴 뿐이지요.]
"아냐. 분명히 비웃었어. 아무튼 알겠어. 어떤 기술들을 개발해야 할지 이제 감이 좀 잡힌다고."
왕기가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설계도를 그려나가는 그 시각. 무지와 무장이 머물고 있는 승방(僧房) 인근에서는 때아닌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무지와 무장의 승방]
처참한 살해 현장이라도 되는 듯 경찰의 폴리스라인처럼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승방 사방에 금줄이 둘러쳐져 있었고 곳곳에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 소림사 21대 방장인 자비가 명한다. 이곳으로 그 누구의 접근도 금지하며 승방 인근에서 뛰거나 떠드는 자들은 계율원으로 끌려가 호된 문책을 받을 것이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무지와 무장이 머물고 있는 승방 안에서는 특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밑바닥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는 곳을 마개를 틀어막은 10개의 물동이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고,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는 탁자 아래에도 같은 숫자의 물동이가 놓여 있었다.
지난 사흘간 두문불출하며 물동이 앞에 나란히 정좌를 하고 있던 무장이 좀이 쑤신 듯 연신 몸을 꼼지락거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무지에게 물었다.
"무지 사형. 이런 말도 안 되는 허술한 실험으로 정말로 반야심공의 요결을 풀이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무지가 매서운 눈초리로 무장을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장 사제는 목소리를 낮추거라. 고려검황 대협께서 하신 말씀을 벌써 잊었느냐? 물동이에 충격이 가해지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물을 받을 때도 조심하고, 사흘간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보관을 할 것이며, 물동이 근처에서는 발걸음조차도 살살 걸으라고 말씀하셨느니라."
살짝 기가 죽은 무장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깟 물동이가 뭐라고... 저딴 걸로 시험을 한다고 해서 반야심공의 심오한 구절을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쉬었다면 벌써 해석이 되었겠지요. 나이도 어린놈이 한 말을 너무 철석같이 믿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헛고생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럼 사제가 고려검황 대협께 직접 그리 항의를 해보거라. 정 맘에 안 들면 대련 신청을 해봐도 좋겠지. 나도 최근 강호에서 돌아다니는 소문 하나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고려검황 대협께서 화경에 들었다는 도왕(刀王)의 목을 불과 삼초 만에 잘라버렸다는 소문을 말이야. 붙어서 이길 자신이 있느냐?"
"사형도 참 딱하십니다. 그 소문은 거짓일 게 분명해요. 열여섯에 화경이라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도왕의 목을 자르다니요.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고개를 돌린 무지가 방안으로 들이치는 새벽 햇빛을 확인하며 대꾸했다.
"글쎄다. 나는 왠지 믿음이 가는데... 사내(寺內)에서 도는 소문을 못 들었느냐? 화경에 드신지 오래인 공심대사조(空心大師祖)께서도 고려검황 대협을 만나고서는 그분의 무공에 한발 양보하셨다는 소문을 말이다. 공심대사조께서는 눈이 밝으신 분이시다. 고려검황 대협의 경지가 어떤지 잘못 보실 분이 절대 아니시지. 그렇게 자신 있다면 한번 붙어보거라. 단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야 하겠지. 듣기로는 사람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하니까. 사제가 소림의 승려라고 봐줄 것 같지도 않아 보이시고."
무장이 덜컥 겁이 나는지 손을 들어 잘 붙어있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툴툴거렸다.
"사형께서는 제 목이 잘려나가는 꼴을 그렇게까지 보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단지 사제가 자중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이지. 상대는 그 누구도 풀지 못했다는 반야심공을 해석한 자이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 요결을 자세히 풀어주기 위해 소림까지 직접 왕림하신 분이시지.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굳이 앙심을 품을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그런 대단한 분에게 한 수 지도를 받는다면 사제에게도 큰 도움이 될 테고 말이야."
"잘 알겠습니다. 사형이 그리 말씀하시면 사제인 제가 참지요."
"잘 생각하였다. 고려검황 대협의 말씀처럼 사흘째 아침 동이 텄으니 이제 실험 결과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꾸나."
무지가 조심스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첫 번째로 놓여 있는 물동이 밑으로 손을 뻗어 아래쪽에 꼽혀 있는 마개를 단단히 붙잡았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한 무지가 물동이 바닥에 나있는 손가락만 한 굵기의 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마개를 최대한 천천히 잡아 뽑았다.
- 뽀오오오옥.
마개가 뽑히자 물동이에 담겨 있던 물들이 탁자 아래쪽으로 천천히 흘러내려 구멍을 통해 밑에 있는 물동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지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미력우향(微力右向)이니 수와여동(水渦如動)이다, 미력우향이니 수와여동이다...'
무지가 총기로 반짝이는 눈으로 물동이 안쪽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소림사 접객원 특실]
잠시 후 왕기가 머무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무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려검황 대협. 소승 무지이옵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무지의 목소리에 약속한 사흘이 다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은 왕기가 허공섭물을 이용해 주변에 나뒹굴고 있는 종이 쪼가리들을 한 군데로 모으며 대꾸했다.
"깨어있으니 들어오너라."
방안으로 들어온 무지가 한 군데에 수북하게 뭉쳐져 있는 종이들을 보며 물었다.
"지난 사흘간 대협께서 바깥출입을 전혀 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무공 비급이라도 집필하신 것입니까?"
"개인적인 일이니 너는 몰라도 되느니라."
"알겠사옵니다. 대협."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무장이 불퉁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안 알려주는 거야."
그 순간 왕기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장. 난 고려의 왕족이며 황제가 봉한 심왕이기도 한 사람이다. 소림에서 인정한 장로의 신분이기도 하고. 내가 강호 무림의 북두라는 소림을 존중해서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긴 했지만 일개 2대 제자 따위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니라. 무장 그대가 보기에 내가 우습나? 소림의 제자는 목이 잘리고도 살아날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더냐? 난 소림이라는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과격한 반응에 무장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될 때 무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고려검황 대협 아니 심왕 전하. 무장이 전하를 가볍게 봐서 한 말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냥 궁금해서 한 말일뿐이니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나도 잘 안다. 내가 소림에 와서 심왕의 직위나 고려의 왕족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은 것은 무공을 익힌 강호인의 자격으로 왔기 때문이니라. 그런 이유로 내가 너희들을 편하게 대해주니 맘을 놓고 그리한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그런다고 해서 너희들도 그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무장은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죽음은 소림의 제자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아. 너희들 앞에 앉아 있는 내가 왕의 신분이자 소림의 장로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나를 능멸하는 것은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짓는 것이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왕기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철없는 무장을 놀리는 건 이 정도로 하고... 실험은 잘 끝난 것이더냐? 미력우향에 대한 깨달음은 얻었고?"
무지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처럼 눈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물동이에 담겨 있던 물이 거의 다 빠져나갈 때에 와류(渦流), 즉 회오리를 친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지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평상시에 익히 보던 광경이니까요."
"그럴 테지.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네 번째 물동이를 관찰하다가 알아냈습니다.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는 물의 회오리, 즉 수와(水渦)가 모두 한 방향으로 똑같이 돌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법이구나. 불과 네 번 만에 깨닫다니.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돌더냐?"
"해시계의 그림자가 돌아가는 방향과 반대로 회전을 하더군요.."
"그걸 나는 해시계의 그림자가 돌아가는 방향과 반대라고 해서 반시계 방향이라고 부르니라. 그걸로 끝이더냐?"
"아닙니다.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수와가 항상 똑같은 방향으로 돈다는 걸 여태껏 나는 왜 몰랐을까?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이 보았을 텐데라는 의문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물동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시계방향으로 아주 가볍게 회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지요."
"결과는?"
"이번에는 수와가 시계방향으로 돌며 빠져나가더군요.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왜 저하께서 물을 받아놓고 사흘이나 기다리라고 하셨는지, 왜 물동이에 충격을 주면 절대 안 된다고 그렇게 강조하셨는지를 말입니다. 수와의 회전 방향을 결정짓는 힘은 워낙 미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조금만 다른 힘을 주어도 그 힘을 단숨에 뛰어넘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상에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외력(外力)으로 인해 수와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왕기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무지를 바라보았다.
"네 스승인 혜민(慧民)대사가 널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치면서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능히 짐작이 되는구나. 정답이다. 네 말이 다 맞느니라. 수와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은 아주 미약하다. 그래서 혜능이 그 힘을 미력(微力)이라고 칭한 것이지. 사람이 느끼기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야. 하지만 실험을 통해서 네 눈으로 직접 보았듯이 그 힘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힘이다. 그 결과로 외력이 없을 시에 수와는 항상 반시계 방향으로 돌게 되어 있지. 그게 바로 육조 혜능이 창안한 반야심공의 가장 중요한 요결인 것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대지는 거대한 구이며, 미증유의 대력에 의해 끊임없이 서에서 동으로 회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힘. 그것이 바로 육조 혜능께서 말씀하신 미력우향(微力右向)이니 수와여동(水渦如動)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정답이니라. 난 그것을 고리올리(高理兀理)의 전향력(轉向力)이라고 부르고 있다. 근데...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