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48화 (48/171)

#48. < 강호출두(江湖出頭) 소림편(少林編) - 2 >

자기부상신법에 익숙해졌는지 쌍검 위에 정좌를 한 채 출발 전 척무관이 쥐여준 소림의 정보와 관련된 문서들을 읽어보고 있는 왕기가 이제는 손도 휘두르지 않으며 하늘을 초음속 전투기처럼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쉬이잉.

최신형 전투기의 맨 앞부분에 레이더의 안테나를 강한 풍압에서 보호하기 위해 씌운 덮개인 레이돔(Radome)처럼 뾰쪽한 형태의 호신강기가 상공의 대기를 가뿐하게 갈랐고, 안정적인 비행을 위해 비행기의 날개처럼 양력(揚力)을 발생시키는 형태의 매끈한 유선형 호신강기가 왕기의 신형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만화방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보는 사람처럼 소림사의 정보를 읽고 있던 왕기가 메고 있는 행낭에서 비급을 하나 꺼내었다. 대력공(大力功)이라고 적혀있는 비급을 꺼낸 왕기가 비급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놓은 맨 뒷장부터 펼쳐보았다.

[...대력공은 소림을 상징하는 무공이다. 소림이라고 하면 강호인들의 머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108 나한(羅漢), 18 동인(銅人), 4대 금강(金剛) 등은 모두 건장한 체격에 압도적인 근육질의 몸을 지니고 있다. 소림의 무인들이 그러한 신체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대력공의 공능 때문이다. 외공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대력공은 매일 같이 풀떼기만 먹고 좌선에 몰입하던 선종 계열인 소림사 승려들의 건강이 걱정된 달마대사께서 9년 면벽 끝에 만들어낸 역근경과 세수경을 바탕으로 달마대사가 직접 만들어낸 심공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강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한 이유는 대력공 진본 말미에 달마대사가 친필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놨기 때문이었다. <<대력공은 승려들의 신체를 튼튼하게 만들기에 아주 좋은 무공이기는 하나 심각한 부작용이 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은 소림의 승려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기에 부작용을 제거하는 작업을 구태여 따로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구절로 인해 달마대사가 불완전한 무공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소림사는 그러한 사실을 숨겼고, 비급에도 부작용이 어떤 건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기에 실제로 대력공의 부작용이 뭔지 알고 있는 무림인들은 드물다...]

호기심을 느낀 왕기가 빠르게 대력공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일독만으로 대력공의 원리를 단숨에 파악해낸 왕기가 뇌까렸다.

'달마대사 역시 혜능 못지않은 천재였군. 특히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이해도가 장난이 아니야. 혜능이 물리에 능했다고 하면 달마는 어지간한 현대인들보다 신체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다. 지금부터 무려 천년 전 사람이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니. 아마도 면벽 9년 동안 자신의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각종 반응 등을 차분하게 관조한 까닭이겠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온몸의 근육들을 탈바꿈시키고 골수를 씻어낸다는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일 테고.'

잠시 대력공의 부작용이 뭘까 고민하던 왕기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달마대사의 유머가 장난이 아니로군. 그렇지. 대력공의 부작용 따위는 승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아."

주섬주섬 대력공의 비급을 다시 행낭에 집어넣은 왕기가 행낭에서 수통 신발을 꺼내어 착용하며 발 아래에 펼쳐지는 광격을 보며 놔까렸다.

'한 시진만에 하남성에 있는 소림에 도착했군. 이전보다 이동 속도가 더 빨라졌어. 마음 같아서는 느긋하게 여기저기 구경하고 싶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다. 강호행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심왕부로 돌아가서 친위대를 훈련시켜야만 해. 이제는 고려의 부흥에 전력을 기울일 때야.'

날아가던 스피드를 줄인 왕기가 숭산(嵩山)의 지산 중에 하나인 소실산(少室山)에 위치한 소림사의 널찍한 경내를 향해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 쿠과과광.

가속도가 붙어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던 왕기가 지상이 다가오자 수통 신발에서 발생한 수소와 산소 가스를 폭발시켜 발밑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천천히 지상으로 착륙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테슬라의 재사용 로켓으로 유명한 '스페이스 X'가 우주에서의 임무를 끝마치고 지상으로 랜딩 하는 듯했다.

조용한 절간에서 갑작스레 터져 나온 폭음에 경내에 세워진 관음각(觀音閣), 계율원(戒律院), 접객원(接客院), 장경각(藏經閣), 육조당(六祖堂), 천왕전(天王殿), 대웅보전(大雄寶殿) 등의 건물에서 승려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무림 문파답게 나무로 된 봉(棒)과 쇠로 된 도(刀)와 발(鉢 : 바리때) 등을 손에 지고 뛰쳐나온 승려들이 정체를 밝히라고 단체로 떠들어 댈 때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이들은 승려이기 전에 무림인이다. 자고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무림인의 습성이지. 특히 한족은 염치가 없어 내가 한발 물러나면 한발 더 다가온다. 게다가 난 엄연한 소림의 장로인 신분이란 말이지. 반야심공의 비급에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었어. 반야심공을 해석한 자에게 소림의 장로에 준하는 지위를 내릴 것을 20대 방장인 지정의 이름으로 보증한다고 말이야. 시간 절약도 할 겸 해서 강하게 나간다.'

- 쾅.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진각을 강하게 밟은 왕기가 오색찬란한 강기를 두른 쌍검을 허공에서 자유롭게 이동시키며 외쳤다.

"소림 최강이라는 공심(空心)은 어디 있느냐? 나에게 제발 반야심공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던 자심(慈心)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이냐? 반야심공을 해석한 자에게 대환단을 주겠다고 보증한 지정(智靜)은 지금 당장 썩 나서거라."

왕기의 무례한 발언에 화가 난 승려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소림사 뒤편에 있는 숲속에서 한 명의 승려가 허공을 자유롭게 밟는 능공허도를 시전해서 소림사 쪽으로 다급히 날아오며 소림 72절예 중에 하나인 사자후(獅子吼)로 우렁차게 외쳤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소림의 제자들은 동작을 멈추거라. 은인(恩人)께서 말씀하신 공심이 여기 있소이다."

[소림사 방장실]

무욕과 무소유를 계율로 삼는 소림사답게 나무로 제작된 가구 몇 개만이 단출하게 놓여있는 소박한 방장실에서 왕기가 몇몇의 나이가 지긋한 중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찰이 없어서 다행이구려. 소림사가 자랑하는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陳)과 한판 붙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말이오."

차를 홀짝거리던 왕기가 내뱉은 말에 당대의 사왕(四王) 중에 한 명인 공심대사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 승은 백팔나한진을 일다경 안에 깰 자신이 있소이다. 하지만 화경에 든 도왕을 칼질 세 번에 죽일 능력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지요. 본 승보다 더 고수인 고려검황에게 백팔나한진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아무튼 감사드리오. 당대의 천하제일 고수라 불리는 고려검황께서 이렇게 직접 반야심공을 전수하기 위해 소림까지 행차를 하시다니 말이외다."

- 탁.

찻잔을 내려놓은 왕기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반야심공을 소림에게 돌려드리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오. 단 본인이 깨달은 내용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려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소이다. 어떻게 전수할지는 일전에 비무대회 때 공증을 서셨던 자심대사에게 일찌감치 알려드렸소. 소림에서는 아마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오."

그러자 공심대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려검황께서는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고 들었소이다. 본 소림도 마찬가지요. 전대 방장이었던 지정대사는 이미 방장 자리를 물러났소이다. 21대 방장으로 등극한 자비대사가 약속대로 대환단 3알을 드릴 것이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젊고 뛰어난 제자 2명을 준비해 놨소이다."

말을 끝마치며 공심대사가 21대 방장인 자비대사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자비대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밖에 있는 무지(無智)와 무장(無藏)은 안으로 들어오거라."

"무지와 무장이라. 소림의 돌림자는 공(空), 지(智), 자(慈), 혜(慧), 무(無), 정(靜) 순으로 나가는 걸로 알고 있소이다. 당대의 방장이 자비이니 무지와 무장은 2대 제자겠구려."

"맞소이다. 1대 제자이자 장경각 각주인 혜민(慧民)의 제자가 무지이고, 천왕전의 전주인 혜장(慧張)의 제자가 무장이외다."

- 덜컥.

그 순간 방장실의 문이 열리면서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아 보이는 두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특이하게 한쪽 허리춤에 쇠로 된 발우(鉢盂) 두 개를 겹쳐 차고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리는 쇳소리가 들리는 청수하게 생긴 용모에 눈빛에 지혜가 가득 찬 선비풍의 승려였고, 다른 한 명은 얼굴에 청춘의 심벌인 여드름이 가득하고 거대한 대도(大刀)를 등에 메고 있었으며 2미터 가까이 되는 키에 아널드 슈워제네거 같은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사찰의 수문신장(守門神將)인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보는  듯했다.

선비풍의 승려가 소림 특유의 반장을 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고려검황 대협 반갑습니다. 소승은 대협처럼 고려인이며 스승으로부터 반야심공과 쌍발을 쓰는 법을 배우고 있는 무지라고 하옵니다. 올해로 18세이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머릿속으로 척무관이 알려준 정보를 검색한 왕기가 무지를 빠르게 아래위로 훑어보며 대꾸했다.

"소림 백 년 이내 가장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무지가 바로 그대로군. 그 나이에 반야심공을 벌써 사성(四成)까지 익힌 걸 보니 그럴 만도 해. 난 소림에 딱 일주일만 머물다 갈 것이다. 그 기간 내에 내가 풀이해 주는 반야심공을 이해하지 못하면 백 년이 지나도 못 익힐 것이기 때문이야. 반야심공은 깨달음의 무공이기 때문에 오래 붙잡고 있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협."

무지와의 상견례가 끝나자 옆에 있던 무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고려검황 대협 반갑습니다. 소승은 스승으로부터 대력금강공(大力金剛功)과 불영도법(佛影刀法)을 배우고 있는 무장이라고 하옵니다. 올해로 17세이며 무지 사형의 사제가 돼옵니다. 그리고 소승은 대협처럼 고려인이 아닙니다."

무장이 고려인이 아니라는 소리에 왕기가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라는 눈빛으로 방장을 매섭게 노려볼 때 무장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승은 한족도 몽골족도 아닙니다. 소림에는 고려인이 단 한 명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제가 선정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소승이 발해(渤海)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무장의 말에 고개를 돌린 왕기가 물었다.

"응? 고려인이 아니면서 발해의 후손이라고? 그럼 말갈족(靺鞨族)인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협. 무지 사형과 소승은 만주 쪽 부여부에 남아있던 발해국의 후손들이 모여살던 조그마한 마을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무지 사형은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유명했지요. 과거 마을에 지독한 역병(疫病)이 돌면서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나가 폐허로 변해버릴 때 우연히 마을을 지나가시던 소림의 승려분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있던 저희 둘을 구해주셨지요. 제 정체성은 한족이나 몽골족이 아니라 고려인에 더 가깝습니다."

"뭐 그 정도면 이해가 되는군."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왕기의 반응에 무장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소승도 무지 사형처럼 소림 백 년 이내로 가장 뛰어난 근골(筋骨)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뭐 지켜보면 알겠지. 일각이 아쉬우니 일어나자고."

이윽고 왕기와 무지, 무장이 방장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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