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47화 (47/171)

#47. < 강호출두(江湖出頭) 소림편(少林編) - 1 >

서기 1345년 10월 18일

반나절 가까이 근위대와 팽가의 식솔들이 치열한 격전을 치른 팽가의 장원은 땅과 건물 곳곳에 박혀있는 화살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로 인해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밤이 새고 날이 밝아오자 근위대 병사들이 뒷정리에 한창이었다.

- 끙차. 끙차...

곳곳에서 병사들이 들춰 매거나 들고 오는 시체들이 한 장소로 모여지고 있을 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자신의 옆에 시립해 있는 근위대 대장과 척무관 그리고 앙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앙리는 시체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팽가의 재물 창고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거라. 그리고 창고 정리가 끝나면 고생한 근위대의 대장과 병사들에게 적당히 재물을 나눠주도록 해. 싸우다가 죽거나 다친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할 테니 너무 빡빡하게 처리하지는 말란 말이다. 척무관은 고려 병사들과 함께 앙리를 엄중하게 호위해 주도록 하고. 누가 시비를 걸거나 개인적으로 재물을 탐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버려.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전하.

위엄이 서린 왕기의 명령에 앙리와 척무관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할 때 근위대 대장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감사합니다. 심왕 전하. 병사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이다. 나를 대신해서 팽가를 정리하느라 고생했으니 챙겨드리는 것뿐이니까 말이오. 나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소이다."

말을 하고 있던 왕기의 이맛살이 갑자기 와락 찌푸려졌다. 여자치고는 기골이 장대한 편이기는 하나 보기 드문 미모와 몸매를 지닌 여인의 벌거벗은 사체가 병사들에게 들려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양팔을 잘라버렸고 온몸에 피멍이 들어있으며 특히 하복부 쪽에 선혈이 낭자한 것이 누가 보더라도 윤간을 당한 모습이었다.

왕기가 근위대의 대장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그대가 서신에 분명히 적지 않았소? 내가 팽가의 정문만 뚫어주면 근위대가 황제의 명대로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리되 나의 명예를 생각해서 강간 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적어놓은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오."

"그것이... 상대가 무림사미 중에 하나인 팽도일미(彭刀一美)다 보니 병사들이 욕심을 부린 것 같습니다. 팽도일미의 손에 죽은 병사들도 여럿 되고 그래서 복수심에 그만..."

"대장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소?"

"모를 리가 있겠사옵니까? 고려의 적통이신 왕위 후계자이시면서 16세에 화경에 든 천재이며 자신의 앞에서 고려 오랑캐 소리를 지껄이는 자는 가차 없이 목을 치며 한번 내뱉은 말은 철석같이 지키시는 분이시지요."

"잘 알고 계시는구려. 난 약속을 어기는 자를 병적으로 싫어하오. 내가 직접 손을 쓰기 전에 대장께서 처리하시오. 팽도일미의 윤간에 참여한 근위대 병사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목을 자르든 양물을 자르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이오. 그 결과물에 내게 보여주시구려. 그렇지 않다면 근위대에게 돌아갈 재물은 없소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이까?"

"잘 알겠습니다. 전하."

왕기가 앙리와 척무관을 보며 말했다.

"앙리는 근위대 대장이 확실한 결과물을 가져오기 전에는 절대 재물을 내어주지 말거라. 그리고 척무관은 혹시 강간에 동참한 고려 병사가 있는지 알아보고 그런 자가 있다면 지금 즉시 목을 잘라서 들고 오도록 해."

- 네. 전하.

서슬 퍼런 왕기의 말에 근위대 대장과 척무관이 다급히 달려가자 왕기가 혼자 남은 앙리에게 물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전하."

"그렇다면 기하학에서 말하는 공리(公理)와 공준(公準)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군. 제5공준이 무엇이더냐?"

"한 직선이 다른 두 직선과  만날 때 어느 한쪽에 나타나는 두각을 합해서 180도보다 작을 때는 그 두 직선을 어디까지 연장해도 합해서 180도보다 작은 각이 있는 쪽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달달 외운 듯 앙리가 막힘없이 대답을 하자 왕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직선과 원, 삼각형, 사각형, 각도, 선분 등의 정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군.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알고 있느냐?"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니 기쁘군. 서역에는 원을 그릴 수 있는 컴퍼스(Compass)가 있느냐?"

"있지요. 기하학에 있어서 도형을 그리는 것은 필수입니다. 컴퍼스와 각도기, 삼각자 등은 기하학을 배우는 자에게 필수적인 도구이지요."

"오호... 이 시대에 각도기도 있다 이거지? 그럼 가장 큰 각도는 몇 도이더냐?"

"360도이지요."

"왜 360도인지도 알고 있느냐?"

"네. 전하. 과거에는 1년이 360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1도씩 해서 각도를 360도로 잡은 것이지요. 하지만 1년은 365일입니다."

"맞아.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지. 360은 나누기에 편한 숫자이지만 365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야. 90X4도 360이고 60X6도 360이니까. 내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런데... 머나먼 서역에서 대도까지 올 때 길을 어떻게 찾아서 오는 것이냐?"

"보통은 여러 번 다녀와봐서 길을 잘 아는 자가 인솔을 합니다. 여러 상단들이 뭉쳐서 같이 출발을 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자가 없을 때는 나침반과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오지요. 북극성(北極星)과 쓰리-씨스터(Three-Sister)를 각도기로 재어보고서 방향을 잡습니다."

"쓰리-시스터? 세 개의 별이 나란히 서서 밝게 빛나는 별자리를 말하는 모양이로군. 오리온 별자리 말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 각도기를 이용해 별자리를 측정하면 대도까지 손쉽게 길을 찾아서 올 수 있지요."

"그럼 바다를 항해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바다에서는 소인도 잘 모릅니다. 들리는 말로는 선원들도 별자리를 보고 운행을 한다고는 하는데 바다는 파도가 치기에 정확한 각도를 재기가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앙리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뇌까렸다.

'기술력이 아직 그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로군. 험난한 육로로 상품을 옮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배를 이용해 대량의 화물을 적재해 이송하는 대항해시대를 열려면 망망대해 위에서도 배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는 기술이 반드시 필요해. 이 시대에는 GPS 따위가 없다고. 팔아먹을 쓸만한 아이템이 있겠군. 기존의 기술력으로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니 반발력도 없을 테고 말이야.'

왕기가 머릿속으로 새로운 아이템의 설계를 하고 있을 때 다급히 뛰어갔던 근위대 대장이 머리통 3개와 양물 5개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고, 척무관은 빈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전하. 고려 병사들은 단 한 명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팽가의 가주전을 우선적으로 정리해 놨으니 그리로 이동을 하시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근위대 대장이 건네주는 머리통과 양물들을 시체를 모아놓는 장소로 집어던진 왕기가 앙리를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재물의 정리를 시작하도록."

서기 1345년 10월 20일

[팽가의 가주전]

지난 이틀간 앙리가 막대한 양의 재물을 정리하는 동안 왕기가 팽가에 있는 대장간에서 망치를 들고 뚱땅거리며 뭔가를 만드는 작업을 하였고, 시간이 나는 대로 앞날을 위한 계획서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다. 그랬던 왕기가 자신의 새로운 집무실에서 행낭이 옆에 놓여 있는 서탁에 앉아 붓을 들고 글을 쓰며 앙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팽가가 보유하고 있던 재물의 1/3이 황제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보다 더 적었다가는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남은 재물들 중 또 1/3이 이번 일을 행한 근위대의 병사들과 고위 무관들 그리고 고려촌에서 납치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나누어 뿌려졌습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팽가의 재물 중 44/100. 즉 절반에 가까운 재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산학이 뛰어나다고 하더니 계산이 정확하군, 그 정도의 재물이면 만족한다. 내가 따로 말한 건 어떻게 되었나?"

"팽가의 재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들 중에서 약초 창고는 전하의 말씀처럼 일체의 반출을 불허했습니다."

"잘 했다. 뛰어난 병사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질 좋은 약재들이 필요해. 앙리는 내가 강호로 나갔다가 돌아오기 전까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무슨 일이옵니까?"

왕기가 품속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상자를 꺼내어 넘겨주며 말했다.

"이걸 이용해 서역을 다녀오너라. 가는 도중 매일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간에 해의 각도를 재고, 밤에는 달과 북극성 그리고 쓰리-시스터의 각도를 꼼꼼히 기록하여야만 할 것이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이고. 특히 대도, 콘스탄티노플, 베네치아, 로마, 파리 등과 같은 중요한 지점의 각도는 반드시 기록하여야만 한다."

- 달깍.

상자를 열어본 앙리가 이상하게 생긴 물체를 보며 물었다.

"전하.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육분의(六分儀)라는 것이다. 육분의에 달린 호가 60도로 전체 원주의 1/6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만드는 것은 처음이라 아직 좀 조잡하기는 하지만 천체의 각도를 재는 도구이다. 유리와 쇠 그리고 각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니라. 기존의 각도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안에 수평계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야. 유리관 안에 거품이 하나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유리관에 줄이 그어져 있는 정중앙에 거품이 오면 수평이 되는 것이지. 그 말인즉슨 지평선과 수평선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정확한 각도를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특히 유용한 물건이지. 이것의 성능을 그대가 직접 시험해 줘야 하겠다. 그리고..."

왕기가 지난 이틀간 정리한 문서 중에 하나를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서역에 가서 구해와야 할 것들의 목록이다. 있다면 비싼 대가를 치러서라도 반드시 구해와야만 할 것이고 없다면 그냥 돌아오면 된다. 지금 이 시대에 서역에 어떤 것들이 존재하는지 파악을 해야만 하니까. 알기 싶도록 그림도 그려놨으니 헛갈리지는 않을 것이야"

- 촤르륵.

문서를 받아들고 첫 페이지를 넘겨본 앙리가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소의 그림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젖소가 아닙니까?"

"맞아. 다행히 서역에 있는 모양이로군. 건강한 젖소 100쌍을 구해서 돌아와 주게."

"하지만 전하. 동물의 젖과 치즈 그리고 요구르트는 몽골족에게도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젖을 이용해서 만들지요."

"꼭 그것만을 위한 것은 아니니까 그냥 구해오게나."

"하지만 비단길은 워낙 험해서 대량의 젖소를 대도까지 끌고 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걱정 말게. 충분한 인력과 재물을 지원해 줄 테니까 말이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앙리가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이런 것들은 서역에도 없는 작물들입니다."

앙리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뇌까렸다.

'그렇겠지. 다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작물들이니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것은 1492년도의 일이다. 아직 까마득한 미래의 일이야. 원정대를 꾸려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던지 내가 시간을 내어 다녀와야만 하겠군.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는 게 빠르겠어.'

"고무나무라는 것을 들어는 보았으나 서역에는 없습니다. 인도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인도에 있는 고무나무로 고무를 만들 수 있는 건가? 내 기억으로는 아마존 강의 상류지역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 역시 확인을 해봐야 하겠군.'

"사탕수수라는 것도 처음 들어봅니다."

"거기에 적혀있는 것을 일일이 다 읊을 필요는 없다. 서역에서 구할 수 있는 것만 구해오면 되는 것이야. 하지만 뛰어난 유리 장인과 스테인드글라스에 청색과 황색을 내는 재료는 반드시 구해오도록 해. 이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전하."

왕기가 고개를 돌려 척무관을 보며 말했다.

"척무관은 오늘 당장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로 출발하게. 거기에서 병사를 얻어오도록 하고 재물을 넉넉하게 챙겨서 앙리와 함께 서역으로 출발할 원정대를 차질 없이 꾸리도록 해. 이번 원정에 고려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야."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심주와 요양에 거주하고 있는 젊은 고려 남자들 중 몸이 건장하고 무공에 재능이 있는 자들로 추려서 심왕부로 데려오도록. 그들에게 무공을 익혀 나의 근위대로 만들 생각이니까."

"전하. 추려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다스리는 땅의 백성들이니까요. 하지만 많은 수의 장정들을 한꺼번에 빼오면 고려인들이 짓고 있는 농사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지금은 추수기라 한창 손이 필요할 때이니까요."

"팽가를 멸문시키고 얻은 넘쳐나는 재물은 뒀다가 얻다 쓸 것인가? 적당히 보상을 해주고 데려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하. 전하께서도 익히 아시겠지만 장정들에게 기(氣)를 느끼게 만들어서 무공을 익히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하의 조치가 별다른 효과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걱정 말게. 그에 대한 대비책이 나에게 있으니까. 척무관은 사람만 잘 추려오면 되는 것이야. 반드시 고려인들로 말이야."

"몇이나 추려올까요? 젊고 건장한 장정들만 추려도 4~5천은 거뜬히 넘어갈 텐데요."

"천 명만 추려오게나. 그런 다음 내가 강호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시키도록 하고. 심왕부로 바뀐 팽가의 연무장은 넓으니 충분히 감당이 될 것이야."

"알겠사옵니다. 전하. 소관이 강호로 나가시는 저하께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왕기의 물음에 척무관이 품에서 조그마한 침통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시독침(試毒針)입니다. 사천 당가에서 제작해 시중에 내다 팔고 있는 정품이지요."

"오대세가에 속해있는 사천 당가가 물건을 만들어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인가?"

"무인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소림, 무당, 화산과 같은 역사가 깊고 명성이 뛰어난 구대문파들은 속가의 뿌리가 깊고, 가진 땅도 많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시주도 많이 들어와서 별다른 상행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멸문한 점창을 대신해 새롭게 구대문파로 들어온 모산파(茅山派)나 명성이 뒤떨어지는 오대세가들은 그 입장이 다르지요. 당가에서는 시독침을, 연단술(練丹術)이 뛰어난 모산파에서는 각종 단약과 연단 재료들을 내다 팔고 있습니다."

"그럼 새로이 오대세가로 들어온 산동에 있는 벽력가에서는 무엇을 파는가? 설마 벽력탄을 파는 것은 아니겠지?"

"벽력탄은 내다 팔기에 너무 위험한 물건이지요. 화약에 능한 가문이다 보니 벽력가에서는 폭죽을 제조해 팔고 있습니다."

"폭죽이라..."

"벽력가에서 만드는 폭죽은 그 어디에서 만드는 폭죽보다 화려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허공에서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인기 상품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지요. 시독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천 당가에서 만든 시독침은 강호상에서 유통되는 모든 독들을 다 검출해 냅니다. 그 때문에 단가가 여간 비싼 게 아니지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독의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말이야."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 사천 당가이지요. 시독침으로도 검출되지 않는 독을 사용하는 자들은 사천 당가가 직접 나서서 죽여버리니까요. 그런 독을 사용하는 것은 사천 당가와 척을 지겠다는 뜻이기 때문에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척무관이 품에서 손바닥만 한 목함 하나를 꺼내어 왕기에게 내밀었다.

"전하께서 강호로 나가신다고 하길래 부랴부랴 제작한 심왕의 도장입니다. 이 도장을 찍은 문서는 심왕부의 이름을 내건 공식적인 문서가 될 것이니 전하께서 필요하실 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꼼꼼하게 잘 챙겨줘서 고맙군. 나도 척무관에게 줄 선물이 하나 있네."

"무엇이옵니까?"

왕기가 얇은 책자 하나를 척무관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가 새로이 창안한 신법이라네. 척무관이 나의 자기부상신법을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하나 만들었지. 강호에서 사용하는 신법의 기본 원리와 곤륜파의 운룡대팔식의 원리를 참고해서 만든 비천운룡신법(飛天雲龍身法)이라는 것이야. 물론 내가 사용하는 신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 하지만 그 성능은 뛰어나다고 내가 장담하네. 자세히 읽어보고 원리를 이해하면 척무관도 나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게 될 것이야. 내가 강호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열심히 익혀보게나."

"감사하옵니다. 전하."

"익히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물어보도록 하고..."

왕기가 수통과 비상식량, 지원보초 및 일전에 제작한 수통 신발이 들어가 있는 행낭을 집어 들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없는 동안 척무관이 심왕부를 맡아서 내가 말한 일들을 잘 진행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전하. 근데... 강호에 나가시면 어디부터 들리실 것입니까?"

"당연히 소림(少林)부터 가야겠지."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그럼 이걸 가져가시지요."

척무관이 내미는 두터운 문서 꾸러미를 받아들며 왕기가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

"개방에 부탁해서 얻은 것입니다. 소림의 현 상황과 세력 판도 그리고 소림에서 촉망받고 있는 각종 인재들의 목록이지요. 거기에 소림의 오공(五功) 중에서 전하께서 익히신 반야를 제외한 대력(大力)과 금강(金剛) 그리고 혜광(慧光)과 무량(無量)의 비급을 같이 챙겨놨습니다. 소림으로 가시는 길에 참고해서 보시라고요. 전하께서 원하시는 인재들을 반드시 구하시길 기원합니다."

"알겠네. 내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도록 하지. 너무 걱정 말게나. 강호에 나가서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이게 다 척무관이 잘 훈련을 시켜준 덕분이지."

왕기의 말에 척무관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천하에 전하를 상대할 자가 누가 있다고 소관이 걱정을 하겠습니까? 한 번씩 개방을 통해 소식이나 전달해 주시지요."

"그러도록 하지."

가주전의 문을 열은 왕기가 귀신처럼 허공으로 미끄러지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뛰어난 인재를 구하기 위한 왕기의 강호행(江湖行)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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