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42화 (42/171)

#42. <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 1 >

[흥성궁에 위치한 기황후의 침실]

- 스르르.

밤이 깊어 자시(子時)가 훌쩍 넘은 시각 기황후의 침실 앞으로 소리도 없이 허공을 미끄러지며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나타난 한 인형이 있었다. 한쪽 허리에는 목함을, 다른 한쪽 허리에는 두툼한 가죽 주머니를 차고서 경비병들의 눈을 손쉽게 피해 잠입한 인형의 정체는 랑방에서의 혈전을 끝내고 단숨에 대도로 날아온 왕기였다. 대도로 돌아오자마자 기황후의 침실로 찾아온 왕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자정원사. 자정원사 거기 있는가?"

그러자 고용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나왔다가 왕기를 발견하고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대군 저하.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옵니까? 도망친 바얀 승상을 잡기 위해 황제의 명을 받고서 오늘 아침에 항주 쪽으로 남하하신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만..."

- 툭. 툭.

왕기가 허리에 차고 있는 목합을 가볍게 두드리며 대꾸했다.

"이미 죽여서 목을 담아 왔네. 황제에게 진상하기 전에 자네와 의논할 일이 좀 있어서 여기로 먼저 왔으니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그러시지요. 소인이 황후마마를 깨울까요? 방금 전 잠이 드셨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자네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까."

왕기가 기황후가 아니라 자신에게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챈 고용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알겠사옵니다. 저하. 황후마마께서 잠이 드셨으니 소인이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입니다. 소인의 거처로 가셔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고용보의 처소]

- 딸칵.

목합을 열은 고용보가 안에 담겨있는 잘린 바얀의 머리통을 요리조리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정말로 바얀 승상의 목이로군요. 대단하십니다. 저하. 이자를 어디서 붙잡으신 것입니까?"

"태호 인근에서 잡았지."

고용보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저하. 그러시면 하루 사이에 태호까지 가셔서 이자의 목을 자른 다음 다시 대도로 돌아오셨다는 것입니까?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이옵니까?"

"내 주특기가 경공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황제가 날 보낸 거 아닌가? 중간에 다른 일만 없었다면 더 일찍 왔을 걸세."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고용보가 물었다.

"대단하시옵니다. 저하. 그런 일은 달마와 장삼풍 조차도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경지를 이미 벗어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하신 저하께서 소인과 의논할 일이란 것이 무엇이옵니까?"

- 툭.

왕기가 허리춤에 묶여있는 가죽 주머니를 풀어서 고용보의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황실 쪽 일은 척무관보다 그대가 더 잘 처리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저하.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승상이 도망칠 때 챙겨서 떠났던 재물이라네. 그중에 아주 일부만 가져왔지. 나머지는 내가 가질 생각인데 적당히 처리가 가능하겠는가?"

"그러니까... 승상의 재물을 황제에게도 보고를 하지 않고서 대군 저하께서 다 가지고 싶다는 뜻인 것이지요?"

"바로 그거라네. 고려의 부흥을 위해서는 막대한 재물이 필요하니까 말일세. 하지만 그걸로 뒷말이 나오는 걸 원하지 않네. 황제가 나에게 트집을 잡는 것도 원하지 않고 말이야. 처리가 가능하겠는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용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 가죽 주머니 안에 있는 재물을 소인이 원나라 조정의 권신들과 황족들에게 적당히 뿌려서 뒷말이 나오지 않게 작업을 해달라는 뜻이로군요?"

"말이 잘 통해서 좋군. 가능하겠나? 내가 그런 엄청난 재물을 처음 봐서 가슴이 벌렁거려서 말이야."

고용보가 가죽 주머니를 열어서 각종 보석들과 중통보초(中統寶鈔) 2관문 짜리가 가득한 것을 보며 물었다.

"재물이 어느 정도나 되길래 그러시는 것이옵니까? 뇌물로 뿌리라고 주신 이것도 상당한 양이옵니다만..."

"그런 가죽 주머니로 40개 정도는 족히 나올걸세."

"휘유... 승상이 엄청나게 재물을 많이 모은 모양이로군요. 알겠습니다. 가능할 것이니 안심하시옵소서. 다행히 오늘 황제도 적잖은 재물을 챙긴 상황이라 저하의 재물을 탐내어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황제도 재물을 챙겼다고? 내가 없는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있었지요. 대군 저하가 대도를 떠나자마자 황제가 명을 내려 승상의 집으로 병사를 보내어 가족 모두를 참살하고 승상의 집에 있는 재물을 모조리 챙겼습니다. 승상이 챙겨서 도망을 쳤다고는 하지만 혼자 몸으로 가지고 갈수 있는 재물의 양에는 한계가 있지요. 남아 있는 재물도 엄청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승상이 도망쳤다는 것을 빨리 알리지 않은 승상의 조카이자 어사대부인 토크토아의 죄를 물어 일가족의 목을 쳤습니다. 어사대부 집안에 있던 모든 재물도 황제가 챙겼고요. 그러니 대군 저하께서 뒷주머니로 재물을 좀 챙기신다고 해서 별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다행이로군. 또 하나 의논할 것이 있네. 황제가 날 무림으로 내보내 주도록 작업을 해주게나. 아침에 황제를 알현했을 때 내가 직접 청을 했는데 확답을 해주지 않더라고."

"그럴 것입니다. 정신이 올바른 박힌 군주가 가장 욕심을 내는 것은 절색의 미녀도 산더미 같은 재물도 아닙니다. 그건 바로 능력이 뛰어난 신하이지요. 화경에 달한 고수이며 항주까지 하루 만에 갔다 올 수 있는 자를 천하의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그런 건 황제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황제가 끝까지 날 놓아주지 않을까 봐 말이야. 나도 황제처럼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을 구해야만 한다네. 고려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말이야. 무공을 익힐 때야 안전한 황실이 좋았겠지만 천년만년 여기에 있을 수만은 없다고."

왕기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고용보가 입을 열었다.

"저하. 이 문제는 접근을 달리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저하에게 지금 무림의 감찰관 자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지금의 내 명성과 무공이라면 그까짓 감투 따위는 없어도 무림을 주유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저하께서 무림으로 나가시려면 일단 뚤루게(원나라에 잡힌 볼모를 일컫는 말)의 신분부터 벗어던져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고려의 왕족이라는 신분 대신 새로운 신분이 필요하지요. 저하. 혹시 대도에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여 원나라와 고려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학문을 발전시킨 분이 누구이신지 아십니까?"

"그분은 고려의 26대 왕이셨던 충선왕(忠宣王)이 아니신가?"

"그렇사옵니다. 충선왕은 오랜 시간 동안 원에 있으면서도 뚤루게의 신분이 아니셨지요. 직계상 고려의 왕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려의 왕보다 위계(位階)가 높은 심왕(瀋王) 작위를 받았었지. 잘 알고 있다네."

"정확합니다. 심왕은 황실 서열 39위이기 때문에 41위인 고려의 왕보다 높은 신분이면서 고려 왕족에게 주어지는 짐들을 벗어날 수가 있는 직위입니다. 저하께서 심왕의 직위를 받으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심왕은 똘루게가 아닐뿐더러 쿠릴타이 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높은 신분이기 때문에 황제라고 해도 저하의 강호행을 막을 수가 없지요.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심왕이셨던 충선왕께서는 고려의 왕이 되시면서 고려를 다스리는 것에 실패하셨다는 것입니다."

"충선왕께서 고려의 왕이 된 이후에도 고려보다 원에 더 오래 머물고 계셨으니까 그러하지. 왕이 자꾸 나라를 비우는 바람에 개혁 정치도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고려의 만백성들이 고난에 빠졌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저하에게는 그럴 염려가 없지 않으십니까? 아침은 개경에서 드시고, 점심은 대도에서, 저녁은 항주에서 드실 수 있는 경공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저하의 믿기지 않는 기동력이라면 원나라의 심왕이면서도 고려의 왕위를 잘 수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잠시 중국과 한국의 지도를 그려보던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겠지. 서해 바다를 가로지르면 고려의 개경에서 원나라의 대도까지 두세 시간이면 도착할 테니까. 바다이니 물은 넘쳐날 테고 말이야."

"바다에 물이 넘쳐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게 왜 중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침에 개경에서 업무지시를 내리고 낮에 대도로 왔다가 볼일을 보신 다음 다시 저녁에 개경으로 돌아가실 수 있는 저하이시라면 못하실 것이 없으실 것입니다."

"황제가 날 심왕으로 순순히 봉해주겠는가?"

"그런 일은 소인의 힘으로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황후마마께서 직접 나서시면 가능할 것입니다. 승상 바얀의 목을 잘라 내전을 막아낸 공적이라면 황제께서도 고관들의 동의를 얻기가 쉬울 것이고요. 소인이 황후마마께 한번 말씀을 드려보겠사옵니다."

"알겠네. 자정원사가 힘을 좀 써주게나. 만약 내가 심왕에 봉해져서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황후마마와 자네에게 가죽 주머니를 하나씩 더 드리도록 하지."

재물을 주겠다는 왕기의 말에 고용보가 고개를 숙였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하옵니다. 저하."

"재물을 아낄 필요는 없네. 먹은 놈이 힘쓴다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 일은 그렇게 정리하고... 하나 더 부탁할 일이 있어."

"무엇이옵니까? 저하. 말씀만 하시옵소서."

"내가 대도로 돌아올 때 도왕의 습격을 받았다네."

"그런 일이... 저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멀쩡하네. 단 3초 만에 도왕의 목을 잘랐으니까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왕기의 설명을 다 들은 고용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하북 팽가의 무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고려촌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납치해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시옵니까?"

"자고로 혈채(血債)는 피로 갚아야만 하는 것이지. 팽가의 죄를 물어 피로 씻을 생각이라네. 그렇게 되면 상당한 재물을 또 얻을 것이야.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상대는 정도를 표방하는 오대세가 중의 하나인 하북 팽가란 말이지. 무림에서의 논란은 내가 잠재울 자신이 있다네. 대의명분도 내게 있고 그럴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야. 문제는 하북 팽가가 대도의 오랜 터줏대감이라는 것이야. 황실 이곳저곳에 적지 않은 인맥이 닿아 있을 것이야."

"그러니까... 저하께서 팽가를 치는데 황실에서 방해를 놓지 않도록 사전에 잘 조율해 놓으라는 것이지요?"

"맞아.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말이야. 내가 요즘 제법 잘나가고 있지 않은가? 시기 질투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일세. 그런 자들이 날 피에 미친 살인귀(殺人鬼)나 악독한 마두(魔頭)로 몰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작업을 하는데 재물이 필요하다면 더 주겠네. 팽가의 재물을 획득하면 남는 장사일 테니까."

고용보가 가죽 주머니 안을 한 번 더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이 정도면 재물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인이 아침이 밝는 대로 저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작업해 놓겠습니다. 그럼 팽가를 언제쯤 치실 것입니까?"

"그대의 작업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칠 걸세. 일단 무림 쪽의 작업은 내일 아침 당장 시작해야 하겠지만. 팽가에서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원군을 부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대군 저하. 소인이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용보의 처소에서 나온 왕기가 척무관을 찾아가기 위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하늘에 띄워놓았던 큼지막한 가죽 주머니 2개를 매달고 있는 삼삼이와 도왕의 목을 매달고 있는 칠칠이를 찾은 후 빠르게 이동했다.

서기 1345년 10월 15일

새벽 동이 트자마자 척무관이 이끄는 고려 병사들이 랑방 인근에 남겨둔 고려인들과 팽가의 무인들을 호송하기 위해 달려갔고, 몇몇은 대도에 있는 춘향각을 향해 말을 몰아 달려갔다. 왕기가 도왕의 목을 춘향각 처마에 매달기 위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밤새도록 운기를 하면서 도왕과의 혈전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한 왕기가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있을 때 랑방으로 떠났던 척무관이 도착해서 보고했다.

"저하. 고려인들과 팽가 무인들을 모두 대도로 데리고 왔습니다. 어떡할까요?"

"그들을 데리고 지금 당장 춘향각으로 출발하거라.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살아남은 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듣는 게 더 좋을 테니까."

춘향각으로 척무관을 먼저 파견한 왕기가 식사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검을 허공에 띄운 다음 점프를 하여 올라탔다. 가죽 주머니는 따로 챙겨둔 듯 단출하게 목함 하나만을 손에 쥔 왕기가 검을 타고 춘향각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착한 춘향각 앞은 어느새 소문이 퍼졌는지 아침부터 무림인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검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는 왕기를 발견하고서는 소리쳤다.

- 고려검왕이다! 고려검왕이 전설의 어검비행술로 날아오고 있다고.

- 검왕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검황(劍皇)이라고 불러야 할 걸세. 화경에 든 도왕의 목을 쳤다고 하지 않는가?

- 맞는 말일세. 이제부터 강호는 일비와 일황 그리고 사왕과 오검으로 나눠질 거야. 고려검황을 오왕 급으로 묶을 수는 없지.

무림인들이 모여있는 곳 상공에 도착한 왕기가 목함에서 도왕의 잘린 머리통을 꺼내어 손에 쥔 다음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강호동도 여러분들은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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