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38화 (38/171)
  • #38. < 원나라 황제와의 면담 - 3 >

    오색찬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대명전 안으로 두려움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왕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마치 중세 유럽 시대에 건축된 대성당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세 시대 때 유행했던 고딕 건축물 특유의 넓은 유리창이 대명전 사방의 벽에 뚫려져 있었고 형형색색의 색유리로 가득 장식되어 있는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대명전 내부를 오색찬란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의 대성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색유리로 표현하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성서(聖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련 내용 등을 주로 설명하는 대성당의 그림들과 달리 대명전 유리창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은 칭기즈칸을 상징하는 거대한 푸른 늑대와 활을 든 몽골족 기마병들이 적들을 포위 공격해서 섬멸하는 그림, 사로잡은 적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있는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몽골족의 뿌리가 무엇인지, 원나라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홍(紅), 청(靑), 녹(綠), 황(黃) 등의 다양한 색깔로 장식된 사방의 유리창을 한 바퀴 빙 둘러본 왕기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이건...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로군."

    그러자 옆에 있던 앙리가 또다시 눈을 크게 뜨며 대꾸했다.

    "고려검왕의 식견이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와 같은 것을 다른 곳에서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원나라에서도 이곳 황실 그것도 오직 대명전에만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곳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느라 이탈리아에 있는 유리 장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유리야 고대부터 있던 거니까 뭐 그렇게 놀라울 것도 없지 않겠소?"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을 하면서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왕기가 속으로 빠르게 뇌까렸다.

    '대명전에 유리로 된 창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유리는 고대 때부터 있던 재료이니까. 입으로 불어 유리로 된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중요한 이유는 제법 쓸만한 평편한 판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이미 확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회전하는 넓고 평편한 돌판 위에 녹인 유리를 뿌린 다음 펴서 만들었겠지. 지금 시대라면 그 정도 기술력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판유리에 특정한 색을 넣기 위해서는 각 색깔에 맞는 특정 원소로 만든 염료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

    왕기의 눈이 각양각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유리창 중에서 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대한 유리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다시피 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파란 늑대였다.

    '청낭(靑狼)이라. 이걸 잘만 연구하면 이 시대에서 불티나게 팔아먹을 상품을 만들 수도 있겠군. 이미 개발되어 있는 기술들이니 특별한 반발력도 발생하지 않을 테고 말이야.'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다 땅에 떨어져 있던 금덩이를 주운 사람처럼 기분이 업이 된 왕기가 신이 나서 발걸음을 다시 옳기려고 할 때였다. 왕기가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옆에 있던 척무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군 저하. 저하께서는 고려를 대표하는 왕족의 신분이시라는 것을 것을 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저하의 말 한마디 행동 한 마디에 고려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의 삶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부디 명심하시옵소서.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대칸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 후환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 우뚝.

    척무관의 경고에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은 왕기가 빠르게 정기신을 일깨우며 명경지수의 마음가짐을 되찼았다. 그리고는 척무관을 보며 대꾸했다.

    "걱정 말게. 내가 어딜 가더라도 손해 보는 성격이 아니니까. 이곳에서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울 생각도 없고 말이야. 내가 보기보다 많이 성숙한 편이라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왕기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저 멀리 보이는 안쪽에는 몽골족답게 동물의 가죽들을 잔뜩 씌워놓은 돌로 만든 거대한 의자가 보였고, 그 의자 위에는 26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배가 잔뜩 나온 대칸이 앉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기황후가 서있었다. 황제와 기황후가 올라가 있는 높고 널찍한 단상 아래로 수많은 관료들이 시립해 있었는데 절반은 몽골족이 아닌 다양한 종족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 모습을 본 왕기가 뇌까렸다.

    '끊임없이 대초원을 떠돌아다니던 유목민에 불과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아직까지 망하고 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유목 민족인 몽골족은 농경민족인 한(漢)족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그렇게 염원하신 것처럼 문화강국의 힘은 막강하다. 몽골족이 자신들보다 문화적으로 뛰어난 한족에게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역의 문화를 아낌없이 포용하고 개방한 것이야. 일종의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 있을 테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어. 색목인 등 다른 종족들을 우대해서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몽골족이 한족에게 흡수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반사 작용으로 한족의 박해가 너무 심해졌다. 그로 인해 홍건적의 난을 기회로 한족이 일제히 봉기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한 셈이지. 고려 역시 마찬가지이다. 머리수로는 한족을 절대 이길 수가 없어. 중요한 것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드높은 문화강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야.'

    - 우뚝.

    장차 자신이 다스리게 될 고려를 어떻게 운영할지 잠시 고민하느라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던 왕기의 발걸음이 다시 멈춰졌다. 매끈한 돌바닥에 새겨져 있는 큼지막한 지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대륙이 포함되어 있는 지도에는 한줄기 선이 선명하게 파여져 있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를 시발점으로 해서 둔황을 거쳐 현대의 한국에서 황사의 발원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고,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사막을 관통한 선은 테헤란과 바그다드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을 통과한 다음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본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 지도에 비단길을 표시한 것이로군. 서역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이런 지도가 필수적이겠지. 이 시대가 확실히 과거는 과거야. 지도에 아메리카 대륙도 없고 오세아니아 대륙도 없는걸 보니...'

    지도를 쭉 살펴보던 왕기의 눈이 사람이 살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 쪽에 멈춰졌다. 특이하게도 그 부위만 돌바닥을 파냈는지 아래쪽으로 움푹 파인 사막 지역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위에는 쇠로 만든 얇은 두께의 화살 같은 것이 둥실 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보다 전기와 자기에 민감한 왕기는 한눈에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조잡하기는 하지만 저건 분명 나침반이다. 뭐 이상할 것도 없지. 중국의 3대 발명품이라고 하면 한(漢) 나라 때 등장한 종이 그리고 송(宋) 나라 때 등장한 화약(火藥)과 나침반(羅針盤)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검증된 사실이니까.'

    지도에서 시선을 거둔 왕기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굶어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이곳에 오니 돈이 될만한 물건들의 아이디어가 잔뜩 떠오르는군. 기존의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제작 가능하고 말이야.'

    길을 가다 연속으로 금덩이를 주은 사람처럼 다시 기분이 한껏 업이 된 왕기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가 황제와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지자 옆에서 걷고 있던 앙리가 왕기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왕기와 척무관이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이자 앙리도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대칸의 명을 받아 강호에서 고려검왕이라고 불리는 강릉부원대군과 그의 호위이자 강호의 십대고수인 해동제일검을 데려왔습니다."

    "알았으니 물러가거라."

    앙리가 물러가자 황제가 왕기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려검왕과 해동제일검은 고개를 들라."

    허리를 편 왕기와 눈이 마주친 대칸이 입을 열었다.

    "고려검왕 그대가 기황후와 황자를 노리던 자객을 막아준 걸을 치하하노라.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느냐? 그런 것이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을 하거라."

    앙리에 이어 대칸마저도 입만 열면 자신을 고려검왕이라고 부르자 눈치가 빠른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실에서 무공이 뛰어난 날 필요로 하는 일이 있는 모양이로군. 여기서 욕심을 부리다가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일단 정확한 정보부터 파악해야만 해. 그래야만 거기에 걸맞은 부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모든 거래는 등가교환(等價交換)이 기본이라고.'

    대칸이 자신을 고려검왕이라고 부르자 왕기 본인도 스스로를 검왕이라 칭하며 대꾸했다.

    "본 검왕이 바라는 것은 이미 황후마마께 다 말씀을 드렸사옵니다."

    "나도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다음 고려의 왕으로 고려검왕을 밀어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영약이 필요하다고 하였고."

    "영약은 이미 받았으니 나머지 하나만 지켜주시면 더 이상 부탁드릴 게 없사옵니다."

    "알겠노라.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충목왕(忠穆王)의 근황을 전해 들었다. 몇 달째 기침이 멈추지를 않고 있다고 하더군. 오래 살지 못할 것이야. 황후가 한 약속대로 충목왕 다음으로 그대를 밀어주도록 하지."

    "감사하옵니다. 대칸."

    "고려검왕인 그대와 해동제일검을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은 본 대칸이 부탁을 할 것이 있어서다."

    이제야 본론이 나온다는 것을 눈치챈 왕기가 허리를 다시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천하를 다스리고 계시는 대칸께서 제게 하실 부탁이 무엇이옵니까?"

    "승상인 바얀이 이틀 전에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하였어. 그대가 비무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확인하고서는 필사의 탈주를 감행한 것이지. 아마도 황궁으로 들어오라는 내 명령을 어기고 항주에 계속 머물고 있던 팔비신장과 합류할 계획일 것이야."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옵니까? 원나라 군사들을 풀어서 승상을 잡아오면 되는 것이잖습니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원나라가 가장 자랑하는 것은 참치이다."

    "네?"

    갑자기 이게 무슨 귀신이 참치 통조림 까먹는 소리냐는 표정에 대칸 옆에 있던 기황후가 설명을 해주었다.

    "참치(站赤)란 것은 고려의 역전(驛田)을 말하는 것이에요. 참치(站赤)란 몽골어로 노(路)를 관장하는 자, 즉 길을 관리하고 있는 자를 뜻하지요."

    그러자 대칸이 말을 받았다.

    "참치는 원나라가 자랑하는 제도이며 뛰어난 말들이 각 참마다 배치되어 있지. 지니고 있는 패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의 종류와 마리수도 정해져 있고. 문제는 바얀이 지니고 있는 패가 최상급의 패라는 것이다. 직책이 승상이니 그럴 만도 하지. 가장 뛰어난 말들을 숫자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말인즉슨... 기마병들을 풀어도 도망간 바얀을 따라잡기가 힘들다는 거로군요."

    "정확해.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한 일이지. 전장에서 뼈가 굵은 바얀의 기마술은 뛰어난 편이며 시간까지 이미 제법 지났으니까. 도망치고 있는 바얀을 잡으라고 봉화를 피울 수도 없다. 봉화로는 그런 자세한 내용을 전달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설사 내 명령이 미리 전달이 된다고 해도 지방의 관리들로서는 승상을 막기가 힘들 것이다. 승상이라는 드높은 직책이 그러하고 바얀이 지닌 무공 또한 예사롭지가 않으니까. 잘못하다가는 바얀을 마중 나온 팔비신장까지 상대해야 할 수도 있고."

    대칸의 말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왕기가 물었다.

    "혹시... 바얀이 가족을 버리고 단신(單身)으로 도망간 것입니까? 대칸께서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맞네. 바얀이 처자식들을 다 버리고 몸만 쏙 빠져나갔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단순하게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원군을 구해 다시 대도로 돌아와 대칸을 칠 마음을 먹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팔비신장이 있는 항주는 멸망한 남송(南宋)의 근거지이며 강남에 있는 수많은 한족들의 본거지이니까요. 대칸을 칠 반군 병력을 얼마든지 꾸릴 수가 있는 여건이지요. 대칸께서 바얀의 가족을 잡아죽이시면 그 원한을 불쏘시개 삼아 죽기를 각오하고 대칸을 칠 것입니다. 처자식을 죽인 복수라. 명분으로 내세우기에도 딱 좋을 테니까요."

    "고려검왕의 머리가 영민하다는 소문이 사실이로군. 난 이 나라가 화북(華北)과 강남(江南)으로 나누어져서 내전(內戰)을 치르게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야. 팔비신장의 무공이 화경에 달했다고 해도 무섭지 않다. 무인 혼자만의 힘으로는 제국을 상대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바얀이 합류하면 문제가 심각해져. 바얀은 대초원에 퍼져 있는 여러 몽골 부족과 인맥이 닿아있고, 몽골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쁘지 않은 자이며, 병법과 전쟁에 아주 능숙한 자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고려검왕 그대를 부른 것이야. 무공이 예사롭지 않은 바얀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참치를 이용해 가장 뛰어난 말을 타고 도망간 바얀을 따라잡을 정도로 경공술이 뛰어난 자를 찾다가 그대를 떠올리게 되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요 며칠 여러 신하들이 비무대에서 보여준 그대의 뛰어난 무공 특히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경공술에 다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탄했다면서 입을 모아 칭찬을 했으니까 말이야."

    자신이 저지른 일로 역사가 본격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한 왕기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칸을 위해 본 검왕이 밤을 새우며 날아가 바얀을 잡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팔비신장이 바얀을 마중 나와 있을 경우 본 검왕도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요."

    "이미 황후에게 부탁한 조건들을 내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대칸.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고려의 왕족인 본 검왕에게 위험한 새로운 임무를 맡기시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가 주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어떤 조건인가? 내가 들어보고 답을 주도록 하지."

    대칸의 대답에 왕기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카로워졌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 법이지. 이번과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야. 절대 놓칠 수 없다.'

    "본 검왕이 바라는 조건은 대칸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충분히 들어주실 수 있는 조건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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