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37화 (37/171)
  • #37. < 원나라 황제와의 면담 - 2 >

    [원나라 황제의 집무실인 대명전 앞]

    - 시끌벅적. 왁자지껄.

    황제 직속의 근위대가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대명전 앞은 여러 갈래로 길게 줄을 서있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고, 그들 중에서는 색목인과 아랍인에 곤륜노까지 심심치 않게 보여서 각종 인종들의 전시장처럼 보일 정도였다.

    TV 사극에서 주로 보던 조선 왕궁 경내의 조용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던 왕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군. 경비도 삼엄하고 말이야."

    그러자 동행한 척무관이 설명을 해주었다.

    "소관이 보기에도 경비가 보통 때보다 훨씬 더 삼엄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황실에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많았죠."

    "사람들이 언제나 이렇게 많다고"

    "그렇습니다. 저하. 원나라는 서역과의 교역이 아주 활발하며 이를 황실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몽골인 다음으로 색목인과 아랍인 그리고 위구르족과 탕구트족을 2등급으로 지정했고 그들 중 뛰어난 인재들에게 각종 관직을 제수하고 있으며, 그들이 믿는 이슬람이나 천주교 같은 외래 종교들의 자유로운 신앙생활과 포교 활동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한나라 때 장건이 개척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로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비단길(Silk Road)을 말하는 모양이로군.'

    "당연히 들어보았지."

    "그 길을 통해 서역의 수많은 상단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원나라로 물밀듯이 들어와 그들이 싣고 온 물건들을 팔고 돌아갈 때에는 원나라의 특산물을 싣고 떠납니다. 원나라의 중심은 대도(大都)이고 타국 상단이 이곳에서 장사를 하려면 황실의 허락을 먼저 얻어야만 하지요. 미리 어떠한 상품을 얼마나 팔지 수익은 어느 정도를 예상하며 그에 따른 세금을 얼마나 낼 건지 등을 심사 받아야만 장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많은 것이지요."

    '하긴 베네치아 출신의 마르코 폴로가 교황의 답장을 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해 이란을 거쳐 실크로드를 통해서 원나라로 왔다가 황제의 눈에 띄어 관직에 올라 원나라에서 17년을 살았었다고 하지. 그가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간 게 지금으로부터 불과 40여 년 전이야.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출판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으로 인해 동양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를 부흥시키고 한민족을 세계에 우뚝 세우려면 강력한 군사력도 필요하지만 경제적인 부흥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려면 서역과의 교역은 필수야. 문제는 원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실크로드를 통하지 않으면 교역이 힘들다는 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해상 교역로가 확보되지 않은 시대이니까. 제대로 된 해상 교역로는 16세기나 돼야 확립된다. 그렇다고 원나라에 세금을 바쳐가며 비단길을 이용해 서역과 교역을 하는 것은 곤란해. 이른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결국 원나라를 잡아먹어서 비단길을 고려가 장악하든가 아니면 해상 교역로를 고려에서 자체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인데... 둘 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로군.'

    잠시 머리를 굴리던 왕기의 머릿속으로 얼마 전 봉인이 풀렸던 자신을 과거로 소환한 누군가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가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제가 과거로 넘어가서 우리 한(韓)민족을 부흥시켜야 한다고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전 특별한 능력이 없는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공돌이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된 거라네. 내 말을 잘 듣게.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네. 그 민족들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가 다 다르지. 민족의 수만큼 많은 신이 존재하다는 뜻이야. 민족들은 저마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치게 되어 있어. 신들은 거기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아. 모든 신들이 자신의 민족을 위해 나서기 시작하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테니까 정해진 규약이지. 하지만 한 번씩 특정 민족에게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어. 그 민족이 인류 공영에 크게 이바지했다거나 인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경우에 주어지는 기회이지. 한민족은 얼마 전 코로나 사태 때 전 세계의 모범이 되어서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앞장섰지. 원래대로 라면 인류의 절반이 죽어나가야 했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그 특별한 기회라는 것이 저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까? 하필 왜 접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나? 평범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과거로 넘어가는 자는 평범한 자들 중에서 랜덤으로 선정된다네. 가는 시기도 철저하게 랜덤으로 정해지고.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를 선택하는 것과 특정한 시기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신들이 용납하지 않아. 선택된 자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말이야."

    "그럼 전 과거로 가서 뭘 해야 하는 것입니까?"

    "자네가 가진 능력을 발휘해서 자네가 원하는 방향대로 한민족을 부흥시키면 되는 것이야. 간단하지? 나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신도 간섭하지 않는다네. 알렉산더가 대제국을 세울 때에도,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할 때에도 신들은 개입하지 않았어. 단 명심할 것이 있네."

    "명심해야 할 것이 뭡니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기술력과 그런 기술력으로 제작된 물건 등은 자연스럽게 반발을 부르게 되어 있다네. 물리 법칙의 작용과 반작용처럼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지. 가령 이제 겨우 청동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갑자기 총을 만든다던가, 이제 겨우 총을 사용하는 시기로 갔는데 갑자기 핵폭탄을 만드는 일들은 반작용이 극심하게 일어난다는 뜻이라네. 그 정도의 반발력이면 자네가 즉사할 것이야."

    "그 말인즉슨... 반발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도 이미 존재하는 기술들과 물건들을 약간씩 개선하는 정도만으로 한민족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정확하네. 제약이 심해서 절대 쉽지는 않은 일일 것이야. 하지만 자네가 노력해서 발전시킨 만큼 이 나라와 이 민족들이 대대손손 그 영광을 누릴 테니 부디 잘 부탁하네. 그리고... 자네가 넘어갈 시대가 막 결정되었네. 그 시대 상황에 맞춰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네. 이건 다른 신들도 허용한 것이니 안심하게나."

    "어떤 선물입니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닐세. 자네가 넘어가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준비한 선물에 불과하니까."

    그 순간 왕기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띠리링. 각종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이 크게 상승하여 병사(病死)할 위험이 대폭 감소하였습니다. 독에 대한 내성이 크게 증가하여 독살(毒殺)의 위험성이 대폭 감소하였습니다.]

    "특별한 능력이라기보다는 힘들게 얻은 기회이니 허무하게 일찍 뒈지지 말고 끝까지 아등바등 살아남아서 잘 해보라는 뜻이로군요?"

    시니컬한 어조의 왕기의 말에 본인이 단군(檀君)을 지상으로 내려보낸 천제(天帝) 환인(桓因)이라고 소개한 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바로 그거네. 오천 년에 달하는 한민족 역사에서 처음으로 잡은 소중한 기회이니 헛되게 날려서는 절대 안 될 것이야. 부디 잘 부탁하네. 자네가 잘 해나가면 또 다른 선물을 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회상을 멈춘 왕기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뇌까렸다.

    '빌어먹을... 물건을 팔 교역로를 개척하는 것도 힘들지만 뭘 만들어서 팔아야 고려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을지도 고민이로군.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만들었다가는 당연히 반발력이 생길 거란 말이지.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제작이 가능한 물건들을 만들어서 팔아야 할 건데 말이야. 몇 가지를 구상 중이긴 한데...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고민하도록 하자고.'

    왕기가 척무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이 다 황제를 알현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하. 원나라는 송나라의 체계를 그대로 가져와서 쓰고 있습니다.

    내각에 해당되는 최고 행정관청인 중서성(中書省), 군사(軍事)를 다루는 추밀원(樞密院), 감찰기구인 어사대(御史臺)는 모두 송대(宋代)의 형태를 답습한 것이지요. 상인들의 대부분은 본인이 거래할 물품의 종류와 그 양에 따라서 중서성 관리들과 면담을 할 것입니다. 규모가 큰 대형 상단이나 특별한 임무를 띤 자들만이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황제가 직접 저하를 보자고 하였으니 아마도 저하를 안내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척무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누군가가 어눌한 몽골어 발음으로 왕기를 불렀다.

    "꼬레아검왕. 꼬레아검왕."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왕기의 눈에 금발에 푸른 눈을 한 건장하면서도 잘 생긴 색목인이 보였다.

    "본인이 고려검왕이라오. 한데 본인을 찾는 그대는 누구시오?"

    "대칸의 명을 받고 꼬레아검왕을 마중 나온 '앙리'라고 하옵니다. 강릉부원대군 저하께서는 아직 원나라 황실의 법도에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서 소인을 특별히 보낸 것이지요. 두 분 다 절 따라오십시오."

    척무관과 함께 자신을 마중 나왔다는 앙리라는 자를 따라가며 왕기가 물었다.

    "색목인 같아 보이는데 어디서 왔소?"

    "저하께서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인은 저 멀리 서역에 있는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프랑스라. 본 군이 알다마다. 프랑스와 원나라가 관계를 맺고 있소이까?"

    "그럼요. 원나라와 교역 관계를 맺은 게 백 년 가까이 되어가지요. 루이 9세의 명을 받은 '기욤 드 루브룩(Guillaume de Rubruck)'이라는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원나라의 4대째 황제인 헌종을 만나서 협약을 맺었으니까요. 지금은 필리프 6세( Philip VI)가 프랑스를 다스리고 있지요."

    "그대는 지금 원나라의 관리를 하고 있소이까?"

    "그렇습니다. 통역도 할 겸 해서 중서성 아래의 호부(戶部)에서 일을 하고 있지요. 소인의 본디 직업은 상인이옵니다. 프랑스의 특산물을 싣고 와서 황실에 전량 납품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당분간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기에 원나라에서 관리직을 맡았습니다."

    앙리의 말에 왕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사의 주요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뇌까렸다.

    '그렇군. 지금쯤이면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百年戰爭)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이니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지. 돌아갔다가는 전쟁터로 끌려 나갈지도 모르니까.'

    길게 줄을 서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대명전 입구까지 간 왕리가 품 안에서 하나의 신패를 꺼내어서 보여주자 근위병들이 문을 열어 입장을 시켜주었다.

    - 쿵.

    대명전 입구가 굳게 닫히자 앙리가 입을 열었다.

    "강릉부원대군 저하께서 황제를 만나실 때 주의하실 점 몇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무기가 될만한 것은 요 앞에 있는 근위병들에게 모두 맡기셔야만 합니다. 품속에 흉기를 숨기고 들어갔다가 발각 시에는 목이 달아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둘째, 칸을 부르실 때에는 칸 중의 칸이라는 뜻의 대칸이라고 부르시고 칸의 질문에 거짓을 고하여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나중에 거짓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그 또한 목이 달아날 것입니다. 셋째, 칸을 만날 때의 예의는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족하나 칸이 묻기 전에 먼저 말을 걸어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는 칸을 독살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 졸졸졸.

    앙리를 따라가자 벽에 붙어있는 돌로 된 늑대 조각의 입에서 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벽에는 회색빛의 사각형 물체들이 노끈에 매달려 있었다.

    "손에 물을 묻힌 다음 매달려 있는 것들로 손을 문대시면 거품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걸로 손을 깨끗이 씻으시지요."

    마치 현대의 세면대처럼 보이는 곳으로 안내를 받은 왕기가 벽에 매달려 있는 물체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법 단단한 고형체에 음각으로 'Marseille'라고 파여 있는 것을 발견한 왕기가 중얼거렸다.

    "이건 비누로군. 그것도 프랑스의 마르세유 지방에서 만든 비누. 비누가 프랑스어로 사본(Savon)이던가?"

    그러자 앙리가 왕기의 식견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맞습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싣고 와 황실에 전량 납품한 것이지요. 저하께서 마르세유 비누를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모를 리가 있겠나?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인 마르세유는 비누의 원료가 되는 올리브유와 해초가 풍부해 예로부터 비누가 유명했었지."

    - 쓱. 쓱. 싹...

    비누로 능숙하게 거품을 내어 손을 씻고 있던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젠장... 이렇게 내가 구상했던 상품 중에 하나가 덧없이 날아가는군. 한민족에게 양잿물이 있듯이 몽골족에게도 이미 비누가 있다. 양의 지방과 나무를 태워 만든 재를 섞어서 만든 비누가. 하지만 그런 동물의 지방과 목회(木灰)를 원료로 만든 비누는 부드러워서 취급하기가 어렵고 재료가 동물 지방이라 고약한 냄새가 난다. 그래서 만들어 팔아도 반발력이 적을 비누로 한밑천 잡아볼까 했더니 이미 프랑스의 마르셀 비누가 들어와 있을 줄이야.'

    현대에서도 유명한 마르셀 비누의 원조 격인 올리브유와 해초를 이용하여 제작한 고형 비누로 손을 씻은 왕기가 쓰린 속을 달래며 황제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근위병들에게 쌍검을 풀어 맡겼다.

    - 끼이익.

    검을 맡은 근위병들이 문을 열어주자 보이는 광경에 왕기가 눈을 부릅뜨며 뇌까렸다.

    '빌어먹을... 이 시대의 기술력도 만만치가 않아. 그리고 서역과의 무역도 활발해서 다양한 제품들이 이미 원나라에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내가 구상했던 상품들이 잘 팔릴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어. 그렇다고 지나치게 뛰어난 물건을 만들었다가는 반발력이 극심하게 발생할 테고 말이야. 후우... 예나 지금이나 돈 버는 게 쉽지는 않군.'

    왕기가 벌어진 문틈으로 오색찬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원나라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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