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 원나라 황제와의 면담 - 1(소제목 변경) >
[흥성궁의 한 방]
"싫습니다."
단호한 왕기의 대답에 비무가 다 끝나고 왕기의 방까지 쫓아온 소림의 자심대사가 다급히 물었다.
"고려검왕 대협. 왜 싫다는 것입니까? 대협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반야심공은 소림의 것이니 소림에게 돌려주겠다고 말입니다."
"대사님의 귀는 듣고 싶은 것만 들으시나 봅니다. 제가 한 다른 말도 있지 않습니까? 조건이 맞으면 돌려주겠다고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이고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뜻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대로 된 조건이 있으면 반야심공이 소림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고, 제대로 된 조건이 없으면 반야심공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려 뱐야심공의 원리를 이 자리에서 대사님께 알려드려도 익히시지 못하실 겁니다."
"소승이 익히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짓는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대사께서는 이미 늙었기 때문이지요. 늙으면 머리가 굳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반야심공의 원리는 지극한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기에 대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비급에 주해 몇 줄 달아드린다고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하였지요. 지극한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혜능께서 반야심공의 비급을 만드실 때 자세하게 설명을 해두셨을 겁니다."
"그럼 어떤 조건을 들어줘야 소림에게 넘겨줄 것입니까?"
"일단 비급 맨 뒤에 나온 것처럼 소림의 22대 방장인 지정(智淨)이 약속한 대환단 3알은 당연히 받아야만 하겠지요. 그리고 본 검왕은 대사처럼 속세를 떠난 스님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바세계의 평범한 중생이기에 적당한 재물도 필요합니다."
"대환단과 적지 않은 재물이라. 못 들어 드릴 조건은 아니구려. 소림의 살림이 그렇게 가난한 편이 아니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본 검왕이 조만간 무림의 감찰 업무를 맡아서 강호에 출두할 계획이오니 그때 소림에 들려 두 명의 소림 제자에게 전수를 해드리겠습니다. 단 그 제자들은 나이가 젊고 머리가 영특하여야 하며 무공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야 할 것이고 반드시 고려인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고려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오?"
"본 검왕이 고려인이기 때문이지요. 고려인이 익힌 무공이니 같은 고려인이 이해하기가 쉬울 테니까요. 제게서 전수받은 그들이 소림의 언어로 다시 풀이를 해서 소림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흠...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다."
자심대사가 순순히 물러가자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끝까지 끈질기게 들러붙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예상보다 쉽게 물러가는군. 이게 다 명성의 힘이고 무공이 강한 자의 위력이겠지. 내가 무공이 약했다면 이렇게 쉽게 물러가지 않았을 거야.'
그때 옆에 있던 척무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하께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만?"
"날 위해 쓸 것이 아니야. 고려를 잘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소림은 대대로 하남성을 지배해온 왕가(王家)나 다름없다. 무공을 내놓는 대가로 원나라 황실에게도 뜯기지 않았으니 보관하고 있는 재물의 양이 장난이 아닐 것이야. 제대로 뜯어내면 고려인들의 삶을 풍요하게 해줄 것이다."
"그럼 반야심공을 정말 소림에게 돌려주실 생각인 것입니까?"
"아까워서 그러는 것이냐?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본 군이 알려준다고 해서 아무나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니까. 내가 자세히 풀어서 알려줘도 백 년에 한 명도 익히기가 힘들 것이야. 반야심공은 소림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毒)으로 작용할 것이다. 소림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들이 반야심공에 매달리느라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반야심공은 혜능 정도의 타고난 천재가 아니면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다. 세월이 600년 정도 흐른 후라면 또 몰라도. 차라리 뇌전벽력수가 익히기가 훨씬 수월할 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을 이용하는 무공이니까. 하지만 반야심공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깨달아야만 하니 익히기가 더욱 어렵지. 알려줘도 내게 손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소림의 힘을 빼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근데... 바깥이 많이 시끄럽구나."
"저하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습니다. 어떡할까요?"
"다 돌려보내거라. 며칠간 방안에 칩거하면서 이번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들을 정리할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온 선물은 어떡할까요? 값비싼 술과 고기가 잔뜩 도착해 있습니다만..."
"비무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술과 고기가 도착해 있다고? 누가 보낸 것이더냐?"
"춘향각 각주가 보낸 것이옵니다. 무림인들이 춘향각의 모든 방을 차지하고 한 달씩 장기 계약을 하는 바람에 춘향각주가 고맙다고 보내온 것이지요. 약속대로 도왕의 목을 춘향각 처마 아래에 매달아 주면 적지 않은 보상을 하겠다는 말도 같이 보내왔습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왕기가 중얼거렸다.
"다들 자기 목이 걸린 일이 아니라고 좋아들 하는구나. 도왕과 붙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사가 걸린 일전인데 말이야. 술과 고기는 고려 병사들에게 나눠주도록 하고 도왕을 이기면 약속대로 춘향각 처마에 매달아 주겠다고 전달해. 그리고 팽가의 무공 비급들을 구해서 내방에 들여보내도록 하거라. 가까운 시일 내에 도왕과 한판 붙으려면 연구를 좀 해봐야 하니까. 근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이옵니까? 저하."
"무림인들의 내공이 생각보다 깊어. 사수삼비는 나와 비슷했고, 매화신검은 분명히 나보다 내공이 윗줄이었어. 아마도 그래서 자신 있게 덤볐었겠지. 내공을 올리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하께서 말씀하신 자들은 기본적으로 40~5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공을 익힌 자들이며 자신이 속해 있는 문파에서 최상위 계급들입니다. 삼수사비는 팔비신장의 제자이고 매화신검은 화산파의 차기 장문인이 될 거라고 생각되던 자이지요. 그런 자들은 당연히 문파에서 보관하고 있는 영약을 복용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지 그들을 평균이라고 보시면 곤란합니다."
"내가 내공을 익힌 기간이 워낙 짧아서 그런 것이로군. 그럼 무림에서 최고의 내공을 지녔다는 자는 어느 정도 되는 건가? 도왕이나 팔비신장 같은 자들 말이야."
"인간이 단전에 담을 수 있는 내공은 보통 4갑자를 한계로 보고 있습니다. 화경에 든 자들 중에서 장수하는 자들이 그 정도를 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그 이상은 영약을 복용하여도 어렵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4갑자라.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내공의 두 배로군. 도왕과의 승부가 쉽지 않겠어."
"당연하지요. 도왕은 화경에 오른 지 십 년이 넘은 자입니다. 그런 자를 쉽게 이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왜 그런 무모한 약속을 하셨습니까?"
"설사 지더라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야.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은 내공도 아니고 검법도 아니다. 신법이지. 내가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으면 도왕도 감히 날 잡지를 못할 것이야. 그래서 자신 있게 내뱉은 것이지."
시어머니처럼 또다시 잔소리를 하려는 척무관을 방 밖으로 내보낸 왕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제 비무도 성공적으로 끝나 본격적인 강호행도 얼마 안 남았고, 내가 과거로 끌려온 이유도 알게 되었으니 미래를 위해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야만 한다. 하지만 그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무공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야.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왕기의 머릿속으로 운룡대팔식을 사용하던 피풍검객의 모습과 지풍과 장풍을 사용하는 삼수사비 그리고 검벽을 보여준 매화신검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렇게 왕기가 자신만의 깨달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하북 팽가의 가주전에서는 간부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가주전]
황궁에서 서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경산(石景山). 높이가 높지는 않지만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석경산 아래에 하북성의 맹주(盟主)이자 오대세가(五大世家) 중의 하나인 하북 팽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팽가의 가주전에서 팽가의 핵심 인물들이 무거운 안색으로 앉아 있는 가운데 외당주인 팽경호(彭慶豪)가 입을 뗐다.
"금일 황궁에서 벌어진 비무대회에서 가주의 둘째 아들인 청호일진이 선풍향검에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청호일진의 목을 날린 선풍향검이 비무대에서 한 달 이내에 팽가로 와서 도왕의 목을 자르겠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지를 의논하고자 합니다."
당대의 가주이자 환갑이 훌쩍 넘은 맹호도군(猛虎刀君) 팽철중(彭哲重)이 인상을 찌푸리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팽가의 핵심 인물들인 소가주, 내당주, 외당주, 집법원주, 맹호대주 등을 보며 가주가 입을 열었다.
"다들 외당주가 보고한 내용을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대응을 할지 말해보거라."
다들 침묵을 지키자 팽가의 특징인 거구(巨軀)의 신체를 타고나 일신의 무공은 아주 뛰어나지만, 팽가의 전통인 석두(石頭)인 것으로도 유명한 팽철중이 40대 초반인 하북지도(河北智刀) 팽영호(彭永豪) 소가주를 지목하며 물었다.
"어차피 난 올해를 끝으로 가주 자리를 물러난다. 그러니 영호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하겠지. 소가주인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팽가의 지낭(智囊)이라고도 불리는 소가주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소자가 보기에는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의논까지 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동생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시비를 걸 명분이 없으니까요. 비무 대회에 나가라고 누가 강요를 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넘어가야 하고 잊어버려야지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재주가 팽가에게는 없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조부이신 도왕의 뜻일 것입니다. 조부께서 복수를 원하시는지 아니면 좋게 넘어가시려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조부께서 복수를 원하시면 선풍향검이 황궁을 나설 때 저희들이 그 사실을 조부께 알려드리면 그만이니까요. 지금 의논해야 할 것은... 만약 조부께서 지시면 어떡할 것인가를 의논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선풍향검이 검강을 구사했다고 하더군요. 믿기지는 않지만 그 어린 나이에 화경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영약을 먹고 반야심공을 익힌 덕분이겠지요. 화경에 든 고수끼리의 격돌은 그 누구도 승패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 가주전의 천장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가주가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이 할아비가 그깟 고려놈에게 질 것 같으냐?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 겨우 16살짜리인 놈에게 질만큼 내가 이룬 경지가 낮지를 않으니까 말이다. 화경이라고 다 같은 화경이 아니다. 너희들은 그놈이 황궁을 나설 때 나에게 알려만 주면 된다. 그놈이 쳐들어올 때까지 한 달씩이나 기다릴 참을성이 내게는 없으니까. 그럼 내가 그놈의 목을 쳐서 팽가의 정문 앞에 매달아 주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조부님."
그렇게 도왕이 복수를 선언하였고 왕기가 황궁 밖으로 나오기만을 벼르고 있는 동안 빠르게 사흘이 지났다.
서기 1345년 10월 14일
[흥성궁의 한 방]
지난 사흘간 식음도 거르며 깨달음을 정리한 왕기가 팽가의 성명절기인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와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 그리고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 비급을 펼쳐놓고 연구에 빠져 있을 때였다.
- 드르륵.
그 누구도 방해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지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들이밀은 척무관이 보고했다.
"저하. 대명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대명전이라면... 황제가 집무를 보는 곳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원나라 황제인 혜종(惠宗)이 저하를 보고 싶다고 하는군요."
"기황후에께 밑밥을 던진 것이 이제야 입질이 오는 모양이로군. 알겠다. 준비를 해서 나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