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35화 (35/171)
  • #35. < 왕기, 오인참수(五人斬首)에 도전하다 - 4 >

    쌍검을 들고 달려드는 왕기를 보며 삼수사비가 어지럽게 손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삼수사비라는 별호에 걸맞게 손가락은 분명 열 개에 불과한데 단숨에 사십여 개를 훌쩍 넘어가는 지풍과 장풍들이 줄줄이 튀어나와 여러 각도에서 왕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전투기를 격추시키기 위해 사방에서 다연장로켓포를 발사한 것처럼 자신을 향해 매섭게 날아드는 지풍과 장풍들을 보며 분심으로 둘로 나누어진 왕기의 머리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분심의 영향도 있었지만 뇌가 두 번이나 각성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 반쪽짜리 화경이다. 검강을 만들 수 있지만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법을 아직 체득하지 못했고, 수비의 최고봉이라는 검벽도 구사할 수가 없다. 무공을 익힌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아직 체득하지 못한 무공 이론들이 다수 있기 때문이지. RPG 게임으로 치자면 공격력에 몰빵한 케릭이라고 볼 수 있을 테고, 스타크래프트로 보자면 초반 러시가 강력한 스타일이야. 무공의 의외성과 초반 폭딜로 승부를 봐야만 한다는 뜻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번의 접전에서 반드시 승부를 봐야만 해. 시간이 지날수록 싱대방이 유리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장점을 극대화해야만 해. 지금 이 순간 내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세 가지야. 첫째, 전기에 특화된 무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검기의 유지시간이 비정상적으로 길다는 것. 둘째, 쌍검을 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검기를 한 순간에 다른 사람보다 2배로 많이 방출할 수 있다는 것. 셋째, 날카롭게 벼려진 강철 검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강철 검을 얻기 위해 수십만 년을 고생했다. 구석기 시대의 타제석기(打製石器)에서부터 신석기의 마제석기(磨製石器)를 거쳐 청동기를 지나 겨우 지금과 같은 단단하면서도 날이 예리한 강철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그 순간 분심으로 나누어져 있는 또 하나의 왕기가 말했다.

    '계산이 끝났다. 삼수사비가 손을 흔들어 한 번에 쏟아낼 수 있는 게 최대 4번 인것 같아. 지풍 40개에 장풍 8개야. 장풍은 지풍보다 3배쯤 강한 것으로 보여.'

    - 쉬이웅.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리자 선풍이 발생하여 주변의 기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왕기가 물었다.

    '그럼 지풍을 상대하기 위한 40개의 매화와 장풍을 상대하기 위한 24개의 매화가 필요하겠어. 도합 64개만 발출하면 끝나는 거로군.'

    '그렇지. 내가 계산해놓은 궤적대로만 발사하면 되는 거야. 근데 검기가 지풍을 이길 수 있을까?'

    '당연하지. 검기는 날카롭게 벼려놓은 검날을 통해서 날아가기 때문에 뭉툭한 손가락이나 넙데데한 손바닥에서 튀어나오는 기보다 기의 밀집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예리함까지 갖추고 있지. 같은 내공으로 방출한 지풍과 검기가 맞부딪치면 무조건 검기가 이겨. 안 그러면 힘들게 검을 들고 검법을 익히는 의미가 없지 않겠어? 적수공권의 십대고수가 적은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지. 같은 실력이라면 무기를 든 자가 무조건 유리하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고.'

    - 슈수슝...

    분심으로 둘로 나뉜 왕기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삼수사비가 날린 지풍들이 가까워졌는지 모골이 송연한 파공음이 귀청을 때렸다. 그러자 또 하나의 왕기가 알려준 궤적들에 맞추어 왕기가 쌍검을 미친 듯이 흔들어대며 뇌까렸다.

    '쌍검으로 64개면 검 하나당 32개만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야. 지금의 나에게 그 정도는 우습지.'

    그러자 왕기의 쌍검에서 선명한 매화가 줄줄이 튀어나와 삼수사비가 방출한 지풍과 장풍들을 요격하기 위해 정확한 궤적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다들 보여? 화산파의 매화검법이다.

    - 이렇게 선명한 매화라니. 게다가 매화의 개수를 좀 보라고.

    - 고수를 만나더니 고려검왕이 마침내 자신의 성명절기를 꺼내들었어.

    사방을 둘러싼 구경꾼들의 놀란 외침과 함께 비무대에서 특이한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 찍. 찌직. 찌지직.

    날카로운 검기로 이루어진 매화가 삼수사비가 방출한 지풍과 장풍들을 마치 비단폭을 째고 나가듯 가볍게 갈라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 공중에서 일제히 터져나가자 강렬한 향기가 비무대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 이건 매화향이다.

    - 맞아. 틀림없는 매화향이야.

    - 검향지경에 들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흥분한 무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코를 킁킁거리며 외칠 때 비무 대기석에 앉아있던 매화신검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리고 비무대 위에 있는 삼수사비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어 가더니 이를 악물고 또다시 손을 흔들어대기 시작하자 또 다른 왕기가 머릿속에서 외쳤다.

    '지풍 10개와 장풍 2개가 다야. 내공이 딸리나 봐.'

    '그렇겠지. 가진 내공은 나와 비슷하지만 소모한 내공을 보충하는 건 반야심공을 따라올 수가 없을 테니까.'

    지금도 끊임없이 주변의 기를 끌어당겨서 내공을 보충해 주고 있는 반야심공의 도움을 받은 왕기의 쌍검에서 또다시 50여 개에 가까운 매화가 튀어나와 삼수사비를 덮쳐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곧 죽게 된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삼수사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XXX. 내가 고려 오랑캐 따위에게 죽다니..."

    그 순간 지풍과 장풍을 요격하고도 남은 30여 개의 매화가 삼수사비의 전신을 덮쳤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 콰과광.

    매화 형상의 검기에 난도질을 당한 삼수사비의 몸뚱어리가 순식간에 수십 개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온몸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이 비무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단 일초만에 고수로 알려져 있는 삼수사비를 피떡으로 만들어버리자 구경꾼들이 열렬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 최고다. 고려검왕.

    - 검왕이라는 호가 안 아깝다.

    - 고려검왕. 고려검왕. 고려검왕...

    피 칠갑이 된 비무대에 우뚝 서있는 왕검이 그런 구경꾼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며 뇌까렸다.

    '가수들이 콘서트 장에서 느낀다는 무대뽕이라는 게 이런 기분이로군. 무림인들이 승리에 목을 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네. 이제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끝이다.'

    - 휘리릭.

    공중제비를 돌며 무대 위로 올라온 비천신개가 병사들에게 비무대를 정리할 것을 명령한 후 왕기에게 다가가 물었다.

    "고려검왕 대협. 무대가 정리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대기석에서 잠시 쉬고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기는 처음보다 한결 공손해진 비천신개의 자세와 어투에 속으로 뇌까렸다.

    '명성이 밥 먹여주는 곳이 강호라더니...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겠다. 이렇게 피부로 절감하고 있으니까. 마지막을 최대한 화려하게 펼쳐 보여서 쐐기를 박아야만 하겠어. 그렇게 되면 강호에서 고려검왕이라는 명성만으로도 어지간한 문제들은 해결할 수가 있을 테지. 일단은 대의명분부터 챙긴다.'

    왕기가 비천신개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며 물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아직은 한창때의 나이라 휴식은 필요 없습니다. 비천신개 대협. 마지막 비무를 하기 전에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고려검왕 대협."

    "마지막 비무 상대자이자 강호에서 십대고수로 손꼽히는 매화신검께서는 본 군이... 아니 강호 동도들이 과분하게 고려검왕이라는 호를 저에게 붙여주셨으니 본 검왕이라고 해야 하겠군요. 본 검왕이 검향지경에 들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워서 비무를 신청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비천신개 대협께서 저 대신 한번 여쭤봐 주시겠습니까? 아직도 의심스러운지 말입니다. 만약 매화신검께서 인정을 해주신다면 굳이 비무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같은 매화검법을 익힌 자로서 굳이 칼부림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쭉 보셨다시피 비무를 하게 되면 둘 중에 하나는 죽게 됩니다. 본 검왕은 오늘의 비무로 하북 팽가와 정림방과의 사이에 원한 관계가 생겼습니다. 거기에 화산파를 추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비천신개께서 중재를 한번 해주시지요."

    말이 중재지 목소리에 내공을 집어넣었는지 비무대를 쩌렁쩌렁 울리는 왕기의 말에 대기석에 앉아있던 매화신검이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나며 외쳤다.

    "인정하오! 선풍향검 대협이 검향지경에 들었다는 것을 본인도 인정하는 바외다. 하지만 그것과 비무는 무관한 것이오. 검향지경에 들었다고 해서 본인이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매화의 개수를 많이 방출하는 것이 매화검법의 진정한 오의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직접 보여드리리다."

    왕기가 매화신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시는 것입니까? 본 검왕이 매화검법을 익히신 것이 불만이십니까? 강호에 매화검법을 익힌 자들은 부지기수입니다. 매화검법이 뛰어남은 저뿐만 아니라 강호 동도들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게 아니면... 본 검왕이 고려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오랑캐라 무시하던 고려인이 매화신검께서 도달하지 못한 검향지경을 이룬 것이 고까우셔서 그런 것입니까?"

    정곡을 찔렸는지 매화신검이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것이 아니오. 같은 매화검법을 익힌 자로서 서로의 검법을 비교하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라오."

    "그 결과가 둘 중 한 사람의 죽음이라도 말입니까?"

    "그렇소. 본인의 능력이 모자라 죽는 것을 누가 원망하겠소이까? 그건 강호인의 숙명이라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매화검법끼리 맞붙으면 결판이 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본 검왕이 전력을 다해 숨겨놨던 비전의 한수를 구사해보겠습니다. 매화신검 대협을 위해 남겨둔 것이지요. 만약 매화신검께서 그 수를 막아내시면 본 검왕의 패배를 자인하고 검향지경의 비밀을 화산파에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단 막지 못하시면 매화신검이 죽어도 화산파에서 제게 원한을 가지지 않겠다는 것을 약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왕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왕기가 내건 조건에 혹했는지 매화신검이 즉답했다.

    "약조하리다. 고려검왕이 비무를 저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고집을 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설사 본인이 죽더라도 화산파에서는 그 어떤 복수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굳게 약조하리다."

    왕기가 고개를 돌려 비천신개를 바라보자 무슨 뜻인지 알아챈 비천신개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개방과 소림 그리고 무당의 이름으로 공증하리다. 차후에 고려검왕의 행사에 화산파가 원한을 가지고 방해를 한다든지 보복을 하는 경우에는 개방, 소림, 무당이 힘을 모아 화산파를 응징할 것을 강호동도 여러분들 앞에서 공증하오."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외쳤다.

    "그럼 강호 동도 여러분들 앞에서 자웅을 한번 겨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매화신검이 그 어떤 비무자들보다 뛰어난 신법을 구사해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행여나 비무가 취소될까 봐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 절정의 암향부동(暗香浮動) 신법이다. 역시 십대고수야.

    - 누가 이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싸워보라고. 이긴 자만이 정의롭다.

    - 매화신검. 오랑캐 따위에게 지지 말라고. 십대고수의 위력을 보여주란 말이다.

    - 한 수에 끝내지 말고 한 명이 죽을 때까지 해봐.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구경꾼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무시한 채 왕기가 매화신검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약속대로 본 검왕이 비전의 한 수를 시전할 것입니다. 본 검왕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이지요. 어디 한번 막아보시지요. 막으시면 매화신검의 승리이니까요."

    매화신검의 표정이 비장해지더니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최선을 다해서 고려검왕의 공격을 막아보겠소.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이런 경지에 오른 그대를 존경하외다. 설사 본인이 죽더라도 화산파에서는 감히 그대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니 걱정 마시오. 당대의 화산파 최고의 고수가 바로 나이니까 말이외다. 나조차도 한 수를 감당 못하는 고수를 누가 감히 건드리겠소?"

    왕기가 매화신검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며 뇌까렸다.

    '오늘 본 것처럼 강자만이 정의롭고 강자의 말이 진리인 곳이 바로 강호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최대한 화려하게 그러면서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겨야만 해.'

    이를 악문 왕기가 쌍검을 치켜들며 전력을 다해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새 원상태로 회복된 내공이 왕기의 쌍검 위에 새파란 검기를 빠르게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쌓아올려진 왕기의 검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 파아악.

    그러자 왕기처럼 전력을 끌어올렸는지 화산파 자하신공(紫霞神功) 특유의 보랏빛 노을을 몸 주위에 휘감고 있던 매화신검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비명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검... 검강(劒罡)이로구나."

    - 차르릉.

    매화신검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자 매화신검의 전면에 거대한 검의 벽이 세우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뇌까렸다.

    '직접 눈으로 보니 검벽의 원리가 뭔지 이해하겠군. 하지만 기껏해야 검사로 짠 벽일 뿐이야. 현재 내가 검강으로 뽑아낼 수 있는 매화는 왼쪽 오른쪽 각각 4개씩 다합쳐서 8개뿐이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왕기가 달려가며 쌍검으로 각각 사매난추의 초식을 시전하자 매화신검이 자신이 익히 아는 초식이라는 듯 검벽의 사이즈를 줄여 심장 부위에 검벽을 집중적으로 겹겹이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 콰과광...

    둘씩 짝을 이루어 달려나간 검강으로 형성된 매화가 검벽에 가서 순서대로 들이박기 시작했다. 그러자 용케 4개의 매화를 막아낸 검벽에 검이 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붕괴되어 버렸고, 아직도 남아 있던 4개의 매화가 매화신검의 가슴 부위를 들이박고서는 창호지처럼 가볍게 뚫고 나가 버렸다.

    - 쿵.

    상반신이 통째로 다 날아간 매화신검의 하체가 비무대 위로 넘어지며 무릎을 꿇는 소리가 왕기의 귓속으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검왕(劍王)을 뛰어넘어 조만간 검황(劍皇)으로 불리게 되며 강호를 지배할 고려검황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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