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34화 (34/171)
  • #34. < 왕기, 오인참수(五人斬首)에 도전하다 - 3 >

    '다음'이라는 왕기의 외침에 비무대 옆의 병사들 대신 하북 팽가의 무인들로 보이는 자들 몇 명이 급히 뛰어올라와 청호일진의 잘린 머리통과 목이 달아난 몸통을 조심스럽게 챙기기 시작했다. 시신의 수거가 끝나자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왕기를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선풍향검. 그대가 죽인 분이 누군지 아시오? 팽가의 전대가주이신 도왕께서 아끼시는 친손자이외다. 각오하시오. 도왕께서 이번 일을 절대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니."

    팽가 무인의 노골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왕기가 비무대를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누가 들으면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줄 알겠소이다. 능력도 없는 놈이 가문의 위세를 믿고 함부로 비무신청을 한 것이 잘못이지. 자신의 목을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까부는 놈은 죽어도 싼 거 아니겠소? 본 군은 그것이 비정강호(非情江湖)의 생리라고 알고 있소이다. 이거 뒷배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소이까?"

    그러자 폭풍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잔뜩 흥분한 구경꾼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옳소. 주제도 모르고 까불면 죽어야 마땅한 법이지.

    - 맞소이다. 얼마전 도왕이 하남표국주의 아들을 죽일 때처럼 말이오.

    - 하북 팽가는 예로부터 자신들의 위세를 믿고 너무 나대는 경향이 있소이다.

    - 손자가 비무신청을 했다가 죽었다고 보복을 하면 강호의 도리를 무시하는 행위이지.

    그 순간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비천신개가 비무대 위로 급히 뛰어올라와서 외쳤다.

    "이번 비무는 정당했다는 것을 공증을 선 본 거지의 개방과 함께 소림과 무당이 증언해  줄 것이오. 이번 비무는 정당했으며 청호일진의 죽음에는 선풍향검의 죄가 없소이다. 따라서 도왕은 그 책임을 선풍향검에게 물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러니 다들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구경꾼들이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히자 비천신개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도왕이 선풍향검에게 개인적으로 도전하는 것 또한 정당할 것이오. 선풍향검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기 때문이오. '널 죽이면 도왕이 나서서 손자의 복수라도 할까 봐 내가 두려워할 것 같은가? 난 화경에 들었다는 도왕과의 생사결(生死結)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야'리고 말한 것을 여기에 계신 분들이 똑똑히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소이다."

    비천신개의 말을 들은 왕기가 속으로 뇌까렸다.

    '대의명분을 챙기는 한편 도왕의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안달하는 것을 보니 도왕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로군. 하긴 도왕의 성정이 폭급한 것은 유명하고 난 저들의 입장에서는 강호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한낱 고려 오랑캐에 불과하니까 그런 것이겠지. 엎질러진 물이니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크게 한번 질러볼까? 오랜 강호의 역사에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린 고려인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의 무공이 무시당하고 고려의 무인들이 무시당해왔었지. 만약 내가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강호를 주유하며 인재를 구하기에도 용이할 것이고, 차후에 고려를 통치할 때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야. 더 나아가 언젠가 내가 다스리는 고려가 대륙으로 진출할 때에도 나의 명성이 큰 힘을 발휘하겠지.'

    마음을 굳힌 왕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도왕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를 하오. 당연히 복수를 하고 싶겠지. 그러니 내가 제안을 하겠소. 내가 황궁에 있으면 날 공격하지 못할 테니 내가 한달 이내로 황궁을 나가 팽가를 직접 방문하겠소. 그때 한판 제대로 붙어봅시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 계신 분들은 그 대결을 보지 못하실 것이오. 팽가에서 여러분들을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니까. 그러니 내가 패배해서 죽으면 땅에 고이 잘 묻어주든지 개밥으로 던져주든지 팽가에서 알아서 하시고... 만약 내가 도왕을 이기면 도왕의 목을 잘라 대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의 처마에 일주일간 그 목을 매달아 두겠소. 여러분들께 내가 이겼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말이오."

    그 순간 사방에서 미친 듯한 환호성과 함께 잔뜩 흥분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 멋지다. 선풍향검. 사나이라면 응당 그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지.

    - 고려 남자들이 평상시에는 조용해도 한번 화나면 무섭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군.

    - 도왕. 비겁하게 숨지 말고 어디 한번 붙어보라고. 난 당분간 대도를 안 떠날 것이야.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지.

    그때 배를 모는 수부(水夫) 차림에 무식하게 생긴 무림인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 나도 한 달간 본채로 돌아가지 않고 대도에 계속 머물겠소. 이왕이면 내가 머물고 있는 춘향각(春香閣) 처마에 도왕의 목을 매달아주시오. 그럼 본인이 목이 걸려있는 일주일 내내 강호동도 여러분들에게 거하게 술을 사겠소이다.

    그때 그 무림인을 알아본 누군가가 친분이 있는지 큰 목소리로 외쳤다.

    - 야 너두?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에 속해 있어서 배를 모는 기술은 탁월하지만 머리가 돌처럼 단단하기로 유명한 조정석두(漕艇石頭)처럼 나 역시 춘향각에 머물고 있소이다. 선풍향검이... 아니 그 정도 별호로는 약하지. 도왕의 목을 잘라 내걸겠다고 공공연하게 약속을 한 고려에서 오신 무인이니 존경의 뜻을 담아 '고려검왕(高麗劍王)'이라고 부르겠소이다. 고려검왕께서 정말로 도왕의 목을 베어 춘향각 처마에 걸면 나도 조정석두와 함께 일주일 내내 한턱내도록 하겠소. 화경의 고수라는 도왕의 잘린 목을 보는 데 그 정도면 싼 거라고.

    그 순간 벌써부터 공술을 먹을 생각에 흥분했는지 구경꾼들이 단체로 발을 구르며 이구동성으로 힘차게 외쳐대기 시작했다.

    - 쿵. 쿵. 쿵...

    - 고려검왕, 고려검왕, 고려검왕...

    락스타의 콘서트장을 방불케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비천신개가 재빨리 다음 비무자를 호출하였다. 그러자 잔뜩 흥분한 얼굴의 '피풍검객(披風劍客)'이 비무대 위로 단숨에 뛰어올라와 검을 뽑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고려검왕의 호연지기가 대단하여 본 피풍검객이 탄복하였소이다. 하지만 본 검객과의 비무는 걱정마시구려. 난 특별한 소속이 없는 낭인에 불과하니 목을 쳐도 보복을 할 자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오늘 원 없이 제대로 한번 붙어봅시다."

    그런 피풍검객을 보며 왕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나의 강호 데뷔 무대는 성공적이겠지? 아마도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야. 근데 생각보다 피풍검객이 하수로군. 분위기에 휩쓸려 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평정심을 잃고 있어.'

    그 순간 피풍검객이 빠르게 좌우로 발을 놀리자 신영이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힘차게 허공으로 뛰어오른 피풍검객이 공중제비를 돌며 왕기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 중에 한 명이 감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운룡대팔식의 신룡선무(神龍旋霧) 초식이다. 경공이 예사롭지 않은걸."

    그때였다. 왕기의 머리 위로 날아가던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은 피풍검객의 몸이 일순 세 개로 늘어나 마치 구름 속에 숨어있는 용의 몸이 세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구경꾼들 중에 누군가가 또다시 외쳤다.

    "운룡대팔식의 운룡삼현(雲龍三現)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어. 고려검왕이라고 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는걸."

    자신의 머리통 위로 날아온 세 명의 피풍검객이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수많은 검영(劍影)이 생성되어 마치 바람이 휘몰아치듯 일제히 들이닥치고 있었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왕기는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도 빠르고 몸놀림도 빠르다더니 사실이로군. 하지만 넌 상대를 잘못 만났다. 검의 빠르기라면 나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기본적으로 난 검이 두 개라고. 게다가 난 척무관의 칠성둔형에도 속지 않는 사람이지. 분신이 세 개밖에 안되는 운룡삼현 정도야 껌이라고.'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피풍검객의 생체진기를 정확히 파악한 왕기가 피풍검객의 본신을 향해 쾌속하게 쌍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따다다다다다당...

    - 푸욱.

    검과 검이 연속적으로 빠르게 격돌하는 소리에 이질적인 소리가 하나 섞여서 들려왔다. 삼삼이로 피풍검객 본신이 시전하는 난피풍검법을 빈틈없이 다 막아낸 왕기가 칠칠이로 피풍검객의 심장 부위를 정확히 찌르는 소리였다. 떠오르는 해에 아침 안개가 걷히듯 세 개로 나뉘어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피풍검객의 신영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즉사를 했는지 아무런 신음성도 내지 못하고 비무대 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비무대 주변에서는 아무런 환호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압도적인 왕기의 무공에 다들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자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을 깨고 왕기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같은 무림인으로서 피풍검객을 존중하오. 그런 의미에서 신체에 최대한 손상을 입히지 않고 죽여드렸소이다. 비천신개 대협. 다음 순서를 진행해 주시길 바라오."

    왕기의 호출에 다급히 비무대로 뛰어올라온 비천신개가 외쳤다.

    "동도 여러분. 비무대 정비와 선풍 아니 고려검왕의 체력을 위해 일각의 휴식시간을 가지겠소이다."

    휴식시간을 얻은 왕기가 차양막이 쳐져 있는 자신의 대기석으로 돌아가자 사색이 되어있는 척무관이 수건을 들고 뛰어와 다급히 말했다.

    "저하. 너무 무모하십니다. 저하께서 굳이 도왕과 붙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척무관이 건네준 수건으로 태연하게 얼굴을 닦으며 왕기가 대답했다.

    "걱정 말게. 내게 다 뜻이 있어서 한 것이니까. 도왕과 붙어서 지지 않을 자신도 있고. 척무관이 아직 나의 진정한 실력을 몰라서 그런 것이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인식한 듯 척무관이 다음 상대에 대해서 읊었다.

    "저하. 여태껏 붙었던 자들과 '삼수사비(三手四譬)'는 차원이 다른 고수입니다. 그 뒤에는 십대고수인 매화신검이 버티고 있고요. 긴장을 늦추시면 절대 안 됩니다. 장풍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자들이 왜 무서운지는 소관이 이미 말씀드렸지요?"

    "잊지 않았으니 걱정 말게나. 장풍을 쓰는 자들이 무서운 이유는 일단 내공이 두텁기 때문이지. 적수공권으로 무기를 든 자를 상대하는 자들이니 전투감각도 당연히 뛰어날 테고. 거기에 검기처럼 한 방향으로만 기를 뿜어내지 않으니 생각처럼 피하기도 쉽지가 않아. 인간의 손가락은 열 개나 되니까 말이야. 내공만 받쳐준다면 지풍(指風)을 발사해 동시에 검기 열 개를 뿜어내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볼 수가 있을 테지. 게다가 열 개의 지풍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손쉽게 발사할 수도 있을 테고. 손가락을 가볍게 굽히는 것만으로도 각도 조절이 가능하니까. 삼수사비라는 호를 받을 정도이니 당연히 손도 빠를 테지만 말이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네. 내게는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다 마련되어 있으니까."

    손대면 툭하고 울 것만 같은 표정의 척무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관은 저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제발 이겨주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툭. 툭.

    왕기가 척무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말게. 오늘 이 자리에서 척무관이 내 시체를 거두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럴 자신도 있고."

    척무관이 어딘가를 향해 떠나자 혼자 남은 왕기가 생각에 잠겼다.

    '척무관의 말처럼 장풍과 지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무인은 무섭다. 게다가 난 그런 자와 대련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오래 끌수록 내가 불리해져. 하지만 내가 이길 것이다. 건곤일척(乾坤一擲)! 단 한 방에 승부를 본다. 내가 생각한 게 맞는다면 내가 이길 것이야. 맨몸으로 무기를 상대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 둥. 둥. 둥...

    어느새 일각이 흘렀는지 북소리가 들려오자 왕기가 비무대로 몸을 날렸고, 반대쪽 대기석에 있던 미중년으로 보이는 무인도 비무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삼수사비를 처음 본 왕기가 뱀처럼 차가운 상대방의 눈을 보며 뇌까렸다.

    '듣던 대로 내공이 두텁군. 영약을 먹어 2갑자에 달하는 나와 비교해서도 밀리지 않는다. 아니 나보다 내공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일 정도야. 팔비신장이 아끼는 제자라고 하더니 승상이 빼돌린 영약을 얻어먹은 모양이로군. 이렇게 되면 내가 기대하던 내공의 우위는 없어졌다. 그리고 얼굴은 잘 생겼지만 눈빛에 인간의 감정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가 않아. 명경지수가 뭔지를 체득하고 있는 진정한 고수로군. 방심하면 안 되겠어.'

    비무를 시작하려는지 삼수사비가 양쪽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대며 입을 열었다.

    "천한 고려 오랑캐 한 놈을 죽이기 위해 내가 대도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모를 것이야. 그 보답으로 사지를 자른 다음 목줄을 채워 대도 시내를 끌고 다녀주지. 나에게 고마워하라고. 단박에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 순간 삼수사비의 팔이 빠르게 흔들려 마치 아수라처럼 여러 개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런 상대방을 향해 왕기가 쌍검을 뽑아들고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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