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33화 (33/171)
  • #33. < 왕기, 오인참수(五人斬首)에 도전하다 - 2 >

    연무장을 향해 날아가던 왕기가 땅을 박찬 추진력이 떨어졌는지 연무장 모서리 쪽을 향해 추락을 하려고 하자 지난 이틀간 죽어라 연습한 '자기부상신법(磁氣浮上身法)'을 구사했다. 오른팔을 흔들어 비무대 정중앙의 허공에 강력한 양의 자기장을 생성시키고 자신의 몸 전체에 음의 자기장을 두르자 추락하려던 왕기의 신형이 살짝 덜컹거리더니 비무대 정중앙 쪽으로 빠르게 미끄러지며 날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실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무공을 선보이는 것에 긴장이 되었는지 발밑에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하여 허공에 한 마리 새처럼 둥실 떠있는 왕기가 어깨를 털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 왕기의 귀에 공중에 계속해서 떠있는 왕기를 놀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구경꾼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공증인으로 모셨다는 무당파의 도광진인(道廣眞人)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당파의 1대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일곱 명만이 칠성검진(七星劍陳)을 배우고 대대로 물려받는 호칭을 달수 있다는 현 칠성검수(七星劍手) 중에 한 명인 도광진인이 구경꾼들의 호기심을 풀어주려는 듯 큰 목소리로 외쳤기 때문이었다.

    "신법에 관한 거라면 당연히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는 비천신개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소? 어떻게 보시오? 일군인 선풍향검의 신법이 예사롭지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오."

    그러자 비천신개가 즉답했다.

    "놀랍소. 물론 본 거지도 저 정도의 신법은 구사할 수가 있소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16세라는 선풍향검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믿기지 않는 경지이구려. 전설의 검향지경에 든 자라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되오."

    비천신개의 말에 사람들이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출전자 대기석에 앉아있던 매화신검이 비무대가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40년간 매화검법을 죽어라 수련한 본 도장도 달성 못한 경지를 아직 약관(弱冠 : 20세)도 되지 않은 고려족의 오랑캐 따위가 어떻게 달성한단 말이오?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선풍을 이용한 잔재주일 것이오."

    그 순간 공증인 중 한 명이자 매사를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처리하기로 유명한 소림의 계율원주(戒律院主)인 자심대사(慈心大師)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소이다. 소승이 나이를 먹으니 이제 눈이 침침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구려. 매화신검이 말씀하신 선풍은커녕 미풍도 안 보이니 말이외다."

    대놓고까지는 않았지만 자심대사가 은근 슬쩍 매화신검의 발언을 뭉개버리자 대기석에 앉아있는 매화신검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상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타오르는 불에 아주 기름을 들이붓는구나. 비무전부터 매화신검이 날 제대로 벼르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뭐 상관없다. 좋게 대화로 끝낼 것 같았으면 이런 비무 대회 같은 걸 의도하지도 않았어. 이왕 무림인들의 어그로를 끄는 거 최대한 화려하고 충격적으로 하는 편이 나을 테지. 공민왕과 고려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기로 맘먹었으니까. 하지만 척무관의 충고를 외면할 필요는 없을 터. 자신과 다르면 배척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자고로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이지. 내가 익힌 무공이 사술로 몰리지 않으려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어.'

    결심을 굳힌 왕기가 양팔을 번갈아 휘둘러 허공에 몇 개의 자기장을 더 생성시켰다. 그런 다음 마치 사다리를 타는 것처럼 빠르게 손발을 놀려 높이 더 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비천신개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음... 천상제(天上梯)의 신법이로구나. 도광진인. 어떻게 보시오?"

    "무당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천상제의 신법이 맞긴 하오. 하지만 현 무당에서도 천상제를 보여줄 수 있는 분은 사왕(四王)에 속해 있는 태청진인(太淸眞人)뿐이외다. 천상제는 본 도사조차도 자유롭게 시전하지 못하는 신법이란 말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자심대사가 다급히 물었다.

    "무당의 전대장문인인 태청진인은 강호에 다섯밖에 없다는 화경에 드신 분이 아니오? 그럼 선풍향검의 경지가 화경에 도달했다는 뜻이오?"

    "그것... 그것까지는 본 도사도 모르겠소이다. 대사. 한 분야에 특출난 재질을 타고난 무인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오."

    높은 상공에 도달하자 사람들이 작게 보였고 긴장이 풀린 왕기의 가슴속에서는 불현듯 호연지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발밑에 자기장을 연달아 생성시킨 왕기가 마치 계단을 밟고 내려오듯 허공을 밟으며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 존경하는 강호동도 여러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소이다. 본 대군은 고려의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강릉부원대군이며 동도 여러분들께서 본인에게 선풍향검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붙여주었소이다.

    보기 드문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왕기를 보느라 단체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구경꾼들의 환호성과 열광적인 박수소리가 터져 나올 때 비천신개가 넋이 빠진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천상제에 이은 허공답보(虛空踏步)까지. 그렇게 어려운 신법을 연달아 구사하면서 태연하게 말까지 한다고? 진정 화경이란 말인가?"

    상공에서 들려오는 왕기의 목소리가 점점 지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 강호동도 여러분들은 본 군이 익힌 무공이 많이 궁금하실 것이오. 본 군은 불가해무공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림의 반야심공과 운 좋게 인연이 닿았고, 황실에 보관하고 있던 영약의 힘을 빌려 극성으로 익힐 수가 있었소이다. 그리고 무당의 양의검법과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대성한 상태라오.

    다른 구경꾼처럼 목이 빠져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비천신개가 재빨리 자심대사에게 물었다.

    "선풍향검이 소림의 제자였소이까?"

    "본 승이 숭산(嵩山)에서 내려와 머나먼 대도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겠소? 운기를 할 때 선풍을 일으키는 것은 반야심공 특유의 현상이외다. 그걸 확인해보라는 방장의 지엄한 명을 받고 왔는데... 지금 보니 정말로 반야심공을 해석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외다. 반야심공이 아니라면 저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위력을 보여줄 수가 없을 것이오. 하지만 아쉽게도 선풍향검은 소림의 제자가 아니외다. 소승이 직접 확인을 해본 결과 본산과 속가 그 어디에도 그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았소. 아마도 시중에 널리 퍼져있는 비급을 구해 자력으로 익힌 것으로 보이오. 그 옛날의 혜능조사처럼 불세출의 천재라는 뜻이지."

    이번에는 비천신개가 도광진인을 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무당의 제자인 것이오? 아까 보여준 무당의 천상제도 그렇고 본인의 입으로 말만 불가해신공이 아니지 익히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양의검법을 대성했다고 말하지 않았소?"

    "무당의 제자도 아니외다. 본산뿐만이 아니라 그 어느 도관에도 선풍향검의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소."

    - 반야심공은 본디 소림의 것. 본 군은 소림의 것을 소림에게 돌려드릴 용의가 얼마든지 있소이다. 물론 그에 합당한 조건이 맞아야 할 것이외다. 하지만 조건만 맞는다면 소림의 그 누구라도 반야심공을 익힐 수 있게 본 군이 직접 전수를 해드리리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왕기의 발언에 자심대사의 표정이 환해졌다.

    "역시 머리가 뛰어난 중생이라 그런지 사람의 도리를 잘 알고 있구려. 정해진 비무가 끝나는 대로 선풍향검을 만나봐야 할 것 같소이다. 비무가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요?"

    자심대사의 물음에 도광진인이 누가 들을세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럴 것이외다. 경공만 뛰어난 줄 알았었는데 본파의 양의검법을 대성했다고 자평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화경이 맞는 것 같소. 비무 예정자들 중에 매화신검이 비록 강호의 십대고수이기는 하나 화경에는 어림도 없지요. 본 도사가 태청진인과 붙으면 5초를 채 못 버티오. 매화신검이라고 해서 용빼는 재주가 있겠소이까?"

    어느새 지상에 가까워진 왕기가 깃털처럼 사뿐하게 비무대에 내려앉으며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외쳤다.

    - 쾅!

    - 강호동도 여러분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오. 칼에는 눈이 없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본 군에게 항복을 하고 포기를 하면 예정된 비무는 없었던 걸로 해주겠소이다.

    - 휘리릭.

    공중제비를 돌며 비무대로 날아올라간 비천신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선풍향검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직접 보셨을 것이오. 쓸데없이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겠소? 지금부터 본 거지가 다섯을 세겠소. 그때까지 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는 분은 예정대로 비무를 진행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다섯, 넷..."

    비천신개가 카운트를 다 세기도 전에 흉측한 귀신탈을 쓰고 장창을 든 무인이 비무대로 가볍게 뛰어올라온 다음 힘차게 외쳤다.

    "비천신개 대협.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그만하시구려. 칼날 위를 걷는 것이 강호인의 숙명 아니겠소? 적이 강하다고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쳤다가는 그 날로 무림인의 삶은 끝나는 것인데 누가 감히 포기를 하겠소? 예정대로 진행을 시켜주시지요."

    첫 번째 비무자인 귀창독심(鬼槍毒心)의 말에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비천신개가 주의사항을 간단히 전달한 후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러자 왕기를 마주 보고 선 귀창독심이 입을 열었다.

    "단단한 돌로 제작된 비무대에서는 반야심공의 위력이 줄어들겠지? 선풍으로 본인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흙모래가 없으니까 말이야."

    "나에 대해서 제법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로군. 하지만 반야심공의 위력은 흙먼지 따위로 모습을 감추는 것이 아니야."

    왕기의 대답에 귀창독심이 장창을 앞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린놈이 입만 잔뜩 살았군. 운 좋게 영약을 복용했다고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인데 무림인들의 승패는 무공으로만 결판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이 자리에서 직접 보여주지. 그리고 보통 신법이 뛰어난 놈들은 겁쟁이인 경우가 많아. 도망치기 위해서 죽어라 익히다 보니 신법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지. 네놈을 죽인 후 살을 곱게 떠 젓갈을 담아 내가 직접 고려촌으로 가서 헐값에 팔아주도록 하지. 이왕이면 같은 고려 오랑캐끼리 나눠 먹는 게 좋지 않겠..."

    - 퍽.

    그 순간 벼락처럼 빠르게 튀어나간 삼삼이가 귀창독심의 입을 찔러버렸다. 운 좋게 즉사를 하지 않았는지 귀창독심이 눈을 크게 뜨고 피거품을 문 채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릴 때였다.

    - 빙글.

    왕기가 가볍게 손목을 회전시키며 검을 수직으로 세우자 단단한 쇠와 부딪친 치아들이 비무대 위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고, 왕기가 팔을 움직여 위로 천천히 베어 가자 입술과 코가 반으로 갈라졌고 결국 두 쪽으로 잘린 귀창독심의 머리통에서 회색빛 뇌수가 뭉텅이로 쏟아져내려 귀창독심이 죽기 전에 지린 소변과 함께 비무대 바닥을 흥건히 적시기 시작했다.

    "실력은 쥐뿔도 없는 놈이 입만 살아서는... 비천신개 대협. 다음 비무자를 불러주시지요."

    비무대 옆에 서있던 병사들이 올라와 빠르게 시체를 치우고 바닥을 닦자 이제 겨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 하나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더니 왕기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였다.

    "본인은 친조부이신 도왕에게 어렸을 때부터 도를 사사한 하북 팽가의 청호일진(靑虎一振)이라고 하옵니다. 오늘 선풍향검과 이렇게 비무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서 뭐?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싶은 모양인데 넌 사람을 잘 못 골랐다. 널 죽이면 도왕이 나서서 손자의 복수라도 할까 봐 내가 두려워할 것 같은가? 난 화경에 들었다는 도왕과의 생사결(生死結)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야. 운이 없는 널 탓하거라."

    - 쉬익.

    빠르게 찔러간 왕기의 삼삼이를 청호일진의 묵직한 도가 막아섰다. 그 순간 바로 뒤따라온 칠칠이가 청호일진의 목부위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 푸학...

    시원한 물줄기 소리와 함께 둥실 떠오른 청호일진의 머리통이 비무대 위에 떨어지더니 잘린 목에서 피분수를 뿌리며 이리저리 나뒹굴자 비무대 주변이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도왕의 친손자라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목을 날려버린 왕기의 행동에 경악한 것이었다. 그 순간 왕기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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