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 왕기, 오인참수(五人斬首)에 도전하다 - 1 >
서기 1345년 10월 10일
[고려각 앞의 연무장]
"케헥. 켁. 켁..."
연무장의 풍경은 정확히 전날과 판박이였다. 날짜가 딱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단지 그 역할이 정반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전날의 왕기처럼 복부 쪽을 강하게 두들겨 맞았는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신물을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는 척무관을 보며 왕기가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야. 척무관의 몸에서 반탄지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어서 빨리 일어나게. 비무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척무관이 날 제대로 훈련시켜줘야 할 것 아닌가?"
계속되는 대련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자신을 놀리는 듯한 왕기의 말에 쓴웃음을 지은 척무관이 손을 들어 입가를 닦은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하께서는 이제 소관과의 실전 대련이 필요 없는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지금 저하에게 필요한 것은 소관과의 대련이 아니라 본인이 얻은 무공과 경지에 대한 명확한 정리와 그에 따른 자각입니다. 자신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고 무엇을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시는 게 더 중요한 시기이지요."
척무관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줄 필요 없네. 난 내가 익힌 무공의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고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도 훤히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랬다면 불과 하루 만에 내가 척무관을 이렇게 손쉽게 이길 수 없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척무관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네. 오늘의 대련에서 단 한 번도 송학검법을 사용하지 않았잖은가? 그러니 다시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고."
대련을 재촉하는 왕기의 말에 척무관이 다급히 발을 뻈다.
"저하. 소관이 송학검법을 사용하게 되면 저하께서도 전력을 다 하실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그럼 서로가 너무 위험해집니다. 물론 저하께서 소관을 당연히 이기시겠지만 내일이 비무날인데 행여 사소한 부상이라도 당하게 되면 큰일이지요. 정 소관을 맘껏 두들겨 패고 싶으시면 비무가 끝난 후에도 얼마든지 가능하오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시지요. 그리고..."
"그리고?"
"소관이 내일 있을 비무와 관련해서 저하께 몇 가지 충고를 해드리고자 하옵니다."
"어떤 충고인가? 내가 귀를 씻고 듣도록 하지."
"저하께서 익히신 무공들의 위력은 더없이 강력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괴이(怪異)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공을 일으킬 때 선풍이 발생한다? 이상해 보이지만 큰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 무공이 반야심공인 것만은 아니니까요. 구대문파에 속하는 공동파에도 그와 유사한 현상을 일으키는 무공이 있고, 용오름이 자주 일어나는 바닷가에 위치한 해남파에도 비슷한 무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보여주신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허공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신법? 그것 또한 상관없습니다. 소림의 '금강부동(金剛不動)'이 그러하고 마교의 '부신귀영(浮身鬼影)' 신법이 또 그러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검향지경에 이른 매화검법도 문제가 없고, 뇌전벽력수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기나긴 강호의 역사에 여러번 등장한 수법들이니까요. 하지만 저하께서 새로이 창안하셨다는 수법은 소관이 보기에도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척무관이 들고 있는 검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수법을 말하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저하. 무인이라면 상대방이 공격을 할 때 사용하는 기를 어느 정도는 다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하께서 그러한 수법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현상은 '허공섭물(虛空攝物)'과 유사해 보이지만 소관은 검 주변에서 아무런 기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런 기도 느끼지 않았는데 소관이 들고 있는 검이 움직임이 깁작스럽게 느려진다? 마치 귀신이 제 검을 붙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요. 저하께서 그게 자기력(磁氣力)의 힘이라고 설명해 주셨지만 소관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하께서는 사람이지 자석이 아니시니까요. 그 수법을 내일 사용하면 분명히 시비를 거는 자들이 생길 겁니다. 저하께서 사술(邪術)을 사용하고 있다고 몰아세우려 들겠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사술이 아니라네. 염연히 내공을 이용해서 일으키는 힘이고 무공의 한 종류라고."
"소관은 당연히 저하께서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하지만 내일 비무에 참관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그것도 한낱 고려인이 새로운 무공 이론을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십대고수를 가볍게 꺾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믿고 싶은 무림인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저하. 그 수법을 사용하지 않으셔도 내일의 비무에서 질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그 수법은 사용하지 않도록 하지. 그것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나에게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장의 한 수라는 게 필요할 테고 말이야. 척무관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끝끝내 송학검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또 충고를 해줄 것이 있나?"
"지금 저하의 마음 한구석에 이런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강해졌는데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하. 강호의 명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로 세워지고 피를 먹으며 자라는 것입니다. 저하께서 인재를 구하기 위해 강호를 주유하실 생각이라면 손속이 잔혹하고 냉정하다는 명성이 더 유리할 것입니다. 그러한 명성만이 불필요한 싸움을 없애주고 수고로움을 덜어줄 테니까요."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라는 뜻이로군. 그러기 위해서는 손속에 정을 두지 말고 도전자들을 깡그리 다 죽여버리라는 뜻이겠지? 내 그리할 테니 걱정 말게나."
"저하. 저하...'
두 사람이 내일 있을 비무와 관련하여 최종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고용보가 연무장으로 다급히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승상 쪽에서 내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그렇습니다. 궁지에 몰려있는 승상이 저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과 영약을 걸었을 뿐만이 아니라 팔다리만 잘라내도 두둑한 보상을 약속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저하. 이건 확실한 정보입니다. 내일의 비무는 서로의 무를 비교하는 자리가 아니라 저하를 공개적으로 시해하는 자리가 될 것이옵니다. 저하. 비록 떠들썩하게 소문이 난 비무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취소하셔야만 하옵니다. 잠깐의 굴욕은 겪겠지만 그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사옵니다."
왕기가 뭐라 채 대꾸를 하기도 전에 척무관이 입을 열었다.
"자정원사.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내일 약속된 비무에 나가실 것이고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소관과 같은 자가 열이 모여도 못하는 걸 매화신검이라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척무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하께서 하룻밤 사이에 탈태환골을 하셨다는 건 저도 눈이 있으니 알아보겠습니다만 십대고수인 척무관이 열이 모여도 못 이긴다니요? 자고로 사람을 죽이는 건 칼이 아니라 자만에 찬 마음과 교만스러운 세 치 혀라고 하였습니다. 저하께서 내일 비무에 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라도 당하게 되면 고려의 앞날이 어두워질 것이고, 저하가 왕이 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고려 백성들의 미래에..."
- 툭. 툭.
왕기가 자신의 어깨밖에 닿지 않는 작달막한 키를 가진 고용보의 뒤통수를 가볍게 두들겨 길어지려는 말을 잘랐다.
"걱정하지 말게. 지정원사는 비무를 걱정하기 보다 승상의 움직임을 더 예의주시하게. 비무에서 날 죽이는 게 수포로 돌아가면 또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게 날 도와주는 것이야."
[식량창고를 개조한 연공실]
밤이 되자 연공실에서 자신의 무공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던 왕기가 전날 밤 처음으로 확인한 메시지를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대공을 이루는 바람에 내가 왜 과거로 끌려왔는지는 알게 되었다. 내가 과거로 끌려오는 바람에 내 운명의 수레바퀴가 궤적을 바꿨고, 그에 따라 역사적인 사실들도 자연스럽게 바뀌고 있을 것이야. 하루하루를 더욱 조심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 지식들은 조선(朝鮮)과 명(明)나라에 의해 쓰인 것들이야. 역사란 것은 전통적으로 승자의 전리품이니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지. 얄팍한 내 역사 지식만을 믿고서 일을 추진해 나가는 건 위험해.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서 헤쳐나가야만 할 것이야.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수가 있을 테니까.'
메시지를 확인한 후 새로이 주어진 삶과 소명에 순응하기로 결심을 한 왕기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승상이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혜종과 몰래 결탁한 승상의 조카인 토크토아의 손에 의해 유배를 갔다가 이미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왕기의 뇌까림처럼 역사의 수레바퀴가 왕기의 등장에 의해 조금씩 비틀리고 있는 중이었다.
서기 1345년 10월 11일
[흥성궁의 앞 뜰]
아침 일찍부터 모여든 구경꾼들로 인해 여러 개의 대형 차양막과 사각형의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홍성궁의 앞뜰은 무림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성에서 열리는 비무다 보니 어중이떠중이들은 없었고 구경꾼들 대부분이 강호에서 제법 알아주는 명성을 지닌 무림인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무대 주변과 홍성궁 앞쪽을 삼엄하게 경호하고 있는 병사들로 인해 시장통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 둥. 둥. 둥...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지 한쪽 편에 설치되어 있는 큰 북을 고수가 힘차게 두들기기 시작했고, 기다림에 지친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될 때였다. 한 명의 무인이 절정의 경공을 선보이며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거적떼기를 이리저리 누빈 옷에 봉두난발을 한 거지가 사방으로 연신 포권을 해가며 진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강호동도 여러분, 본인은 개방의 장로이며 순찰호법을 맡고 있는 비천신개(飛天神丐)라고 하옵니다. 영광스럽게도 오늘의 비무를 진행하고 공증을 하는 자격까지 맡았으니 모든 분들께서는 제 지시에 잘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 강호의 대협을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 의와 협으로 이름 높은 비천신개라면 믿을만해.
- 개방이 비겁한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유명하지.
- 맞소이다 강호의 오랜 역사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소이다.
- 비무대회의 공증인으로 비천신개만한 자가 또 어디 있겠소?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들었는지 비천신개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본인을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것은 좋으나 저 하나만으로 공정한 비무대회를 진행하기에는 어여움이 있어서 본인이 총력을 다해 대도 근처에 있는 여럿 고명한 분들을 공증인으로 모셨습니다. 먼저 소림과 무당에서 오신 분들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장황한 공증인의 소개가 끝나가자 비무대 한쪽에 있는 차양막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기가 각오를 새삼 다지고 있었다.
'나 혼자서 연공실에 틀어박혀 무공을 익히고 연마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가 새롭게 써 내려가는 공민왕의 진정한 행보는 지금 이 순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야.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그 누구보다 충격적인 등장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래야 오늘 이후 새롭게 작성될 역사에 선명하게 기록이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럼 오늘 비무에 참석할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얼마 전 강호에서 일군으로 우뚝 올라가신 분이며 검향지경에 들었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나있는 분입니다. 현재 고려의 왕족이시며..."
비천신개가 자신을 소개하는 멘트가 끝나가자 왕기가 비무대를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