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29화 (29/171)
  • #29. < 대공(大功)을 이루고 비무에 나서다 - 1 >

    아침부터 시작된 십팔반병기를 이용한 연속 대련이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열심히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왕기가 반야심공과 뇌전벽력공을 동시에 운기한 이후부터는 아침나절에 들려오던 찰진 타격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고, 연무장에서는 두 사람의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 촤차창. 창창.

    연무장의 흙먼지를 거침없이 휘말아올리는 선풍 속에서 스파크가 간헐적으로 번쩍거리고 있었고, 제법 그럴듯하게 발을 놀리며 마치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처럼 보이는 뿌연 선풍을 이리저리로 휘몰고 다니면서 쌍검을 쾌속무비하게 휘두르고 있는 왕기에게서는 그동안 익혀왔던 무당과 화산파의 검법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과(戈)를 들고 왼쪽 손목에 소형 방패인 간(干)까지 착용하고 있는 척무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흔히들 꺾창이라고 부르며 기다란 장대 끝에 검을 직각으로 매어둔 낫 같기도 한 형태의 무기인 과(戈)를 든 척무관이 장대를 한 자루의 봉처럼, 장대 끝에 매어둔 검을 한 자루의 검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모습은 그가 지닌 병기술의 조예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척무관의 얼굴에는 장시간의 비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합."

    기합을 내지르며 왕기의 쌍검을 막아낸 후 뒤로 몇 발짝 물러난 척무관이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외쳤다.

    "저하. 과를 마지막으로 궁(弓)을 제외한 십팔반병기들을 모두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저하께서는 소관의 예측을 번번이 빗나가게 만드시는군요. 이렇게까지 빨리 실전 대련에 적응하실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십대고수라고 불리는 소관과 비교해도 그렇게 뒤떨어지는 솜씨가 아닙니다."

    대련을 하는 동안 두 가지 내공심법을 동시에 운기하면서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현상들을 끊임없이 관조하고 있던 왕기가 척무관의 칭찬에 대꾸했다.

    "과찬의 말이로군. 척무관에 비하면 아직 어림도 없지. 그나마 내가 이 정도까지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척무관의 공이고 그건 누가 보더라도 자명한 사실이지. 내가 이틀 후에 있을 비무에서 죽지 않고 몸성히 살아난다면 척무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하. 이제 해도 떨어져가고 있으니 마지막 일합을 끝으로 비무를 마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왕기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척무관이 장대를 무서운 속도로 찌르자 끝에 매달려 있는 검이 공간을 도약하듯 빠르게 뛰쳐나오며 왕기의 목을 단숨에 잘라버릴 기세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쌍검을 휘둘러 검을 막아내며 우측으로 한발 옮긴 왕기가 빗겨난 장대를 다시 잡아당기고 있는 척무관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며 쌍검을 앞뒤로 힘차게 휘둘렀다.

    - 파바바박. 땅따다당...

    반나절 사이에 검법을 시전하는 것이 많이 능숙해졌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두른 왕기의 삼삼이에서 순식간에 피어난 매화 네 송이가 사매난추(四梅難追)의 초식에 맞추어 다시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며 날아오는 과에 매달린 검에 가서 맹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고, 새파란 검기에 감싸여 있는 칠칠이에서는 무당파의 구궁검법인 일백(一白)과 이흑(二黑)으로 시작하여 사녹(四綠)과 오황(五黃)을 거쳐 구자(九紫)에 이르는 복잡한 초식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장대를 쉴 새 없이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크으윽..."

    계속되는 충격으로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고 있는 장대가 자신의 뜻대로 잡아당겨지지 않자 척무관의 입에서는 신음성이 절로 흘러나왔고, 어느새 가까이 접근한 왕기의 검이 일전에 나무로 된 천장을 찌른 것처럼 가공할 스피드로 척무관의 목을 망설임 없이 찔러가자, 두 눈에 당황한 빛이 역력한 척무관이 장대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다급히 왼손을 들어 손목에 착용하고 있던 방패로 자신의 목을 막아갔다.

    - 쾅

    간신히 방패로 검을 막은 척무관의 몸이 폭음과 함께 훨훨 날아가며 충격으로 내장이 뒤틀렸는지 입에서는 선명한 핏줄기를 뿜어냈다. 얼음처럼 냉정한 눈빛으로 바닥을 기고 있는 척무관을 노려보며 몇 걸음 다가간 왕기가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지 않자 척무관이 입에서 피를 줄줄 게워내며 물었다.

    "저하. 쿨럭... 왜 계속해서 공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는 소관을 두들겨 팰 절호의 기회일 텐데 말입니다. 실망입니다. 커흑... 아직도 저하의 마음속에는 독심이 없으신 것입니까?"

    척무관의 물음에 왕기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바본 줄 아나? 천하의 십대고수가 고작 3개월짜리와 반나절 대련을 했다고 부상을 입어?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지. 심장박동도 정상이고 기의 흐름도 쌩쌩하며 생체전기도 여전히 잘만 흐르고 있는 상대를 무작정 덮쳐갈 만큼 미련하지는 않아. 날아가며 쏟아낸 핏줄기는 아마도 입안을 깨물어 흘린 피를 입에 머금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뿜어낸 것일 테지. 그러니 연기는 그만하고 빨리 일어나는 게 어떻겠나?"

    그 순간 척무관이 착용하고 있던 방패가 쏘아논 화살처럼 빠르게 왕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행히 거리를 어느 정도 벌리고 있던 왕기가 쌍검을 휘둘러 방패를 가볍게 막아내자 척무관이 아쉽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애석하군요. 제가 쓰러진 걸 보고 저하가 흥분해서 마구 덤벼들면 제대로 혼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말입니다. 저하께서는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이미 갖추신 것으로 보입니다."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속임수가 들킨 것이 민망한지 머쓱한 표정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일어난 척무관이 대답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가짐이지요. 그런 흔들리지 않는 마음만이 저하를 비무에서 살아남게 해줄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안심하고 저하를 비무에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저하께서 말씀하신 생체전기라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말해줘 봐야 척무관은 이해를 못 할걸세. 그러니 이제는 이틀 후 비무에서 상대해야 할 자들에 대해서 좀 알려줄 수 있겠나? 그래야 나도 거기에 맞춰서 준비를 할 것 아닌가?"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총 5명을 뽑아놨습니다. 무공이 약한 순에서 강한 순으로 순서를 정해놨지요. 처음에 붙게 되실 자는 그다지 신경 쓰실 필요가 없는 자입니다. 대도의 암흑가를 지배하고 있는 귀창방(鬼槍幫)의 방주인 '귀창독심(鬼槍毒心)'이라는 자이지만 저하의 상대가 안 될 테니까요. 손도 풀 겸 해서 가볍게 목을 치시면 되는 자입니다."

    "그런 약한 자가 왜 나에게 도전하는 것이지?"

    "대도에 있는 고려촌 때문이지요. 귀창독심이 지배하고 있는 흑도 무리들이 몇 년 전부터는 고려인들이 모여살고 있는 고려촌에서 보호비를 걷지 못하고 있습니다. 십대고수라고 알려져 있는 소관이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하북 팽가의 영역에서 보호비를 걷지는 못합니다. 그건 죽여달라는 소리와 똑같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위세가 점점 쪼그라들고 있습니다. 그 앙갚음을 저하에게 하려고 드는 것이지요. 경험이 일천한 저하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붙게 될 자는 하북 팽가의 젊은 무인들 중 제일 가는 기재라는 '청호일진(靑虎一振)'입니다."

    "하북 팽가? 나와 이무런 연관도 없는 그곳에서 왜 날 저격하러 나오는 것이지?"

    "강호의 격언에 '은혜는 흐르는 강물 위에 새기고 원한은 산중에 있는 바위 위에 새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호인들의 원한은 소 힘줄처럼 질기고 거머리처럼 끈질기지요. 제가 익힌 무공을 단 하나도 배우지 않은 저하를 소관의 제자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맹호폭도와 일전을 치러 패퇴시킨 적이 있었던 절 대신해서 소관의 제자인 저하를 손봐주겠다는 것이지요."

    "내가 그자를 죽여도 되겠나? 괜히 그랬다가는 화경에 접어든 도왕이 내 목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을 거 아닌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맘 놓고 목을 치셔도 됩니다. 강호를 움직이는 두 가지 원칙은 무공의 강력함과 대의명분입니다. 강자의 말이 법이기도 하지만 명분이 없이는 천하제일의 고수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강호라는 곳의 특성이지요. 정정당당한 비무에서 죽었다고 도왕이 나선다? 명분이 없는 일이며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다른 자들은 누구인가?"

    "세 번째로 붙을 자는 강호의 낭인(浪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피풍검객(披風劍客)'이라는 자입니다. 별호에서 보듯이 아미파의 비전절기인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을 극성으로 익힌 자이지요. 검놀림이 빠르고 표홀(飆忽)하며 곤륜파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익혀 몸놀림 또한 재빠른 것이 특징입니다. 하공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놀리기에 상대하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자이지요. 하지만 정해진 소속이 따로 없으니 죽이셔도 무방한 자입니다. 네 번째로 붙을 자는 정림방의 사대당주 중에 한명이자 팔비신장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삼수사비(三手四譬)'라는 자입니다. 손이 3개에 팔이 4개라는 별호처럼 스승인 팔비신장만은 못해도 손이 빠르고 권법과 장법에 조예가 아주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자의 내가중수법에 맞아 침상에서 끙끙 앓다가 죽은 자가 한둘이 아니지요. 소문으로는 저하의 손에 죽은 은형암귀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팔비신장의 명을 받아 대도에 왔다가 저하의 목을 따서 복수를 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그 자이겠지? 척무관처럼 십대고수에 올라가 있다는..."

    "그렇습니다. 화산파의 '매화신검(梅花神劍)'이라는 자이지요. 솔직히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가 직접 나서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저하께서 검향지경에 들었다는 소문만 아니었다면 화산을 떠나지도 않았을 테지요. 그자와의 비무는 어쩌면 싱겁게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하께서 검향지경에 들었다는 것을 증명만 한다면요."

    "척무관이 보기보다 생각이 짧군. 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이 어린 나이에 검향지경에 오른 비법을 화산파에서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나? 가능만 하다면 날 납치해서 고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야.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자신들이 가질 수 없는 비법이라면 차라리 날 죽여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테지. 내 목을 치기 전에는 절대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야. 귀창독심, 청호일진, 표풍검객에 이어 팔비신장의 제자에 십대고수까지 끼어있다니... 누구 하나 만만한 자가 없군."

    "저하. 소관은 일비와 사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소관의 공격을 무사히 버티셨다는 것은 매화신검의 검도 버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 척무관이 아무리 독심을 품었어도 손속에 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 안 그랬다면 오늘 아침에 대련을 시작하자마자 내 목이 달아났겠지. 하지만 매화신검은 척무관과 입장이 전혀 달라. 첨부터 대뜸 날 죽이려고 들 테니까 말이야. 뭐 지금 와서 걱정해봐야 뭐 하겠나? 그 이야기는 이쯤하고... 내 부탁 좀 들어주게나."

    "어떤 부탁입니까?"

    "일전에 고용보에게서 받은 은자가 아직 남아있겠지?"

    "네. 저하. 거의 원금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 돈으로 고기와 술을 잔뜩 사와 고려각 앞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게. 고려 병사들과 그 식솔들이 원 없이 먹을 수 있게 말이야. 고려 병사들이 날 위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니 그에 대합 보답을 해줘야지. 될 수 있으면 우유도 잔뜩 사 왔으면 좋겠군. 우유가 없다면 산양유(山羊乳)도 상관없네."

    "그리 시행하겠사옵니다. 저하."

    척무관이 손을 들어 병사들을 불러 뭐라 지시를 내리자 고려 병사들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각종 무기들이 잔뜩 걸려있는 병기대를 들고서 신이 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기가 빠르게 뇌까렸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내가 상대할 자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보다 나의 경지를 올리는 것이 더 급선무다. 지금 나에게 시급한 것이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전날 실패했던 탈태환골에 성공하기 위해서 나의 무공 이론을 수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분공을 사용하면서 발생한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다.'

    왕기가 자신의 몸을 관조하며 반야심공과 뇌전벽력공을 동시에 운공을 하면서 발견했던 현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편도 2차선처럼 분맥으로 나누어져 있는 반야심공의 진기가 운기를 할 때보다는 그 속도가 현격히 느려졌지만 분맥 건너편에 있는 뇌전지기를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갈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현상을 그냥 놔뒀다가는 조만간 뇌전지기가 다 사라져 버릴 것이야. 그렇게 되면 양의검법의 의미가 유명무실해져 버린다. 반드시 해결해야만 해.'

    [식량창고를 개조한 연공실]

    척무관과 내일 아침 다시 대련을 약속하고서는 고려 병사들과 어울려 음식이 목구멍에 차올라 올 때까지 잔뜩 섭취한 왕기가 그것도 부족한지 고기와 우유를 잔뜩 챙겨 연공실에 틀어박혀 자신의 무공 이론을 수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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