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28화 (28/171)
  • #28. < 왕기, 약점(弱點) 보완에 나서다 - 2 >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는 왕기의 말에 척무관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하. 소관이 보기에 저하께서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으십니다. 그런 저하의 성품이 오늘의 저하를 만들었다는 것을 소관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때로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시며 배우시는 게 더 빠를 때도 있사옵니다. 두들겨 맞으며 습득한 것은 잘 잊어먹지도 않지요. 그러니 일단 십팔반병기에 골고루 한번 두들겨 맞아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무인들에 의해 손질되고 다듬어진 각종 병기들의 고유한 특성이 저하께 새로운 무공의 경지를 열어드릴 것입니다. 곤(棍)과 극(戟) 그리고 수(受)와 과(戈) 등은 저하께 사정거리가 긴 무기의 특성을 제대로 알려드릴 것이고, 편(鞭)과 삼절곤(三絶棍) 등은 무기의 유연성과 영활함을, 구(勾)와 괴(拐)는 병기의 괴이함과 악랄함을, 부(斧)와 월(鉞) 그리고 대도(大刀)와 철퇴(鐵槌) 등은 중(重)의 묘리를, 순(盾)과 간(干)은 저하께 공수(攻守)의 조화(調和)가 뭔지를 잘 알려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좀 전에 소관이 직접 시험해본 결과 저하의 몸에서는 반탄지기가 잘 작동하고 있으니 크게 다치실 일은 없을 테니까요."

    두들겨 맞으면 골병들기 딱 좋은 철퇴를 어서 빨리 사용하게 해달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척무관을 보며 왕기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척무관. 내가 척무관에게 두들겨 맞기 싫어서 이러는 것이 절대 아니야. 잠시만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것뿐이라고. 척무관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본 대군이 머리로 먼저 이해한 후에 몸으로 배우는 체질이라는 것을 말이야."

    - 퉁.

    들고 있던 철퇴로 땅바닥을 찍은 척무관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벌써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이 듬뿍 담겨있는 척무관의 말에 왕기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척무관이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 내가 천하에 둘도 없는 불세출의 기재라고 말이야. 그런 척무관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알겠습니다. 저하께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비무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너무 길면 곤란합니다. 일각이 아쉬운 때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내게 반각(半刻)의 시간만 주게.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깨달음을 정리하기 전에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네."

    "물어보시지요. 저하."

    "척무관 덕분에 내게 어떤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는지 잘 이해했다네. 독심과 살기가 부족하고, 권법을 수련하지 않아서 접근전에 약할 뿐만이 아니라 전투감각이 떨어지며, 익힌 무공이 내공과 검에만 치우쳐 있어서 불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약점이지. 혹시 아직 내게 말하지 않은 약점들이 더 있는가? 만약 있다면 지금 다 말해주게나. 모든 걸 다 종합해서 정리를 해야 하니까 말이야."

    "아직 두 가지가 더 남아있습니다."

    "빌어먹을... 치명적인 약점이 많기도 하군. 그건 또 어떤 것들인가?"

    "하나는 저하의 신체가 아직 무공 경지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건 시간이 차차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건 나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네. 임독양맥을 타통하면서 탈태환골이 될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를 않았어. 그 원인이 뭔지는 나도 지금 고민 중이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마지막 또 하나는 무엇인가?"

    "내공의 분산입니다. 저하. 양의검법은 비급에도 적혀있지만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몫을 해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힘과 집중력 그리고 내공이 분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요. 저하께서는 지금 반야심공의 운기를 통해 얻은 40년이 넘는 내공과 뇌전벽력수를 통해 얻은 일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을 합치면 100년이 넘는 내공으로 소관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내공이지요. 하지만 그 둘은 각자가 따로 놀고 있기 때문에 막상 내공으로 붙게 되면 소관에게 단숨에 밀릴 것입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왕기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내가 혹시 척무관에게 미움을 살만한 짓을 한 적이 있는가? 척무관의 주군으로서 내게 잘못된 점이 있느냐는 말일세. 그런 점이 있다면 아낌없이 직언(直言)을 해주게나. 내가 고쳐보도록 노력할 테니까. 척무관이 날 두들겨 패는 걸 너무 기뻐하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것이야."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척무관이 자세를 공손히 하며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저하께서는 소관이 만나본 왕족 중에서 가장 영민하신 분이시며 그 품성 또한 더없이 자애로우신 분이십니다.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으시고, 아랫것들의 목숨을 함부로 뺏지도 않으십니다. 한참 이성에 눈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녀들을 단 한 명도 건드린 적이 없으실 정도로 절제력도 강하시지요. 그러하신 저하께서 고려의 왕이 되신다면 만백성을 편히 살게 해주실 성군(聖君)이 되실 거라고 소관은 굳게 믿고 있사옵니다. 저하를 옆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다는 것은 소관의 자부심일 뿐만이 아니라 원나라에 파견되어 있는 모든 고려 병사들의 긍지이기도 하오며, 대도(大都)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고려인들의 자랑이기도 하옵니다. 저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든 고려인들은 저하께서 왕위에 오르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며, 그런 저하를 위해 소관과 모든 고려 병사들은 언제든지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단지... 저하께서는 한 번씩 소관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옵니다. 믿기지 않는 속도로 무공을 익히시고 그 진경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다 소관이 속이 좁은 탓에 발생한 부덕의 소치일 뿐이니 저하께서 염려하실 일이 아니 것으로 보입니다. 저하께 심려를 끼쳐드린 소관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 털썩.

    말을 마친 척무관이 느닷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땅바닥에 힘차게 박았다.

    - 쿵.

    그리고는 왕기를 향해 연속해서 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척무관을 딱히 말리지 않은 왕기가 가부좌를 틀고 깊은 사색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척무관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도 좋지만 누가 상전인지 한 번씩 일깨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난 몇 년 지나지 않아 고려의 왕인 공민왕이 될 신분이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틀 뒤의 비무에 내 목숨이 걸려있다는 것이지. 척무관이 지적한 것이 정확해. 지금 이 상태로 비무에 나섰다가는 목이 잘려 허무하게 죽고 말 것이야. 난 현대의 과학지식을 이용해 손쉽게 무공을 익히는 바람에 이 시대 무인들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처절하게 느꼈지. 그들이 익힌 무공도 절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말이야. 당연하겠지. 그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들도 나 못지않은 천재들이 창안했을 테니까. 엄밀히 말하면 난 천재도 아니고 불세출의 기재도 아니다. 단지 시대를 앞선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후우..."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긴 한숨을 내뱉은 왕기가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닌 약점이 뭔지는 척무관 덕분에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단시간 내에 보완할 수는 없어. 제대로 된 권법과 보법을 배우는 것만 해도 몇 달은 족히 걸릴 테니까. 하지만 비무는 불과 이틀 후에 치러진다. 내가 성급하게 결정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궁즉통(窮則通)이라 하였다. 궁하면 통하게 되어 있는 법이지. 거꾸로 생각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야. 약점을 보완하지 말고 차라리 장점을 극대화해 약점 자체를 그 누구도 노릴 수 없게 만들어 버리면 되는 것이야. 내가 가진 장점은? 2020년을 살았던 현대인으로서의 지식이다. 이 시대의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방대하고도 깊은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나의 장점이지. 그걸 이용해 이 위기를 돌파해야만 한다.'

    - 쿵. 쿵. 쿵...

    척무관이 계속해서 큰 절을 올리느라 머리를 바닥에 찍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귓가에 들려왔지만 깔끔히 무시한 왕기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척무관에게 맥없이 당한 이유는 나의 내공이 분산되어 있어서도 아니고 내게 독심과 살기가 없어서도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내가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나의 감각이 척무관의 움직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의 눈과 감각을 속이는 보법에 전혀 대처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면 상대방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다. 척무관의 움직임을 잡아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제대로 상대를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야. 단순히 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척무관의 움직임을 잡아낼 수가 없어. 칠성둔형을 이용해서 만든 분신에도 분명히 기가 담겨 있었으니까.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겠지만 그 찰나의 헷갈림이 승부를 가르는 것이지. 새로운 나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이윽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왕기가 눈을 번쩍 뜨며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찾았다. 이 방법이라면 틀림없이 통할 것이야."

    왕기의 외침에 바닥을 얼마나 찍었는지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척무관이 왕기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저하. 무엇을 찾았다는 것이옵니까?"

    환하게 미소를 지은 왕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꾸했다.

    "척무관의 아낌없는 지적 덕분에 마침내 그대를 혼내줄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지. 그러니 그대도 그만 일어나게나. 제대로 다시 한번 붙어보자고."

    뇌전벽력공을 전력으로 일으켰는지 일어서 있는 왕기의 몸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 팍. 파박. 팍팍...

    그런 현상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척무관이 무릎을 펴고 우뚝서며 말했다.

    "저하께서는 새로 익히신 뇌전벽력수를 믿고 계시나 봅니다. 하지만 강호에는 뇌전(雷電)이니 벽력(霹靂)이니 섬전(閃電)이니 하는 이름을 단 무공들이 여러 차례 등장을 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무공들 중 최강의 무공은 불가해무공으로 알려져 있는 뇌전벽력수가 맞긴 합니다만 그에 대한 대비책도 이미 마련되어 있지요."

    "대비책?"

    척무관이 철퇴를 바닥에 내려놓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 촤아앙.

    "그렇사옵니다. 저하. 그러한 무공들을 실제 겪어본 강호인들의 경험이 누적되어 마련된 대비책이지요. 소관이 들고 있는 검의 손잡이는 단단하기로 유명한 오동나무로 되어있지요. 손잡이를 가죽으로 몇 겹이나 칭칭 감쌌고요. 소관이 오늘 괜히 가죽 장갑을 끼고 나온 줄 아십니까? 이 모든 것들은 뇌전이 소관의 검을 타고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밤 방 안에서 번개가 몇 번이나 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지요. 비록 소관의 머리가 저하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닙니다. 저하가 믿고 계시는 뇌전벽력수의 수법은 소관에게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기가 지난밤 겪었던 온통 전기로 이루어진 세상을 지켜보다가 또다시 골이 빠개질 듯 아파지자 반야심공을 동시에 운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분맥과 분공으로 나누어져 있는 반야심공과 뇌전벽력공을 동시에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러자 자신의 예상대로 두통이 삽시간에 가라앉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왕기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대는 지금 뭔가를 오해하고 있군. 뇌전벽력공은 공격을 위한 수법이 아니라 수비를 위한 것이야."

    - 쉬이잉.

    말을 하고 있는 왕기의 몸 주변에서 그동안 익히 보았던 선풍까지 회오리치기 시작하자 눈을 부릅뜬 척무관이 소리쳤다.

    "두가지 내공심법을 동시에 운기하는 분공(分功)의 경지! 저하께서는 정말 불가사의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전설로만 내려오던 양의검법을 대성하시다니요."

    '내가 가진 밑천이라고는 반야심공과 뇌전벽력공 그리고 양의검법이다. 그걸 놔두고 다른 길로 돌아가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기를 이용한 속임수는 흔하겠지만 전기를 이용한 속임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왕기가 자신의 눈에 거대한 기의 덩어리이자 생체전기가 줄줄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척무관을 향해 외쳤다.

    "비무하기 전까지 날 혹독하게 교육해 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계속 이렇게 말로만 싸울 것인가? 어디 한번 빨리 덤벼보라고. 무인답게 손속에 정을 두지 말고 날 개 패듯 두들겨 패보란 말이다. 내가 절대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알겠사옵니다. 저하. 저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가죽 장갑을 단단히 고쳐 낀 척무관이 검을 위로 치켜들더니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고, 그런 척무관의 분신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분신들이 지니고 있는 기에 속으면 안 된다. 기는 분명 여러 곳에서 느껴지지만 생체진기는 단 한 군데에서만 발산되고 있어. 그것이 척무관의 진신(眞身)이다.'

    푸르스름한 검기를 입힌 칠칠이와 스파크가 끊임없이 튀고 있는 삼삼이를 든 왕기가 자신감 있게 자신의 좌측을 향해 쇄도하고 있는 분신을 향해 쌍검을 동시에 휘둘러갔다.

    - 쾅.

    폭음과 함께 쌍검과 검을 맞대고 있는 척무관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저하. 이 짧은 순간에 어떻게 제 본체를 알아보신 것입니까?"

    "내가 말해줘 봐야 그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왕기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칠칠이의 검에서 솟구친 매화가 척무관의 머리통을 향해 덮쳐갔고, 왕기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삼삼이가 벼락처럼 척무관을 심장을 찔러갔다. 그러자 당황한 척무관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양팔을 비상하는 학처럼 빠르게 휘둘러 일전에 보았던 소나무처럼 푸른 벽 두 개를 자신의 머리통과 심장 앞에 동시에 일으켜 세웠다.

    -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왕기의 본격적인 대반격이 시작되었고, 오랜 세월 전설로만 회자되던 양의검법(兩儀劍法)의 진정한 오의가 세상에 다시금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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