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27화 (27/171)
  • #27. < 왕기, 약점(弱點) 보완에 나서다 - 1 >

    서기 1345년 10월 9일

    [고려각 앞의 연무장]

    제대로 된 대련을 하기 위해 아침도 거르고 홍성궁의 앞뜰이 아니라 고려각 앞쪽의 연무장까지 이동했던 왕기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움켜쥔 채 연신 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끄엑... 컥. 커억..."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구토를 하고 있는 왕기 앞에 무심하게 서있던 척무관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하. 그래서 소관이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손속에 정을 두시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제가 말한 저하의 약점이 무엇인지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다행히 빈속이라 건더기 없이 신물만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던 왕기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 척무관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내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약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크게 정신적인 면과 무공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테지요. 정신적인 면으로 볼 때 저하는 아직 무림인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무림인의 마음가짐이란 게 뭔가?"

    "독심(毒心)과 살기(殺氣)이지요. 일반 양민들이 무림인을 무서워하는 것은 싸워서 이길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힘없는 양민들이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민들이 무림인을 무서워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 죽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살인마(殺人魔)들이기 때문이지요. 일반 양민들이 말로 좋게 해결할 일도 무림인들은 일단 상대방을 죽여놓고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는 대다수의 무림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잔인한 폭력에 노출되면서 길러진 독심과 살기 때문이지요. 저하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고개를 갸웃한 왕기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잔인한 폭력에 노출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저하께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이십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지금의 경지에 도달하셨지요. 그러다 보니 대다수의 무림인들이 거쳐가는 과정을 겪지 않으셨습니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기를 느끼는 과정에서부터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됩니다. 기를 느끼지 못하면 평생 무공을 익힐 수가 없기 때문에 매일같이 매질을 당하거나 두들겨 맞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아버지 바지 자락을 붙들고 제발 죽여달라고 빌었던 제 동생 이야기를 들으셨잖습니까? 이렇게 폭력을 공공연하게 자행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도 필사적이기 때문이지요. 특정한 문파나 가문에서 많은 돈을 들여 먹이고 입히고 재워줬는데 배우는 자가 기를 느끼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니까요."

    양의검법 비급에 적혀있던 기를 느끼는 과정에서 도관주에게 모진 매질을 당했다는 태허진인의 글귀를 떠올리며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군. 기를 느끼지 못하는 제자라면 돈을 들여가며 키울 가치가 없어질 테니까. 결국 문밖으로 내쳐질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독해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저하께서는 워낙 빠른 시간에 기를 느끼셔서 그런 과정을 전혀 겪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 겪지 않은 과정이 있지요."

    "또 하나 겪지 않은 과정? 그건 또 뭔가?"

    "기를 느끼게 되면 대개의 경우 그다음 익히는 것이 권법(拳法)입니다. 저하처럼 처음부터 곧바로 검법을 익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지요. 최소한 4~5년간 권법을 수련하면서 또다시 매일같이 두들겨 맞으며 전투감각을 익히고 신체를 단련하게 됩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게 되면 독심과 살기가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게 되지요. 저하께서는 아직 무자비한 폭력의 잔인함을 잘 모르십니다. 자신보다 상수(上手)에게 속절없이 계속 두들겨 맞아야만 하는 하수(下手)의 피눈물 나는 설움도 모르고 계시지요. 왕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맞아 보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가슴 저 밑바닥에 처절한 독심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성정이 폭급(暴急)하며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권법 대신 검법부터 알려준 건 척무관 그대가 아닌가?"

    "그건 세 가지 이유 때문이지요. 첫째, 저하의 경우 무공에 입문한 나이가 너무 늦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기에는 머리가 너무 굵어지신 상태인 것이지요. 저하의 나이에 그런 식으로 매일같이 두들겨 맞으면 반발심이 들어서 도망을 치거나 무공을 포기하기 삽상입니다. 그래서 고분고분 말을 잘 따르는 어린 나이에 두들겨 패가며 무공을 익히게 만드는 것이지요. 둘째, 저하의 신분이 왕족이기 때문입니다. 저하께서 살면서 상대방과 주먹다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소관이 권법을 가르쳐드리지 않은 것이지요. 셋째, 주먹보다는 검이 더 강하기 때문에 검만 제대로 익히면 굳이 권법을 익히지 않아도 상대방을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척무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왕기가 반문했다.

    "호오... 아주 단정적으로 말하는군. 검법이 무조건 권법을 익힌다고 말이야. 그렇게 잘라 말해도 되는 것인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니까요. 저하께서는 십대고수의 면면을 보면서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대부분의 십대고수가 검수라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으셨냐는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 오검(五劍)도 그렇고 (一秘), 사왕(四王) 중에서도 무기를 쓰지 않는 자는 정림방의 팔비신장(八譬神掌)뿐이로군. 열에 아홉이 무기를 쓰는 자들이야."

    "기본적으로 무기를 든 자가 무기를 들지 않은 자보다 유리한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뛰어난 권법(拳法)이나 수법(手法)에는 맨손으로 무기를 든 자를 상대하는 비전오의(秘傳奧義)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 오의들은 당연히 문외불출(門外不出)로 꽁꽁 숨겨져 내려왔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비전오의들이 강호에 비급이 풀리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검법들의 비전오의도 똑같이 널리 퍼졌지만 서로가 동일한 조건이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같은 조건이라면 무기를 든 자가 더 유리하다'로 말입니다. 그래서 강호에 권법이나 수법을 익혀서 십대고수가 된 자가 드문 것입니다. 저하께서도 알다시피 팔비신장은 영약을 다수 복용하여 무림 제일의 내공을 지닌 자라고 소문이 나있는 자이지요. 그 정도는 되어야 맨손으로 검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척무관이 말하는 내게 독심이 없다는 말은 이해하겠네만 내게 살기가 없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난 이미 기황후의 침실에서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다고."

    "그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나무로 된 천장을 찔렀을 뿐이지요. 저하께서 강호에 나가게 되면 방금 전 함께 술을 마시면서 껄껄대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친구의 목을 잘라야 하고, 같이 잠자리를 한 여인의 배를 갈라야 하며, 구걸을 하는 불쌍한 어린 소녀의 머리통를 박살 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자신이 죽여야만 하는 상대방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목을 칠 자신이 있으십니까?"

    "굳이 하라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네만..."

    "그럼 증명해 보이시지요."

    "어떻게 말인가?"

    - 촤아앙.

    처음부터 작심을 하고 나왔는지 평상시와 달리 두툼한 가죽 장갑까지 낀 척무관이 날이 시퍼런 진검을 서슴없이 뽑아들며 말했다.

    "절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대련을 한번 해보시지요. 지금 저하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절 죽일 수가 없으니 안심하시고 공격하셔도 됩니다. 그러니 절대 손속에 정을 두지 마시고 절 상대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하의 약점이 뭔지 저절로 아시게 될 테니까요."

    불가해무공이라는 반야심공을 익히고 정기신 합일에 성공했으며, 공청석유라는 희대의 영약을 복용하고 뇌전벽력공마저 터득해 임독양맥을 타통한 왕기가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쌍검을 힘차게 뽑아들며 외쳤다.

    - 촤차아앙.

    "척무관. 내 손에 죽더라도 부디 날 원망하지 말게나."

    왕기의 호기 어린 말에 척무관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걸렸다.

    "지금 저하의 실력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맘 놓고 손을 쓰시지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절 죽여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이번 대련에 임하셔야 할 것입니다."

    척무관의 말에 왕기가 속으로 뇌까리며 각오를 다졌다.

    '지금의 나라면 척무관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지는 말아야 한다. 안 그러면 이틀 뒤의 비무에서 내가 목이 날아갈 테니까.'

    그 순간 거리를 재고 있던 척무관이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달려들며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하지만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었던지 그런 모습이 왕기의 감각에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정확히 잡혔다.

    "하압!"

    왕기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왼팔에 쥔 삼삼이를 힘차게 휘둘러 척무관의 검을 맞이해나갔다.

    - 쾅.

    폭탄이 터지는 듯한 격돌음과 함께 왕기의 검과 부딪친 척무관의 검이 착무관의 손을 벗어나 하늘로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고,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왕기의 눈이 부릅떠지며 입에서는 의문스럽다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음?"

    그 순간이었다. 척무관이 날아간 검을 주우러 가는 대신 오히려 발을 재게 놀리며 왕기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오기 시작했다. 빈손으로 우직하게 파고드는 척무관을 보며 왕기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런 미친..."

    자신이 오른쪽으로 파고 드려는 척무관을 보며 쌍검을 들고 있던 왕기의 오른팔이 빠르게 찌르기를 하며 견제에 나섰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순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척무관이 정말로 검에 찔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탕.

    찰나의 주저함으로 반 템포 늦게 찔러가는 왕기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칠칠이의 시퍼런 검날을 척무관이 오른손의 손등으로 가볍게 후려치며 튕겨내 버렸다. 그리고는 안으로 뱀처럼 미끄러지며 왼손의 단단한 장저(掌低)를 왕기의 턱을 향해 힘차게 치켜 올렸다.

    - 쒸이잉.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자신의 턱을 향해 날아오는 손바닥을 보며 이를 악문 왕기가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제치는 동시에 전력을 다해 반야심공의 내공을 턱 쪽으로 보내었다.

    '타이밍이 늦어서 완벽하게 피하기는 불가능해. 반야심공으로 턱을 보호하며 피해를 최대한 줄인다.'

    - 뻑.

    호쾌한 타격음이 들리며 장저에 턱을 얻어맞은 왕기가 순간적으로 뇌진탕이 왔는지 발이 풀리며 뒤로 한걸음 주춤 물러났다. 그 순간 왕기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계기를 시전하는 듯 자신의 바로 앞에서 자연스럽게 한 바퀴 빙글 돌아가는 척무관의 팔꿈치가 접혀지더니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 쐐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드는 척무관의 팔꿈치를 보며 뇌진탕에 걸려있는 왕기가 필사적으로 몸을 조종해 허리를 숙이는데 성공했다. 정통으로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 콰아앙.

    허리를 숙인 왕기의 눈에 강력한 진각을 밟은 척무관의 왼 무릎이 마치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하늘로 승천하는 용처럼 힘차게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왕기가 내공을 명치 쪽으로 다급히 보내었다.

    - 콰앙.

    대형 덤프트럭이 담벼락을 들이박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척무관의 슬격(膝擊)에 배를 적중당한 왕기가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끄헥..."

    조금 전의 상황을 차분히 돌이켜본 왕기가 척무관을 보며 물었다.

    "검을 떨어뜨린 건 일종의 속임수 같은데? 나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말이야."

    "당연히 속임수지요. 하지만 소관이 비겁한 암수(暗手)를 쓴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틀 뒤에 있을 비무에서도 얼마든지 허용되는 수법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런 하찮은 수법에 속는 자가 어리석은 것이지요. 그리고 어리석음의 대가는 자신의 목숨입니다. 저하께서는 강호인들의 승리에 대한 집착을 아직 잘 모르고 계십니다. 허용이 되는 모든 수법들을 다 동원하는 것이 강호인이라는 자들입니다. 회복이 어느 정도 되셨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대련을 통해 저하의 또 다른 약점에 대해서 알려드릴 테니까요."

    몸을 일으켜 세운 왕기가 방금 전의 굴욕을 반드시 갚아주겠다 듯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말했다.

    "이제는 그런 속임수에 속지 않을 것이야. 절대 방심도 하지 않을 것이고. 척무관이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대련에 임하도록 하지."

    왕기의 말에 척무관이 방긋 웃었다.

    "이제야 저하의 눈에 독심이 좀 생기는군요. 역시 사람은 좀 두들겨맞아야 정신을 차리나 봅니다. 소관이 저하의 또 다른 약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하께서는 강호에 널리 퍼져있는 무공들을 너무 경시(輕視)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뭐 그럴 만도 하지요. 그 누구도 익히는데 성공하지 못했던 불가해무공을 손쉽게 익히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잊으시면 안 됩니다. 강호에 널리 퍼져있는 무공들도 한 시대를 풍미한 절대고수들이 창안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디 한번 제 공격을 막아보시지요."

    평상시보다 거리를 더 벌리고 있는 척무관을 보며 버림받은 새끼 고양이처럼 경계심을 잔뜩 가진 왕기가 정신을 하나로 끌어모았다. 그 순간 척무관을 발을 어지럽게 놀리며 왕기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픽. 픽. 픽...

    달려오는 척무관의 모습이 좌우로 극심하게 흔들리더나 여기저기서 환영(幻影)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홍길동처럼 분신술(分身術)을 쓰는 척무관을 보며 경악에 찬 왕기가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본신과 분신을 구별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구별에 실패한 왕기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이그러질 때였다.

    - 뻐억.

    유령처럼 왕기의 왼쪽 옆구리에서 솟구친 척무관의 주먹이 정확히 왕기의 갈비뼈 아래를 때렸다. 또다시 옆구리를 움켜쥐고 땅바닥으로 쓰러지는 왕기를 향해 척무관이 발을 들어 연속으로 찍어내렸다.

    - 퍽. 퍽. 퍽...

    다급히 양팔을 교차해 척무관의 발을 겨우겨우 막고 있을 때 척무관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땅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을 것입니까? 이틀 뒤에 만나게 될 상대들은 저처럼 저하의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재빨리 일어서셔야지요."

    게으른 당나귀가 구른다는 뜻의 뇌려타곤(懶驢陀坤)의 수법으로 땅바닥을 빙글빙글 구른 왕기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자 척무관이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저하께서는 잘 이해가 되시질 않을 것입니다. 불가해무공을 익혀서 정기신 합일을 하고 임독양맥까지 뚫어 초인적인 감각을 지닌 내가 왜 한낱 분신 따위를 구별하지 못할까라고 말입니다. 그건 저하의 오만이십니다. 방금 소관이 시전 한 칠성둔형(七星遁形) 보법은 이백 년 전 보법 하나만으로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하던 칠성진인(七星眞人)이 창시한 것입니다. 저하에 비해 꿀릴게 하나 없는 일대종사(一代宗師)가 창안한 무공이란 말입니다. 당연히 그런 감각을 속이는 비법들이 여럿 숨겨져 있지요. 본인이 익히고 있는 무공만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하의 약점 중에 하나는 본인이 익히고 있는 무공을 너무 높이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익힌 무공들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관이 오늘 저하의 그런 마음을 송두리째 뜯어고쳐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소관의 공격을 막아보시길 바랍니다."

    말을 끝낸 척무관의 몸이 갑자기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날아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나비 같기도 하고 술이 취한 주정뱅이의 걸음 같기도 한 척무관의 몸놀림을 보며 왕기가 중얼거렸다.

    "개방의 취팔선보(醉八仙步)."

    이윽고 취팔선보를 시전하는 척무관을 검으로 맞추지 못해 속절없이 허공만을 베다가 또다시 옆구리를 두들겨 맞고서 땅바닥을 나뒹굴던 왕기가 이전과는 달리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며 척무관이 말했다.

    "몇 번 두들겨 맞으시더니 확실히 나아지셨군요. 저하의 또 다른 약점은 소관 말고는 다른 자와의 비무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무공에 대한 견식이 얕고 경험이 한쪽으로 극심하게 치우쳐 있지요. 익히고 있는 무공 또한 오로지 내공과 검밖에 없습니다. 권법, 수법, 보법, 신법 등에는 무지하신 상태이지요. 전형적인 절름발이 무인입니다. 소관이 그런 약점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척무관이 갑자기 뒤쪽을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준비한 것을 들고 오너라."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각종 무기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병기대를 들고서 뛰어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가지고 오는 것은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라는 것입니다. 비무를 하기 전에 다양한 무기들의 위력을 몸으로 직접 겪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비무 전에 소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이 비무를 하다가 쇠붙이에 베이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까요."

    도끼, 채찍, 도리깨, 방패, 철퇴 등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한지 왕기가 부르르 몸을 떨며 빠르게 뇌까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몸을 지켜주는 반탄지기고 나발이고 간에 이렇게 계속 두들겨 맞아서는 버틸 수가 없어. 척무관이 말하는 나의 약점이 뭔지는 알겠어. 문제는 하나씩 천천히 보완해 나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거야. 비무일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밖에 없다고. 마인드를 완전히 바꿔야만 한다. 난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공돌이야. 척무관처럼 이 시대의 무림인과 똑같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내 정체성을 버려서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야. 자고로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였으니 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약점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어.'

    새롭게 각오를 다진 왕기의 눈에 철퇴를 들고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척무관이 잡혔다. 가볍게 두들겨 맞아도 온몸의 뼈가 2020년에 즐겨먹던 빼빼로처럼 '톡' 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묵직한 철퇴를 보며 왕기가 화들짝 놀라 다급히 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잠시만! 척무관. 잠시만 내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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