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23화 (23/171)
  • #23. < 칠성(七星)과 뇌전(雷電) - 1 >

    생존본능이 급격히 솟구치자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급격히 치밀어 오르고 당장이라도 황궁을 벗어나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자신의 머리를 지배하려고 들자 왕기가 정기신을 일제히 깨우며 스스로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진정해라. 왕기. 내가 비록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無神論者)이기는 하지만 현대인이었던 내가 과거로 끌려온 이 상황이 범상치 않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 여기에는 분명히 내가 모르는 사연이 담겨 있을 터.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이곳은 과거의 원나라이며 난 공민왕이 될 몸이 확실하다. 내가 설사 황궁을 탈출해 고려로 무사히 도망친다고 해도 거기는 2020년의 대한민국이 아니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누려왔던 발달된 문명의 삶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방법은 나 스스로가 만드는 것뿐이야. 현실에서 도망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어. 죽음이 두렵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부딪쳐 나가는 수밖에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른 왕기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고용보가 바닥에 내려놓은 것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흘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원나라에서 발행하는 지폐인 중통보초(中統寶鈔) 2관문 짜리 100장을 노끈으로 묶어놓은 것들이 10묶음 그리고 각각 다른 색깔로 칠해진 비슷한 크기의 나무 곽이 3개인 것을 확인한 왕기가 물었다.

    "2관문이 은 1냥이니 한 묶음이 100냥이고 그런 게 10묶음이 있으니 다 합쳐서 은으로 천 냥이로군. 적지 않은 돈이야. 근데.. 이 목곽들은 다 뭔가?"

    고용보가 갑자기 어깨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저하. 은 천 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보상은 그 목곽들이지요. 그걸 얻어내기 위해 소인이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알겠네. 내가 자정원사의 노력을 고맙게 여기고 잊지 않겠네."

    말을 하며 기대감에 부푼 왕기가 목곽들을 순서대로 열었다.

    - 딸칵. 딸칵. 딸칵.

    3개의 목곽 안에는 각각 빨간색 나뭇조각에 꽃이 새겨져 있는 목패, 은색으로 된 나뭇조각에 칼이 새겨져 있는 목패 그리고 황금색 나뭇조각에 풀이 새겨져 있는 목패가 들어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왕기가 바라보자 고용보가 설명을 해주었다.

    "저하. 황궁에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들이 몇 군데 존재합니다. 꽃이 그려져 있는 패는 전 세계에서 끌어모은 절세미녀들이 머물고 있는 향당(鄕堂)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홍패(紅牌)입니다. 은색의 패는 뛰어난 신병이기(神兵利器)들이 보관되어 있는 병기고(兵器庫)를 출입할 수 있는 은패(銀牌)이고요. 마지막 패는 약초들이 보관되어 있는 약재고(藥材庫)에서도 특별한 영약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들어갈 수 있는 금패(金牌)입니다. 오로지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것들이지요."

    '홍패는 아마도 하렘(harem)을 출입할 수 있는 신표인가 보군.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여자라니.'

    자신의 앞에 서있는 고용보의 아랫도리를 슬쩍 쳐다본 왕기가 홍패를 척무관을 향해 던졌다.

    "난 필요 없으니 척무관이 가지도록 해. 어차피 자정원사는 줘봤자 쓸모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병기고에서 들고 나올 수 있는 숫자는 제한되어 있겠지?"

    "그렇습니다. 1인당 한 자루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지요."

    "그걸 황후마마에게 말해서 2자루로 늘려주게. 난 쌍검을 사용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럼 내가 자정원사의 공을 절대로 잊지 않겠네."

    고용보가 미처 대꾸를 하기도 전에 홍패를 받고서 희희낙락하며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척무관이 펄쩍 뛰었다.

    "저하. 갑자기 쌍검을 사용하시다니요. 쌍검술이 눈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여도 실속이 전혀 없습니다. 두 자루의 검을 놀리느라 집중력과 내공이 분산되어 진정한 고수를 만나면 찍소리 한번 못 내보고 목이 달아나는 것이 바로 쌍검술입니다. 무림인들이 쌍검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괜찮아. 난 양의검법을 제대로 익혔으니까 집중력과 내공을 분산하지 않고서도 쌍검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다고. 내가 조만간 대련을 하면서 직접 보여주도록 하지."

    척무관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저하께서 양의검법을 들여다보신지 이제 겨우 사흘밖에 안되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사흘이면 충분해."

    입을 헤 벌리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있는 척무관을 무시한 채 왕기가 다시 고용보에게 물었다.

    "내가 욕심을 내는 게 아니라 쌍검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두 자루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그런 이유라면 황제께서도 납득하실 것입니다. 소인이 미리 손을 써두겠습니다."

    "좋아. 병기고는 그렇게 하고... 기황후에게 듣기로는 영약은 남아있는 게 없다고 들었는데?"

    "황후마마의 권력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영약은 바얀 승상이 다 가져가서 없습니다만 황제라면 또 다르지요. 명색이 제국이라고 불리는 원나라의 황실입니다. 황제가 다치거나 병이 위중할 경우를 대비해 몇 개 정도는 비상용으로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단 저하가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지요.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영약이 있다는 소리에 당장이라도 금패를 들고 약재고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왕기가 차분히 마음을 다스렸다.

    '난 아직 분공에 적합한 내공심법을 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넙죽 영약을 복용해서 반야심공을 운기해 소화했다가는 반야심공의 기세가 지나치게 올라가게 된다. 다른 내공심법으로 뒤따라 잡을 방법이 없어질 것이야. 그랬다가는 양의검법의 정수를 영영 포기하는 꼴이 돼버려. 빨리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지. 영약이 발이 달려 도망 갈리는 없으니 먼저 분공에 적합한 내공심법부터 구해야만 한다. 위력이 반야심공에 밀리지 않을만큼 뛰어난 것으로...'

    생각을 정리한 왕기가 혼이 나간 얼굴로 '양의검법을 사흘 만에 익히다니 믿을 수가 없어. 나조차도 포기한 검법이라고.'를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척무관에게 물었다.

    "척무관, 양의검법의 분공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네. 저하. 익히지는 못하였지만 그게 뭔지는 소관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럼 내가 익히고 있는 반야심공에 밀리지 않을만한 내공심법으로 추천할만한 게 있나?"

    잠시 고민을 하던 척무관이 입을 열었다.

    "강호에 떠도는 어지간한 내공심법은 다 알고 있지만 당장은 그럴만한 내공심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불가해무공에 밀리지 않는 것은 같은 불가해무공밖에 없을 것입니다."

    "눈에는 눈이라. 결국 칠성검(七星劍)과 뇌전벽력수(雷電霹靂手) 중에 하나를 더 익혀야만 한다는 소리로군. 잘 알겠네."

    잠시 후 고용보와 척무관을 다 내보낸 왕기가 빠르게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열흘 내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먼저 양의심공으로 분맥을 하고 불가해무공 중에 하나를 더 해독해서 영약을 복용하여 분공에 성공해 양의검법을 대성한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나의 최선이야.'

    결정을 내린 왕기가 칠성검의 비급과 뇌정벽력수의 비급을 짐 보따리에서 끄집어 내었다. 비급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얇은 칠성검의 비급을 집어 든 왕기가 비급이 왜 얇은지 금방 이해할 수가 있었다.

    칠성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표지에 그려져 있었고, 국자의 머리부터 차례로 천추(天樞), 천선(天旋), 천기(天機),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의 순서로 기술된 비급의 내용은 각각 1장에 불과했고, 각 장마다 사자성어로 된 구결 하나와 검을 휘두르는 무인의 그림 하나만이 딸랑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칠성검 표지에 있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아래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간견적불일정시진실(看見的不一定是眞實)]이라는 구절을 읽으며 왕기가 중얼거렸다.

    "보이는 것이 꼭 진실인 것만은 아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리고 비급을 다 합쳐봐도 글자 수가 28자밖에 되지 않는데 이걸로 무슨 내공심법을 익힌다는 거지? 그리고 이딴 조잡한 무공 비급이 왜 불가해무공으로 선정된 거야?"

    왕기가 서탁에 앉아 칠성검에서 가장 먼저 나와 있는 천추편에 적혀있는 신신지신(信信之信)을 시작해서 각각의 편에 적혀있는 모든 사자성어들을 한곳에 모아 적기 시작했다.

    [신신지신(信信之信), 당위신선(當爲神山), 여천추지(如天樞地), 양기합일(兩氣合一), 지기수신(地氣秀身), 신기강검(神氣降劍), 자강불식(自强不息)]

    도가(道家)의 심오한 경문(經文) 같기도 한 28자의 구절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어보던 왕기가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급의 맨 끝에 달려있는 정림방에서 연구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해설서를 펼쳐보았다.

    [정림방을 대표하여 무당파의 18대 장문인인 도광진인(道廣眞人)이 적는다. 본 칠성검은 무당의 검법으로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당의 검법이 아니다. 무당파가 있는 무당산은 예로부터 많은 도사들이 도를 닦던 산으로 그러한 도사들 가운데 칠성검을 익혀 신선(神仙)이 된 자가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이러한 칠성검을 무당파의 개파조사(開派祖師)이신 장삼풍(張三豐) 조사께서 힘들게 얻은 것을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칠성검을 익혀 신선이 된 자는 검선(劍仙)이라고 불리는 여동빈(呂洞賓)이며 이러한 증언을 한 자가 검선 여동빈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있다는 장삼풍 조사이기에 본 무당파가 칠성검을 신선지검(神仙之劒)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급에 적혀있는 구결들은 내공심법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짧으며, 각 장의 그림들에 나와있는 동작들을 몇 년간 부단하게 수련해도 아무런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당에서 오랜 실험을 통해 이미 확인을 했기에 실제로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불가해무공이라고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칠성검의 유래와 신선지검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게 된 왕기가 자세를 고쳐잡고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 : 어떠한 책이라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뜻)'의 마음으로 다시 칠성검의 비급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시진이 흐른 뒤 왕기가 그 옛날 알몸으로 목욕을 하다가 밀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내고서는 '유레카(Eureka)'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던 아르키메데스처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알아냈다. 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 비급을 해석하지 못하는지를 알아냈다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이란 정말 무섭군."

    얼마나 정신을 집중했던지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은 왕기가 칠성검의 비급을 저 멀리 던져버리며 뇌까렸다.

    '내가 발견한 방법대로라면 칠성검을 익힐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이건 무신론자인 내게 맞지 않는 무공이다. 익혀서 신선이 될 마음도 없고...'

    새로이 비교적 두꺼운 두께를 자랑하는 뇌정벽력수의 비급을 손에든 왕기가 첫 장을 넘겼다.

    [인육(人肉)을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것을 '회(膾 : 생선이 아니라 고기를 잘게 썬 것)'라고 부른다. 저며서 말린 것을 '포(脯)'라 하며 구운 것을 '자(炙)'라고 한다. 이 '회'가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공자(孔子)는 사람 고기를 즐겨먹었다. 아끼던 제자 자로(子路)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가 잘게 토막 나 회로 만들어져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지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공자는 그 후로 그렇게 좋아하던 회를 먹지 않았다고 전해져 온다. 이러한 사실들을 먼저 알려주는 것은 본인이 인육을 사고팔던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여타 상인들보다 장사가 잘 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상인이었다. 그러한 기술을 발전시켜 새롭게 창안한 것이 바로 뇌전벽력수(雷電霹靂手)이다...]

    멸문한 제갈세가를 대신해 새로이 오대세가로 편입된 벽력가(霹靂家)의 초대가주가 인육을 사고파는 상인이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러한 인육을 잘 팔게 만들던 기술이 뇌전벽력수의 원천이라는 말에 비급을 들고 있던 왕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뇌까렸다.

    '중국의 인육 역사는 수천 년에 달한다. 현대에서도 아기의 사체를 이용해 인육캡슐을 만들어 팔고 있다는 내용이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왔었지. 간호사들이 빼돌려 판 아기 태반을 이용해 보양식을 만들어 먹는다고도 하고. 내가 중국인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한국인인 나로서는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다. 이걸 계속 봐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던 왕기가 다시 뒷장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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