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고려제국건국기-21화 (21/171)
  • #21. < 양의검법(兩儀劍法)에 도전하다 - 1 >

    왕기와 척무관을 번갈아보던 기황후가 의견을 제시하며 중재에 나섰다.

    "이것 참 곤란하군요.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대군의 부탁을 들어드려야 하겠지만 강호의 십대고수이자 고려 제일의 무관이며 대군의 수신호위(修身護衛)가 저렇게까지 강력하게 반대를 하니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런 자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대군을 강호에 내보냈다가 행여 불상사라도 발생하면 제 입장이 많이 난처해집니다. 그러니 대군께서 척무관이 말한 조건을 달성하시면 제가 황제께 말씀드려 대군의 강호행을 승인해 드리는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더 이상 고집을 부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직감한 왕기가 기황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단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척무관이 말한 조건을 달성하면 황후마마께서는 반드시 절 강호로 내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척 무관은 저와 동일한 내공을 사용해서 대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늙어죽을 때까지 강호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척무관이 즉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동일한 내공을 사용하더라도 대군께서는 절대 절 이기시지 못할 테니까요."

    자신감이 넘치는 척무관의 대답에 기황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군께서 척무관을 꺾으시면 강호행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단 속임수나 거짓이 있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입니다."

    잠시 후 어렵사리 기황후와의 협상을 끝마친 왕기가 침실 밖으로 나서며 척무관에게 일렀다.

    "척무관.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지."

    "그러시지요. 저하. 새로 배정받은 방으로 소관이 곧바로 찾아가겠습니다."

    [흥성궁의 한 방]

    병사들이 짐을 옮겨놓은 새로운 숙소에서 왕기가 척무관을 보며 물었다.

    "왜 나의 강호행을 반대한 것인가? 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힘들게 세운 계획이었는데 그대 때문에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나? 난 그대가 날 강호로 내보내기 위해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강호에 나가서 죽지 말라고 기습에도 살아남고 동귀어진의 수법에도 살아남도록 훈련을 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대가 아닌가?"

    "맞습니다. 저하. 무공을 익힌 자는 주유강호(周遊江湖)를 꿈꾸는 게 당연한 법이지요. 소관 또한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소관이 저하를 강호에서 덧없이 당하지 않도록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지요. 그래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건가?"

    "저하께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다른 사람과의 시시비비를 최대한 피하면서 고려의 대군이 아니라 원나라 황실이 임명한 감찰관의 자격으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를 들렀다가 다시 돌아오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저하께서 강호의 기본적인 생리를 잘 모르셔서 하시는 생각입니다."

    "강호의 기본적인 생리가 도대체 뭐길래 내가 잘 모른다는 건가?"

    "명성(名聲)에 대한 지독한 탐욕이지요. 명성이 밥 먹여 주는 곳이 바로 강호이며, 이름값만으로도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고, 본인의 이름 하나로 누군가를 손도 대지 않고 죽일 수 있는 곳이 바로 강호라는 곳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지요. 무림사미(武林四美) 중에 한 명이자 하북 팽가 가주의 딸인 팽도일미(彭刀一美)를 하남표국의 둘째 아들이 비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미 중에 팽도일미가 가장 미모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하북 팽가라는 뒷배가 없었다면 절대 무림사미에 들지 못했을 거라면서요. 사실 비난이라기보다는 술좌석에서 가볍게 농으로 한말이었지요."

    "그래서?"

    "하북 팽가는 예로부터 타고난 기골이 장대하고 외모가 우락부락하기로 유명해서 가문의 딸이 무림사미에 들어가 있다는 건 하북팽가의 자랑이었습니다. 팽가의 어른들이 하북일미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능히 짐작이 가지요. 발 없는 말이 만리를 가는 법입니다. 하남표국의 둘째 아들이 자신의 손녀를 비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전대 가주가 노발대발했습니다. 팽가의 전대 가주가 누군지는 아시지요?"

    "사왕(四王) 중에 한 명이라는 도왕(刀王)이 아닌가?"

    "정확합니다. 화경에 든 절대고수인 도왕이 불같이 화를 내며 하남표국을 압박했지요. 손녀를 비웃고 하북팽가를 무시한 둘째 아들의 목을 내놓지 않으면 하남표국을 직접 피로 씻겠다고요. 그래서 하남표국에서 소림사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남표국을 세운 표국주가 소림의 속가 제자 출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소림사에서는 도와달라는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상대방이 도왕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요. 결국 팽가 아니 도왕의 압박을 못 견딘 하남표국의 표국주가 직접 둘째 아들의 목을 잘라 목함에 넣어 팽가로 보내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강호의 명성이라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왕기가 되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 단순한 협박만으로 아비가 아들의 목을 잘라 보냈다는 게..."

    "사실입니다. 표국주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도왕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피로 씻겠다고 말한 이상 반드시 지켰을 테니까요. 그래야 자신의 명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도왕의 처사가 너무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린 표국주의 아들이 잘못했다는 의견이 더 우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성이 가지는 힘인 것입니다. 제가 저하의 강호행을 반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저하에게는 이미 적지 않은 명성이 생겼습니다. 선풍향검이라는 그럴듯한 호가 붙었고 사영사미보다 위인 일군으로 곧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 줄 아십니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저하께서 아무리 시비를 피하려고 해도 피해지지가 않습니다. 저하가 가는 곳곳마다 수많은 도전자들이 저하를 꺾고 명성을 날리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 테니까요. 소관이 그랬습니다. 십대고수에 이름이 올라간 후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지요. 게다가 저하와 소관은 고려인이기 때문에 단순히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떡하든 죽이려고 들 겁니다. 그런 일을 방지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지요."

    "그 방법이 무엇인가?"

    "소관이 그러했듯이 도전하는 족족 목을 쳐서 죽여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야 감히 덤벼들지를 못하니까요. 저하. 소관은 사람 죽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전자를 멀쩡히 살려서 돌려보내면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도전자들이 더욱더 늘어나게 되지요. 강호에서 명성을 유지하는 길은 살육(殺戮)뿐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저하께서 동경하는 강호행이나 강호의 의리(義理)라는 것들은 핏구덩이 속에서 나뒹구는 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하의 강호행을 반대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난 꼭 나가야만 하네."

    "이번에는 소관이 여쭤보겠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합니까? 무공을 익히는 건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소관이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인 저하를 가르칠 만큼 뛰어난 스승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정도면 자격이 그다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저하께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강호에 나가시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옵니까?"

    "왕이 되어 고려로 돌아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네. 나에게는 제대로 된 세력이나 인재가 없어. 기껏해야 척무관 뿐이라고. 고려라는 한 나라를 경영하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적어. 나의 말을 따르는 뛰어난 인재들이 필요해. 그래야만 고려를 강한 나라로 만들 수가 있어. 강호에 나가서 그런 인재들을 포섭할 생각이라네."

    "저하.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등은 전통적인 한족의 세력입니다. 그런 자들을 포섭해서 고려로 데려가봐야 고려의 일에 한족을 끌어들였다고 오히려 반발만 살 것입니다."

    "아니지. 낮에 고용보가 말한 것을 듣지 못했는가? 각 문파나 세가에서 일정 숫자 이상으로 한족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 고려인이나 다른 종족들을 제자로 받아들인다고 한 말을 말이야. 내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들이야."

    척무관이 비로소 왕기의 뜻을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께서 무얼 노리고 계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자고로 한 손으로 열손을 당할 수가 없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안 됩니다. 세상일이란 게 뜻대로 다 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고려에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습니다. 저하께서 왕이 되신 후 그런 자들을 뽑아서 중용하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강호행을 하시고 싶으시면 소관을 실력으로 이기시고 절 밟고 지나가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 정도 수준의 무공이라면 소관도 저하를 맘 편히 보내드리겠습니다."

    타협 따위는 없다는 단호한 표정의 척무관을 보며 왕기가 입을 열었다.

    "좋네. 나도 당장 강호로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하루하루 키가 자라고 있고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저하께서 한창 성장기라 그럴 것입니다. 감기와 정기신 합일에 따른 신체적인 적응도도 올라가고 있을 것이고요."

    "그렇겠지. 이러한 신체적인 성장이 다 끝나면 강호에 나갈 생각이니 너무 걱정 말게. 척무관이 원하는 대로 그대를 꺾은 후 밟고 지나갈 테니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네."

    "어떤 것이옵니까? 저하."

    "낮에 쾌검청랑과 붙을 때 보니 척무관이 사일검법의 초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네. 아마도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무공들이 강호에 풀려서 그런 것이겠지?"

    "맞습니다. 강호에 돌아다니는 이름난 검법들은 소관이 다 알고 있습지요. 저하께서 익히고 계신 매화검법이나 태극검법 등의 초식들은 소관이 이미 훤히 다 꿰뚫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척무관이 잘 모르거나 직접 겪어보지 못한 검법들이 무엇인가? 아무래도 그대를 꺾으려면 그런 검법들 위주로 익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검법들이라면 가장 먼저 불가해무공 중에 하나인 칠성검(七星劍)이 있겠지요. 다른 것으로는 양의검법(兩儀劍法)이 있을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무당파의 검법들이로군요."

    "양의와 칠성이라... 잘 알겠네."

    "저하. 칠성검은 소관도 그 원리를 몰라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지만 양의검법의 내용 정도는 소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의검법은 칠성검처럼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무공은 아니지만 지독하게 사람을 가리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무당파의 장로들조차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익히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무당파 고수들이 말년에 소일거리 식으로 익힌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요. 호기심을 가지시는 것은 좋지만 아무쪼록 조심 또 조심해서 익히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지 않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알겠네. 내가 조심 또 조심하지.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네.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내가 불가해무공이라는 반야심공을 해석해서 성공적으로 익혔다는 것을 말이야."

    척무관이 물러가자 왕기가 짐 꾸러미에서 양의검법 비급을 꺼내며 뇌까렸다.

    '성장기가 끝나려면 최소한 3개월 정도는 걸릴 것이야. 그 사이에 양의검법을 익혀서 척무관을 꺾는다. 양의로 모자라면 칠성검도 도전해봐야 할 것이고.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척무관이 뻔히 알고 있는 매화검법 따위로는 이길 수가 없다.'

    양의검법의 비급을 펼쳐든 왕기가 첫 장을 읽으면서 왜 양의검법이 지독히도 사람을 가린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무당파의 12대 장문인인 태허진인(太虛眞人)이 적는다. 본 진인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다. 머리는 하나였지만 몸뚱어리에 팔이 네 개 달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과 달리 복부에 2개의 팔이 더 달린 채 태어난 아기를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본 진인의 부모는 근처에 있는 도관(道觀)에 아기를 맡기셨다...]

    '팔이 네 개라. 이 시대에 방사능 오염에 의한 기형아는 아닐 테고... 태허진인은 아마도 샴쌍둥이(Siamese Twins)였나 보군. 정확한 표현으로는 두 사람이 한 몸을 공유하는 결합 쌍생아이지. 머리가 하나이고 팔이 네 개인 것으로 보아 어미 뱃속에서 쌍생아 소실(Vanishing Twin) 현상이 발생했어. 쌍둥이가 수태되었지만 임신 초기에 자연유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한 명의 아기만 태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지. 사라진 아기는 모체에 재흡수되거나 살아있는 다른 아이에게 흡수된다. 태허진인은 운이 좋았군, 성별이 남자인 샴쌍둥이는 대부분 사산(死産)되는데 말이야.'

    현대인의 의학지식으로 태허진인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왕기가 다시 비급의 내용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설마 선천적으로 팔이 네 개인 사람만이 익힐 수 있다는 것은 아닐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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